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없는 남자> The Man Without a Past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 제작연도 2002년 / 상영시간 97분
도시 강변의 버려진 땅에 흙을 일궈 감자 몇알을 심는 남자가 있다. 남자는 불의의 사고로 기억을 잃고 이름과 살아온 과거까지 모두 잃었다. 시간이 흘러 감자가 꽃을 피우고, 그사이 그도 임시 거처와 직업을 마련한다. 또 이웃을 얻고 어느 여인의 사랑도 얻는다. 그는 수확한 감자 여덟개 중 세개는 겨울을 위해 비축하고 두개는 씨감자로 사용하며 나머지 세개는 연인과 먹을 예정이다. 이웃이 찾아와 하나만 달라고 하자, 남는 게 없다 하면서도 반쪽을 잘라준다.
이 소박한 성취, 소박한 계획, 소박한 나눔이 어쩌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담담하지만 쓸쓸한 시선으로, 희망보다는 절망의 감정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다루어온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영화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 그 어느 영화에서보다 적극적으로 연대와 희망을 이야기한다.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기
이른 새벽, 한 남자가 헬싱키역에 도착한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던 그는 불량배들에게 강도를 당해 정신을 잃는다. 피투성이가 된 채 병원에 실려온 남자는 이내 사망선고를 받지만,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고 병원을 빠져나온다. 또다시 길가에 쓰러진 그를 빈민촌의 한 가족이 발견하고 보살펴준다. 남자는 건강을 회복하지만 폭행의 후유증으로 기억을 모두 잃어 절망에 빠진다. 그러나 빈민촌 사람들의 도움과 구세군 여직원 이르마의 사랑으로 조금씩 삶을 회복해간다. 그러던 중, 실종 전단지를 본 아내가 연락해와 다시 만나게 되고 자신의 이름과 출신에 대해 전해 듣는다. 하지만 아내와 이미 이혼한 사이라는 걸 알게 되자 미련 없이 헬싱키로 돌아와 이르마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오랫동안 노동자와 하층민의 이야기를 다루어온 카우리스마키는 이 영화에서 특히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 주목한다. 주인공이 헬싱키에서 새롭게 관계를 맺는 이들은 대부분 삶의 바닥까지 내몰린 극빈층들이다. 주 2회 탄광 경비 일을 하며 빈민촌 컨테이너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이웃이 그렇고, 고철 더미 아래나 커다란 쓰레기통 안에서 기거하는 알코올중독자와 노숙자들이 그렇다. 또 본래 금속노동자였지만 한순간에 과거를 잃고 무일푼으로 거리에 나앉은 주인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금요일 저녁 이들이 특별히 외식하러 가는 곳은 고작해야 수프 한 접시와 빵 한 덩어리가 나오는 구세군 자선 식당이다. 이 영화는 <어둠은 걷히고>(1996), <황혼의 빛>(2006)과 함께 ‘루저 3부작’ 또는 ‘빈민 3부작’으로 분류되곤 하는데, 그 배경에는 당시 주요 교역국이었던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로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던 핀란드의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이들의 빈곤에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강조한다. 일시적인 경제 위기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빈부 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체제와 그 체제에 편승해 약자를 억누르고 착취하는 사람들에 있다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극빈층으로 전락한 주인공이 새롭게 맞닥뜨리는 사회는 냉혹한 이기주의와 비인간적인 관료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구실을 만들어 가난한 이들의 돈을 뜯어내는 빈민촌 관리인, 무관심 내지 겁박으로 응대하는 직업소개소, 법도 잘 모른 채 형만 집행하려는 경찰, 노동자들의 실직에는 아랑곳없다는 듯 중소기업의 도산을 유도해 이익을 챙기는 은행 등은 한 사회에서 경제적 약자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잘 보여준다.
절제의 미학과 풍부한 시정(詩情) 사이
그런데 이 삭막한 현실 이야기는 단순하면서도 서정적인 감독의 독특한 스타일에 힘입어 묘한 울림과 매력을 지닌 이야기로 변모한다. 미니멀리즘 또는 미학적 금욕주의라고도 불리는 그의 스타일은 배우에게 최소한의 동작과 표정 연기만을 허용하며, 절제된 카메라 움직임과 간소한 세트를 고수한다. 또 영화에서는 대화보다 침묵이 더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대사 또한 간결하며 시적이다. 이같은 형식들은 신체언어가 중심이 되었던 초기 무성영화들이나 로베르 브레송의 중성적 영화언어, 오즈 야스지로의 미학적 단순화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기에 카우리스마키는 기발한 블랙유머와 위트를 더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완성한다.
이러한 영화 스타일에 더욱 유니크한 매력을 부여하는 것은 작품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타블로’들이다. 타블로란 ‘그림’을 뜻하는 프랑스어 타블로(tableau)에서 유래한 영화 용어로,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인물들이 잠깐 동안 말을 멈춘 채 움직이지 않는 영상을 가리킨다. 두 남녀주인공이 컨테이너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말없이 교감하는 장면이나 구세군 악단 단원들이 일렬로 앉아 주크박스를 바라보는 장면 등이 그에 해당한다.
타블로는 운동성과 시간성이라는 영화의 본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으로, 짧은 시간이지만 영화 안에 비-영화적인 낯선 상황을 만들면서 오히려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그림처럼 정지되어 있는 화면을 통해 감정을 응축시키고 정서를 극대화시켜, 관객으로부터 더 깊은 감응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관객은 서로를 바라보며 멈춰 있는 두 남녀의 모습에서 설렘과 두려움의 감정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정지되어 있는 구세군 악단의 모습에서 순수한 매혹의 감정을 강하게 전달받을 수 있다.
한편 영화의 전체 스타일과 대조적으로 색채와 음악의 사용은 다채롭고 풍요롭다. 노란색 주크박스, 빨간색 소파, 주황색 셔츠, 녹색 컨테이너, 파란색 자동차 등 살짝 톤 다운된 원색의 이미지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에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하기도 하고, 무미건조한 삶의 단편들에 생기와 온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또 그야말로 다종다양한 음악이 영화에 삽입되어 있는데, 각각의 음악은 극의 상황에 맞게 적절한 정서를 만들어낸다.
가령 핀란드의 클래식 작곡가 레비 마데토야의 심포니는 영화 초반과 후반에서 의미심장한 극적 전환을 암시하고, 수시로 흘러나오는 로큰롤 멜로디는 노동자와 서민의 피로를 달래준다. 구세군 원장이 부르는 구슬픈 피니시 탱고 선율은 2차 세계대전 후 핀란드가 겪었던 빈한한 시절을 떠올리게 하며, 영화 마지막에 기차에서 들리는 엔카는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감독의 애틋한 오마주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어떤 과거를 살았던 삶을 계속 이어나가야 하는 도시 빈민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카우리스마키는 비정한 현대사회가 점점 더 삶의 테두리 밖으로 몰아내는 이들에게 다가가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존 방식에 대해 함께 모색한다. 켄 로치처럼 소리 높여 주장하지도 않고, 다르덴 형제처럼 냉정하게 현실을 도려내 보여주지도 않지만, 대신 소박한 시정과 유머로 그들의 각박한 삶을 위로해준다. 그리고 날마다 돌아오는 일상의 소중함과 감자 몇알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일깨워준다. 이토록 청량하면서도 다정한 시선, 담백하면서도 진정성 넘치는 시선을 만나기란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쉽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