2020년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 영화제를 조직하는 사람들에게 창의력이 요구되는 시기다. 온타리오주에 2억달러의 경제 효과를 가져다주는 북미 최대 영화제로서 오스카를 비롯한 시상식 시즌의 풍향계 역을 맡아온 토론토국제영화제도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상영작을 50편으로 축소하고, 해외 언론과 영화산업 종사자를 위한 모든 상영과 행사, 미팅을 소프트웨어 기업 시프트72사(Shift72)와 함께 구축한 온라인 시스템으로 돌렸다(캐나다 국내 관객과 언론을 위한 실제 상영도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적용해 병행됐다). 9월 10일부터 19일까지 2020년 제45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에디션을 ‘방구석’에서 체험한 김혜리 기자의 일기를 싣는다.
9월 10일
편지가 손편지로 변하고 만남이 오프라인 미팅이 되더니, 국제영화제에서 보내온 이메일은 극장 상영을 ‘물리적 상영’이라 지칭하고 있다. 올해로 세 번째 프레스 배지를 받은 토론토국제영화제(이하 토론토영화제)는 내 책상 위의 컴퓨터 모니터, 그리고 그것과 HDMI 케이블로 연결된 TV 안에서 오늘부터 진행될 예정이다. 캐나다 시계로 매일 아침 새로운 그룹의 영화가 공개되고 이들은 온라인 디지털 시네마 플랫폼을 통해 48시간 동안 접근 가능하다. 카메론 베일리 토론토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비장하게 - 그럴 만도 하지만- “위대한 스토리텔링은 멈추지 않는다”라는 표현을 썼지만 13시간 시차 건너편에 있는 영화기자의 상황은 엄숙한 대의와 어울리지 않게 번다한 일상 잡무에 목까지 파묻혀 있다. 무려 4년 만의 집 이사가 영화제 기간 한복판에 떡하니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썸머 85>(Summer of 85)를 출품한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전작을 검색하다가 라면 상자에 청테이프를 붙이는가 하면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상영작을 체크하다 말고 정수기 렌털 상담을 하는 이상한 영화제 기간 풍경이다.
오늘의 34번째 한숨을 쉰 다음 알람 시계 하나를 미국 동부 표준시에 맞추자마자 일본의 영화 수입사에서 일하는 오랜 친구로부터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다급한 메시지가 날아왔다. “마켓 첫 상영이 1시간 남았는데 영화제에서 상영 링크가 아직도 안 왔어! 프레스는 뭐 받았어?” 값비싼 마켓 배지를 구매해 참여하고 좋은 영화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바이어들이 영화제에 임하는 긴장도는 사뭇 다르다. 그래도 업무 효율이 낮기로 악명 높은 칸국제영화제는 아니니 괜찮을 거라고 서로 격려하다보니 마켓 첫 상영 30분쯤 전에 토론토로부터 온 이메일이 디지털 시네마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특정 영화가 몇년도 어디 영화제에서 소개됐더라?’ 하며 헤매는 것이 다반사지만 2020년 토론토만큼은 절대 다른 해 다른 영화제와 혼동되지 않을 것 같다.
9월 11일
심야의 광기로 나 홀로 페스티벌을 시작해보기로 한다. 미드나이트 매드니스 부문의 타이완 좀비영화 <겟 더 헬 아웃>(Get the Hell Out)은 영화제 관객은 물론 모든 영화팬이 평소 명심해야 할 격언으로 막을 연다. “영화 한편 잘못 고르면 90분이 괴롭지만, 정부 잘못 뽑으면 4년이 괴롭다.” 입법원의 의원 슝(메건 라이)은 외국계 화학기업이 세운 공장이 바닷가 고향 집을 빼앗자 정계에 진출한 열혈 신예 정치인이다. 그러나 선거구민에게 열심히 하고 있음을 입증하려고 정책 개발보다 몸싸움에 몰두하는 의회에서 슝의 진로는 녹록지 않다. 결국 여성 혐오 발언을 일삼는 언론인과의 물리적 충돌로 슝은 제명당하고, 이어진 보궐선거에서 동상이몽의 두 정당은 보안요원 출신 청년 왕(브루스 호)을 당선시킨다. 그러나 슝과 왕은 초면이 아니었으니, 학창 시절 코피를 자주 흘려 괴롭힘 대상이었던 왕은 자기를 씩씩하게 도와주던 슝을 짝사랑해왔다. 슝의 아바타가 된 왕이 의회에 등원한 날 문제의 기업이 배출한 공해 물질이 배태한 바이러스는 환경에 무심한 정치인들을 피에 주린 괴물로 둔갑시킨다.
좀비물은 워낙 호러 하위 장르 중에서도 정치적 서브텍스트가 가장 강하지만, <겟 더 헬 아웃>은 아예 정치 행위의 장을 학살의 아수라장으로 쓴다. 관객과 스크린 사이 제4의 벽을 무시하는 과잉의 미학을 택한 왕아이판 감독은 주성치 코미디의 추억을 깨우는 캐릭터들을 팀으로 결성해 피투성이 슬랩스틱을 벌인다. <겟 더 헬 아웃>이 과연 현명하게 선택한 90분인지는 의견이 갈릴 법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장르에 반영된 사례라는 점은 흥미롭다. 요즘 나는 종종 궁금해진다. 코로나19의 현실은 언제 영화와 드라마 속에 진입할까? 영화에서는 아직 아무도 마스크를 끼고 데이트를 하거나 악당과 거리두기를 하며 추격하지 않는다. 나는 <겟 더 헬 아웃>이 질병 대책본부장을 악당으로 쓸 때 움찔했고, 백신 개발 이후의 정치경제적 이전투구를 상상하는 대목에서 귀를 쫑긋 세웠다.
9월 12일
실화에 기초한 호주영화 <펭귄 블룸>(Penguin Bloom)은 가족 단위 영화제 관객이 사랑할 법한 영화다. 배우 나오미 와츠는 <더 임파서블>에 이어 다시 동남아 휴양지에서 재앙을 겪는다. 유능한 간호사이자 스포츠우먼이었던 샘(나오미 와츠)은 휴양지에서 당한 추락사고로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 아이들은 사랑하던 활달한 엄마를 누군가가 훔쳐갔다고 느낀다. 남편은 최선을 다하지만 샘은 급한 일이 생기면 이제 아빠부터 부르는 아이들의 반응에 실망하고, 장애인 구역 주차 같은 일상적 변화에도 저항한다. 사실 <펭귄 블룸>에서 관심을 끄는 요소는 엄마의 사고에 책임감을 느끼는 조숙한 맏아들의 내면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곤경에 처한 인간이 동물과의 관계에 힘입어 재활하는 이야기이므로 이내 무리에서 떨어져나온 까치(의 일종) 한 마리가 등장해, 검은 깃과 흰 깃에 착안한 펭귄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아이들은 종일 집에 있는 엄마에게 부탁할 일이 생긴다. 모두가 알 듯 반려동물의 위력 중 하나는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인데 더욱이 펭귄은 강아지까지는 몰라도 고양이 못지않게 인간 친화적인 특별한 새로 판명된다.
나를 향한 도움의 손길이 전혀 도움이 안될 때 사람들은 타자를 돌보는 행위를 통해 돌파구를 찾기도 한다. 타자 중에서도 동물과 식물이 교착상태의 인간을 종종 가볍게 구원하는 까닭은, 우리가 불행과 고통을 계량하고 서사화하는 언어 자체가 철저히 인간의 기준에 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샘은 훗날 상체를 써서 경주하는 카약 챔피언이 된다고 영화는 전한다. “명랑한 사람은 암에 걸리면 명랑한 암환자가 되고, 우울한 사람은 복권에 당첨되어도 우울한 백만장자가 된다”라는 <비포 선셋>의 대사가 오늘도 바람에 스친다.
한 여자의 내적 여정이 영화 전체 서사를 짊어지고 있기는 코르넬 문드루초 감독의 첫 영어영화 <여성의 조각들>(Pieces of a Woman)도 마찬가지다. <화이트 갓>과 <주피터스 문>의 감독으로서는 의외로 삶의 세속적인 영역을 파고든 이 영화의 구심점은, 올해 들어 중량감이 급상승한 배우 바네사 커비. 기업 간부 마사(바네사 커비)와 건설 노동자 숀(샤이아 러버프)은 계급 차를 제외하면 첫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젊은 부부다. 마사의 어머니(엘런 버스틴)는 사위를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뒷자리 넓은 패밀리카를 선물하고 둘은 그에 대한 농담을 나누며 가정 출산을 준비한다.
그러나 조산사의 도움으로 진행된 출산은 무사히 이뤄지지 못한다. 아파트의 여러 방을 오가며 찍은이 시퀀스의 촬영과 연출은 관객을 질식 직전까지 끌고 간다. 후반부 가족 식사 시퀀스와 더불어 감독의 인장이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교각이 언제 무너지는지에 관한 건설 종사자 숀의 대사는 결혼에 대한 은유처럼 들린다. 문드루초는 가까스로 뜻과 취향에 맞는 삶을 꾸린 사람들이 암초를 만났을 때 상투(常套)적 파국에 휘말리지 않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자존심 강한 마사를 통해 바라본다. 마사는 비탄을 마치 잃어버린 아이의 마지막 조각인 양 놓지 않으려 하지만, 원한에 찬 피해자의 자리에 머물기에 마사는 너무 강한 인간이다.
사족. 오늘에서야 영화 공개 48시간 이내에 관람을 시작해 끊김없이 플레이하기만 하면, 종료 시점은 48시간 이후라도 무방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 홀로 방구석 영화제의 문제다. 유용한 정보가 유통되지 않는다. 예년이라면 어느 가게 쌀국수가 싸고 맛있다거나 하는 소문까지 주워 담고 있었을 텐데.
9월 13일
완성도가 뒷받침될 경우, 유명 배우의 감독 데뷔작은 영화제 입장에서 호재다. 스타들은 출연작보다 본인이 연출, 제작한 영화의 각종 미디어 행사에 훨씬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올해 토론토영화제에서 리자이나 킹 감독의 <마이애미의 하룻밤>(One Night in Miami), 할리 베리 감독의 <멍>(Bruised) 그리고 비고 모텐슨 감독의 <폴링>(Falling)이 상영된다. 시인이자 화가이고 인류학 연구자이기도 한 르네상스맨 모텐슨의 장편 영화 연출은 도리어 늦은 감마저 있다. 그러나 <폴링>이 관객에게 안기는 도전은 만만치 않다. 차별주의자 백인 남성에 대한 저항력이 약한 사람에게 <폴링>은 112분의 고행일 수 있다. 비고 모텐슨이 얼마 전 사별한 부모님과의 말년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폭력적인 가부장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고자 했던 게이 남성(비고 모텐슨)이 그 목적을 훌륭히 달성한 다음, 치매에 걸려도 편견만큼은 여전한 아버지를 자식된 책임으로 돌보는 이야기다. 로라 리니도 <러브 액츄얼리>의 배역과 매우 유사한 처지의 동생을 연기한다.
시나리오는 현재 부자의 살얼음 같은 갈등과 과거 아버지의 전횡을 두줄의 타임라인으로 삼아 오간다. 혐오와 차별로 중무장한 가부장이 아내와 아이의 인생에 끼친 위해는 폭력이라는 각진 단어로 뭉뚱그리기에는 너무도 교묘하다. 영화는 노쇠한 아버지의 여린 구석을 드러내 용서를 구하는 뻔한 길은 가지 않으나 영화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이 불편한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는것처럼 보인다. 아마 모텐슨에게 더 필요했던 것은 누구보다 잘 아는 소재와의 거리였는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은 항문외과 의사로 카메오 출연해 영화 외적 웃음을 주었다.
올해 치르지 못한 칸국제영화제에 선정됐던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썸머 85>도 토론토영화제에서 북미 최초 공개됐다. 유럽에서는 이미 개봉한 이 영화는 시작한 지 약 20분 만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팬덤을 재집결시키겠다는 예감을 일으킨다. 동성끼리의 사랑을 그리지만 커밍아웃보다 첫사랑의 정념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는 태도, 1980년대에 대한 강한 노스탤지어가 두 영화의 고리가 될 법하다. 다만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이 배경인 이 로맨스는 필름누아르 도입부에서 흔히 보는 ‘살인자의 고백’ 모드로 시작해, 프랑수아즈 사강이나 콜레트의 소설에서 맡아보았던 어지러운 여름 향기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취직과 진학 기로에 선 16살 소년 알렉시스(펠릭스 르페브르)는 혼자 배를 몰다 비바람에 휘말려 연상의 소년 다비드(벤자민 보아신)에게 구조된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게를 이어받았다는 다비드와 어머니(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는 흔쾌히 알렉시스를 둥지에 받아들이지만 모자에게는 뭔가 불안정한 점이 있다. 특히 다비드가 “내가 죽으면 내 무덤 위에서 춤춰 달라”고 알렉시스에게 부탁할 때 관객은 불길한 징조를 읽는다. 하지만 이어지는 6주의 완벽한 희열은 알렉시스를 위험한 고도까지 날아오르게 한다. <썸머 85>는 젊은 날 사랑이 품은 맹독성을 일깨우고 그 아름다운 시신을 어루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