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내가 죽던 날'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시아 단편경선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던 박지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
2020-11-10
글 : 박정원 (영화평론가)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있다. 한명은 경찰 현수(김혜수)다. 그는 이혼 소송 중인 남편의 모함으로 추문에 시달렸으며, 업무 중 일으킨 사고로 징계위원회에 불려갈 예정이다. 다른 한명은 고등학생 세진(노정의)이다. 세진은 아버지가 연루된 범죄 사건의 증인이라는 명목하에 섬마을에 고립되어 있다.

어느 날, 세진이 유서 한 장을 남긴 채 절벽에서 사라지고, 이후 복직을 앞둔 현수가 윗선의 지시로 세진의 실종 사건을 담당하게 된다.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자살로 종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현수는 차근차근 세진의 삶의 궤적을 더듬어나가기 시작한다. 절벽 위 세진의 운동화를 시작으로 CCTV 영상과 유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세진의 사연에 접근해간다. 섬마을 주민들의 목격담을 조사하던 현수는 세진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순천댁(이정은)으로부터 세진에 관한 몇 가지 단서를 얻게 된다. 그렇게 조금씩 비밀을 풀어나가던 현수는 그 과정에서 자신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세진을 마주하며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내가 죽던 날>은 자신의 삶을 뒤흔드는 문제들을 추스르기에도 벅찬 경찰이 자신과 다른 듯 비슷한 처지에 있는 소녀의 실종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다. 실종된 세진을 뒤쫓는 수사 과정에 방점을 찍는 초반부에는 현수와 세진의 사연이 별개의 이야기처럼 전개되지만, 영화는 점차 두 사람의 아픔과 고통이 하나처럼 겹쳐지는 것에 주목한다. 자신을 감시하는 CCTV 카메라를 끔찍이도 싫어하던 세진의 영상 속 얼굴에서 현수는 거울 속 자신의 눈빛을 발견하고, 세진이 남기고 간 애절한 유서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던 현수의 절박함과 조응한다. 특히나 믿고 의지하던 이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상처가 현수와 세진을 잇는 강력한 연결고리가 된다. 현수는 세진의 새엄마 정미(문정희)나 세진을 담당했던 형사 형준(이상엽)과 얽힌 세진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공감하고, 슬퍼하고, 분노한다. 그 과정에서 현수는 지금껏 주변인들에게 표출하지 못했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게 현수는 세진과 애틋한 유대감을 형성해나간다.

현수와 세진이 지금 현재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다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순천댁은 앞서 크나큰 고통을 겪었던 인물이다. 과거 모종의 사건으로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은 마을 사람들과 교류를 단절한 채 조용히 지내는 인물로, 온갖 풍파를 겪은 뒤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는 비밀스러운 존재다. 또한 세진의 마지막을 목격하는 등 결정적 단서를 쥔 인물이기에 경찰 현수에게는 중요한 탐문 대상이기도 하다. 영화는 전개 과정에 따라 무게중심을 조금씩 이동하며 현수, 세진, 순천댁이라는 세 인물의 과거와 현재 사이를 긴박하게 오간다.

그 과정에서 현수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세진의 또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현수가 만난 순천댁과 세진이 겪은 순천댁이 다르듯, 현수가 들여다본 세진과 순천댁이 함께했던 세진 또한 다르다. 말하는 대신 삐뚤빼뚤한 글씨를 조심스레 써내려가는 순천댁은 세진과의 관계에서 현란한 말로 자신을 변호하기에 급급했던 다른 이들과 대조되며 감응을 일으킨다.

<내가 죽던 날>은 단편 <여고생이다>(2008)로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시아 단편경선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던 박지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수사 과정을 좇아가는 초·중반부와 감정이 폭발하는 후반부의 전반적인 강약 조절과 짜임새가 다소 아쉽게 느껴지지만, 세 인물의 고통과 아픔을 아우르며 생과 의지, 운명과 구원을 살펴보는 감독 나름의 시선은 여운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중심을 안정적으로 잡아주는 김혜수, 한번의 눈빛으로 열 마디 말을 대신하는 이정은, 감정의 극단을 오가는 세진 역을 맡아 열연한 신예 노정의까지 각자의 역할을 훌륭히 소화한 세 배우의 역량이 돋보인다. 그외에도 김선영, 이상엽, 문정희 등 세 주인공과 얽힌 인물들을 알맞게 연기해 영화를 보다 밀도 있게 만든 배우들도 눈길을 끈다.

CHECK POINT

운명 같은 영화

배우 김혜수는 <내가 죽던 날>을 ‘운명 같은 영화’라고 일컬었다. 시나리오의 제목만으로도 유독 눈에 들어와 자신이 꼭 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도 현수처럼 좌절감과 상처로 힘겨워하며 위로가 필요했던 시기에 영화를 만들어나가며 따뜻한 연대감 속에서 위안을 얻었다고 전했다.

무언의 목격자

현수의 현재와 세진의 과거를 오가며 실종 사건을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 순천댁은 말 그대로 ‘무언의 목격자’다. 배우 이정은은 미스터리한 목격자인 동시에 현수, 세진과 마찬가지로 삶의 아픔을 간직한 인물인 순천댁을 깊이 있게 연기하며 영화의 몰입도를 한층 높였다.

특별한 유대감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묻는 질문에 김혜수는 현수가 순천댁과 마주하는 한 장면을 언급했다. 말하지 않아도 공감을 느끼는 극중 두 인물처럼, 두 배우 또한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며 영화에 녹아들었다. 함께 눈물을 흘리며 소통한 두 배우의 열연은 영화를 보는 이에게도 특별한 감정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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