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불암. 그는 현재 <한국인의 밥상>이란 프로그램에서 전국을 누비며 지역 대표 음식을 소개하는 진행자다. 그가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남긴 것은 그가 출연한 작품들 덕분일 것이다. <전원일기> <수사반장>. 그의 대표작들의 공통점은 장수 프로그램이었다는 점이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오랜 세월 동안 최불암이 연기하는 인물을 마주한다는 것은 그가 질리지 않고 편안하며 익숙한 얼굴을 지녔기 때문이다. 아마도 최불암은 자상한 아버지의 초상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생경한 얼굴들이 있다. MBC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에서 그는 왕년의 마도로스였던 박재천 역을 맡아 섹시한 중년의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그는 자신을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았던 9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최불암 시리즈’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으며 차후에 예능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서 이 시리즈를 각색한 콩트에도 출연한 바 있다.
영화도 TV도 사랑한 배우의 초상
지금까지 살펴본 최불암의 얼굴은 TV 속의 얼굴이었다. 영화 속에서 그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11월6일부터 11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 KMDb 온라인에서 상영되는 특별전 <최불암, 아버지의 얼굴>(주최 인천광역시, 주관 인천영상위원회·한국영상자료원)은 영화가 빚어낸 그의 얼굴을 발견할 기회가 될 것이다. 총 5편으로 구성된 특별전은 시기적으로 1970년대를 관통한다. 당시 30대였던 최불암은 젊음 대신 늙음을 표현해야만 했다. 돌이켜보면 그에게 처한 상황이 오히려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유리한 조건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한국 거장 감독들이 빚어낸 그의 얼굴을 살펴보자.
<파계>와 <영자의 전성시대> 속 최불암이 맡은 역할은 일종의 멘토다. 우선 <파계>(1974)는 김기영 감독의 작품으로 그의 색채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이 작품은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표현으로 그려낸 불교영화다. 영화는 고승 조실 스님(최불암)이 법통을 후계자에게 승계하는 과정을 그린다. 고승은 법통을 물려받을 유력한 후보자인 침해에게 비구니 묘향(임예진)을 소개해 인연을 맺게 한다. 일종의 테스트로서 침해는 결국 묘향과 사랑에 빠지며 고뇌한다. 영화 속 고승은 전쟁고아를 거두는 따뜻한 마음과 법통을 중시하는 고집스러운 면모를 지녔다. 그의 두 가지 얼굴이 동시에 드러나는 장면은 도심(정한헌)과의 선문답이다. 이외에도 <파계>는 꿈과 환영의 이미지 그리고 세련된 몽타주 기법을 통해서 김기영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영자의 전성시대>(1975)는 영자(염복순)와 창수(송재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시대적 맥락 속에서 그려낸다. 영화는 1970년대 도시 개발과 맞물려 가속화된 이촌향도 현상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성공을 위해 상경한 영자는 가정부로 일하며 창수를 만나 잠시 희망을 품었지만 상황은 그녀의 희망을 절망으로 바꿔버린다. 그렇게 영자는 매춘부가 되었고, 제대한 창수와 재회한다. 창수는 목욕탕에서 세신사로 일하며 영자를 돕는다. 이들의 관계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목욕탕 김씨(최불암)는 영자에게 창수와 헤어지라고 에둘러 말한다. 김씨는 아마도 영자를 향한 창수의 모습에서 자신의 무모했던 과거를 본 건지도 모른다. 지난날의 후회가 뒤섞여 눈물이 맺힌 채 영자를 다그치는 영화 속 그의 얼굴은 인상적이다. 김씨와 더불어 영자의 변화하는 얼굴, 이를 담아내는 감각적인 숏과 표현기법은 영화에서 주목할 포인트다.
<영자의 전성시대>가 이촌향도 속 도시의 삶을 비춘다면, <달려라 만석아>(1979)는 시골의 삶을 담아낸다. 영화는 자식을 보러 상경한 아버지(최불암)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아들(현석)은 공사판에서 힘들게 일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 가족에게 시골에 내려가 살자고 말한다. 손자 만석이(정용식)만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 시골에 내려간다. 만석이는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해바라기’란 모임을 결성하여 농촌 봉사에 힘쓴다. 만석이의 행동 변화엔 할아버지의 집념의 얼굴이 한몫했다. 할아버지는 옛것을 아끼고 지키는 것이 교육이라고 말한다. 그의 집념은 얼굴과 행동으로 드러나며 만석이를 감화시킨다. 영화는 도시보다 시골의 정취를 강조한다. 밤, 대추, 벼, 꽃, 매미 소리 등 자연의 것들을 클로즈업하여 영화는 도시 개발로 잊힌 고향의 가치를 복원하려 한다.
고향을 지키겠다는 할아버지의 집념 서린 얼굴은 <사람의 아들>(1980)의 남경호 경사(최불암)와 닮아 있다. 영화는 남경호 경사가 민요섭(하명중)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민요섭의 과거사를 훑는다. 민요섭은 실천신학의 추종자로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들의 품으로 가서 빈민들을 구제한다. 그 과정에서 조동팔(강태기)을 만나 뜻을 같이한다. 하지만 이 둘 사이도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민요섭의 행적을 좇는 남 경사의 모습은 성지순례와 같은 인상을 남긴다.
수사가 미궁으로 빠지고 있을 때 남 경사는 경찰서에서 민요섭의 교리에 감화된 듯한 말을 하며 수사 의지로 가득 찬 얼굴을 내비친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남 경사의 얼굴에서 민요섭이 비친다. 수사의 시작 역시 죽은 민요섭의 얼굴에 맺힌 웃음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영화는 앵글을 달리하여 인물을 담아냄으로써 이미지를 색다르게 구성한다. 또한 교회의 안과 밖의 이미지를 대조하는 몽타주를 통해 민요섭의 교리에 힘을 싣는 연출을 선보인다.
세월을 비껴가다
<사람의 아들>에서 최불암과 하명중이 맡은 역할은 <최후의 증인>(1980)에서 역전된다. 영화는 문창경찰서 오병호 형사(하명중)가 양조장 주인 양달수(이대근) 살인 사건을 맡으면서 시작한다. 이 사건의 출발점은 지리산이었다. 지리산에 숨어 있던 무장 공비들. 공비대장 손석진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외동딸 손지혜(정윤희)를 강만호에게 부탁하고 자신이 숨겨둔 보물 지도도 함께 건넨다. 강만호는 손지혜를 돌보지 않고 급기야 다른 공비들은 그녀를 강간한다. 그녀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되며 황바우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그를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강만호는 이후 양달수를 통해 자수를 감행하지만 다른 공비들의 반발로 상황이 안 좋게 전개된다. 그 결과 옥살이를 하게 된 황바우는 출소 후 자식을 낳은 손지혜와 같이 살기 시작한다. 이들은 지리산에 숨겨둔 보물을 찾기 위해 다시 양달수에게 도움을 청한다. 결국 이 셋이 찾은 보물이 파국을 이끄는 단초가 된다.
이 영화가 그리는 파국에서 황바우는 무모할 정도로 순박한 선의 얼굴을 지니고 있으며 간악한 양달수의 얼굴과 대비를 이룬다. <최후의 증인>은 2시간 반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대서사시를 펼친다. 영화는 과거의 증거들과 현재의 상황을 긴밀하게 몽타주하여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이에 따라 오 형사의 얼굴도 변화한다. 마침내 황바우를 만난 오 형사는 도덕적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5편의 영화는 인물보다 감독이 먼저 입에 오르는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 작품들 안에 자신만의 캐릭터를 구축해온 최불암과 그의 얼굴들이 있다. 그의 젊음은 노인 분장으로 가려졌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세월을 비껴간 셈이다. 노역을 통해 그는 자신만의 몸짓과 얼굴을 만들었고 결국 시간에 구속되지 않는 인물들을 빚어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