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스페셜①] 서울독립영화제 2020 추천작 10편을 소개합니다> 에서 이어집니다.
서울독립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이 공동주최하는 ‘독립영화 아카이브전’이 올해로 3회를 맞이했다. ‘2020 독립영화 아카이브전’은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기념해 1980년대 사회 저항을 내포하고 있는 초기 독립영화 중, 계급 노동자가 등장하는 세 작품을 상영한다. <87에서 89로 전진하는 노동자>(1989)는 영화집단 장산곶매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끓어오른 현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며 <노란 깃발>(1987)은 노동자가 열악한 환경을 자각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공장의 불빛>(1987)은 독일 ‘아스날-영화빛비디오아트연구소’에 보관된 필름을 복원해 상영한다.
한편 올해 신설된 ‘뉴-쇼츠’ 섹션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영화 참여·제작이 중단된 영화인들이,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비 지원으로 완성한 10분 미만의 단편들을 소개한다. 팀당 3명씩 1천명이 넘는 영화인들이 참여한 300여편의 작품 중,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유지> <내일은>을 비롯한 15편의 영화를 선정해 상영한다.
셀프-포트레이트 2020
이동우 / 2020년 / 168분 / 본선 장편경쟁
<노후 대책 없다>(2016)로 서울독립영화제 대상과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감독상을 받은 이동우 감독의 두 번째 작품. 감독은 어느날 우연히 알게 된 노숙자 이상열로부터 ‘이 사람 느낌이 딱 내 미래’같다는 느낌을 받고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하루 종일 취해 있으며 자주 사고를 쳐 유치장을 다녀오기 일쑤인 상열에겐 특별한 이력이 있는데, 그건 바로 그가 20년 전 만든 <자화상 2000>이라는 단편 영화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은 적이 있는 영화감독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직 영화를 잊지 않은 사람처럼 장 뤽 고다르와 오즈 야스지로를 언급하며 다음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말을 하지만, 그의 음주와 기행은 멈출 줄을 모른다.
<셀프-포트레이트 2020>은 이상열을 구원하려는 영화일까, 고발하려는 영화일까. 아니면 영화의 무용함에 대해 말하는 ‘셀프-디스’ 영화일까. ‘구원의 의미를 일깨워준 로베르 베르송께 바친다’라는 자막으로 시작되는 <자화상 2000>과 이 영화로부터 시작되는 또 한편의 영화. 감독 이상열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이동우 감독의 집요한 카메라는, 시작이 같았으므로 어쩌면 엔딩 역시 같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학교 가는 길
김정인 / 2020년 / 99분 / 본선 장편경쟁
2020년 3월,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공립특수학교 서진학교가 개교했다. 2013년 11월 서울시교육청이 설립을 예고한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서진학교가 문을 열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 특수학교가 학생 수에 비해 부족하기 때문에 장애학생들은 원거리 통학을 하거나 학습권 피해를 입는 처지다. 이같은 교육 문제로 어려움을 공유하던 강서 지역 장애학생 부모들은 2013년 부모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특수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과 거세게 부딪쳤고, 지역구 국회의원과 교육감 등이 복잡하게 엮이며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장애학생 부모들은 교육청 점거농성을 벌이고 토론회에 참여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학교 설립에 관계된 여러 집단이 갈등을 빚었고, 고성과 눈물이 오갔다. 지난 2017년 9월 주민설명회에서 무릎을 꿇고 학교 설립을 호소하던 장애학생 부모들의 모습이 SNS를 타고 퍼져나가며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등교하는 장애학생들의 모습과 함께 시작하는 김정인 감독의 <학교 가는 길>은 특수학교 설립 반대 여론에 맞선 장애학생 부모들의 투쟁의 시간을 담아내는 다큐멘터리다.
선데이리그
이성일 / 2020년 / 81분 / 페스티벌 초이스
한때는 ‘검은 독수리’라는 별명을 지닌 축구 유망주였으나 부상으로 좌절한 뒤 축구 교실에서 계약직 코치로 일하고 있는 준일의 현실은 암울하다. 아내와는 이혼 직전이고, 사람들과 사사건건 부딪치며, 직장에선 해고될 위기에 처한다. 사랑하는 아들과 이따금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엔 낙이 없던 준일은 정규직 자리를 건 마지막 기회를 얻게 된다. 성인 아마추어 축구반 코치를 맡아 사회인 풋살 대회 본선에 진출시키라는 미션이 주어진 것. 세상 풍파에 지친 준일은 오합지졸인 선수들과 특별한 훈련을 시작한다.
이성일 감독의 <선데이리그>는 짧았던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초라한 삶을 살고 있는 준일이 아마추어 축구반 코치를 맡으며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의지를 되찾는 과정을 그린 스포츠영화다.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점은 아쉬우나, 여러 사연을 지닌 개성 있는 인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내며 유머와 공감을 이끌어낸다.
멧돼지 잡기
이장원 / 2020년 / 61분 / 페스티벌 초이스 장편
‘모험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도발(?)적인 문구가 적힌 <멧돼지 잡기>의 포스터가 스크린을 향해 날아온다. 오프닝부터 B급영화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영화는 관객을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 시골 마을로 안내한다. 학교를 땡땡이친 장원과 친구들은 멧돼지를 사냥하기 위한 덫을 설치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동네 연쇄살인마의 살인 현장을 목격하게 된 그들은 그때부터 가면을 쓴 살인마에게 쫓기게 된다.
그 어떤 영화보다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것이 확실한 <멧돼지 잡기>에서 제대로 갖춰진 것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딱히 없는 것도 없다. 부족한 모든 것들이 충분히 메워지는 이유는 자신이 창작한 세계를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완성시키고야 말겠다는 감독과 친구들의 의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침내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는 순간, 박수를 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김철민 / 2020년 / 93분 / 페스티벌 초이스
2002년 금강산에서 재일 조선인을 처음 만난 김철민 감독은 북한은 여러 번 갔지만 한국은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재일 조선인들이 마음에 남았고, 그들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졌다. 이후 그는 꾸준히 일본에 방문해 재일 조선인들과의 만남을 지속하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리고 지금껏 미처 알지 못했던 재일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해방 이후 일본에 남게 된 이들, 차별받으면서도 일본에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이들, 식민과 분단과 냉전의 역사 속에서 혼란을 겪고 깊은 상처를 입었던 이들, 그럼에도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저마다의 희망을 품고 있는 이들. <나는 조선사람입니다>는 김철민 감독이 재일 조선인 1세부터 4세까지의 개인들을 만나며 이들의 역사와 삶을 들여다본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