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수상작 비평 전문] 손시내 평론가의 <에듀케이션>
2020-11-24
마주 선 투 쇼트 : 관계와 공존에 대하여

제8회를 맞은 무주산골영화제는 지난해 상영작에 대한 비평적 지지를 확대하기 위해 처음으로 영화평론가상을 신설했다. 올해 영화평론가상은 김덕중 감독의 <에듀케이션>이 수상했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김보년, 김소희, 손시내 평론가는 영화제 이후 수상작을 포함해 오민욱 감독의 <해협>과 오정석 감독의 <여름날>에 대한 비평을 작성했다. <씨네21>은 젊은 평론가들이 한국 독립영화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펼치길 바라며 무주산골영화제가 보내온 평문을 공개한다.

김덕중 감독의 <에듀케이션>

<에듀케이션>을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는 마주 서 있는 두 사람을 그들의 옆모습이 나오도록 찍은 투 쇼트이다. 영화제 홈페이지나 포털 사이트에서 이 영화를 검색했을 때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스틸 컷에도 그러한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 해당 스틸 컷에서 영화의 두 주인공인 성희(문혜인)와 현목(김준형)은 어질러진 집 안에서 마주 서 있고 카메라는 그들의 전신이 드러나도록 멀찍이서 두 사람을 찍고 있다. <에듀케이션>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이러한 구도는 물론 그 자체로 참신하거나 특별한 것은 아니다. 둘 이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가 단 한 번도 투 쇼트로 인물을 담지 않는다면 그 경우를 오히려 예외적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듀케이션>이라는 영화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마주 선 투 쇼트’란 꽤 중요한 요소로 느껴지는데, 이 영화가 그처럼 마주 서 있는 두 인물 사이의 불균형, 관계의 요원해 보이는 지속과 쇄신 가능성,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대화의 공간이 구축되지 못한다는 문제 등을 두루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두 인물이 마주 서 있는 투 쇼트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알려주는가. <에듀케이션>에서는 대개 그러한 쇼트에 뒤이어 각 인물의 상태나 시선을 설명하는 별도의 쇼트가 따라붙지 않으므로, 관객인 우리는 앞뒤 상황이나 대사를 통해 제시되는 맥락을 그저 알 수 있을 뿐 인물의 입장을 주관적으로 감각하기는 어렵다. 또한 여기서 대화는 종종 마구잡이로 어긋나고, 인물들은 대화를 제대로 끝맺지 않은 채 프레임으로부터 이탈하기 일쑤다. <에듀케이션>의 투 쇼트는 대화나 관계의 진전으로 나아가기 전에 미리 제시되는 상황 쇼트가 아니라 그 자체로 아슬아슬하게 지속되다 끝나버리고 마는 온전하고도 불안한 쇼트다. 여기서 우리는 인물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힘들이 방향을 잃고 비틀거리다 프레임 안에서 부딪쳐 만들어내는 기이하고 난폭한 기운을 본다. 혼자서는 감내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타인과 함께하기도 곤란한 삶의 시간이 여기에 고여있다.

영화의 시작부터 곧바로 제시되는 성희의 상황은 이렇다. 성희는 사회복지학과에 재학 중이며 졸업을 앞두고 있다. 졸업을 위해서는 실습 시간을 채워야 하며, 스페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 위해 돈도 모아야 하므로 그는 지금 활동보조 일을 구해야 한다. 장애인 야학(실제로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촬영되었다)에서 담당자와 나누는 대화로 미루어보건대, 성희는 바로 직전의 실습 현장에서 허리를 다쳐 일을 그만두게 되었으며 병원비를 지원받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이미 학자금 대출에 월세를 내기도 빠듯한데, 예정에 없던 병원비 때문에라도 돈 한 푼이 급한 것이다. 산재 처리가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대신 몸을 쓰지 않고 편히 할 수 있는 활동보조 일자리를 찾아달라는 게 성희의 요지다. 그는 딱히 상냥하지도, 친절하지도 않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이러하니 이 정도는 요구할 수 있다고 여기는 한편, 출국 준비를 위해 돈을 빌리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스페인으로 떠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짧게 스쳐 지나가는 대사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지금의 성희에게 산다는 건 타인에게 기꺼이 신세를 지고 그것을 다시 돌려주는 지속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맺는 것과는 거리가 먼 행위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게 성희가 찾아가게 되는 집에 현목이 있다. 현목의 엄마(송영숙)는 거동이 어렵고 의사 표현을 하기 힘든 중증 장애인이다. 휠체어에 앉혀 햇빛을 보게 하고 대소변을 치우고 식사를 챙기는 것 외에 보조할 만한 활동이 없으니, 성희가 원하던 일자리에 얼추 부합하는 셈이다. 현목은 그런 엄마와 단둘이 사는 고등학생이다. 성희와 현목의 만남은 처음부터 삐걱댄다. 굳게 닫힌 현관문 앞에서 성희는 현목에게 전화를 걸지만, 현목은 전화는 받지 않고 벌컥 문을 열어 성희를 놀라게 한다. 그러고는 웅얼거리며 집안을 이리저리 오가더니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현목은 알맞게 대답하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 누군가와 한 공간에 있을 때 화들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 위태로운 사람처럼 보인다. 이처럼 얼마간의 당혹감을 안기는 둘의 첫 만남은 잠시 뒤 더 당혹스러운 대화로 이어진다. 귀가한 현목이 집안을 둘러보더니 성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왜 이렇게 더러워요? 청소 안 하셨어요?” 성희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대답한다. “활동보조가 가사도우미 하는 건 아니거든요.”

영화를 연출한 김덕중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그와 같은 상황에 대해 실제로 활동보조 일을 했던 자신의 경험을 투영한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장애인 이용자와 활동보조인이 단둘이 집에 있을 때, 매뉴얼 상 원칙은 이용자가 요청하지 않으면 먼저 나서서 도움을 주지 않는 거다. 무례할 수 있으니까. (...) 반면에 이용자의 요구가 엄청 많을 때도 있다. 반찬을 해달라거나 청소를 해달라거나. 그 요구를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의 선택이 전부 활동보조인 개인의 의지에 맡겨진다. 일의 경계가 모호하다 보니 서로 감정이 상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공생 전쟁 - BIFF 2019 <에듀케이션> 김덕중’, REVERSE, 2019.10.08.) 말하자면 활동보조 역시 사람 사이의 다른 많은 일들과 마찬가지로 입장의 충돌이 발생하고, 따라서 설득과 대화와 조정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 일인 셈이다. 그 입장의 차이는 때로 좁혀지기도 하고 때로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기도 할 것이다.

물론 이때 우리는 감독의 바로 다음 말처럼 “모든 걸 장애인 이용자와 활동보조인 둘 사이에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며, 돌봄의 공적인 성격과 그것이 사회적으로 제대로 인지되지 않는 문제, 현장에서 드러나는 제도의 빈틈과 같은 것들을 근심할 수도 있다. 실상 돌봄이란 휠체어 사용을 돕고 식사를 보조하며 대소변을 치우는 개별적인 일을 포괄하는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활동이자 공공의 일로서 사유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그와 같은 돌봄의 활동들이 분절되며 자율적이고 개인적인 각각의 실천에 무책임하게 내맡겨지기 십상이다. 이런 상황에선 개인의 행동에 관한 명확한 기준도 경계도 찾을 수 없고, 행동의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건 오직 연약한 개인들의 몫이 된다. 쓰레기와 잡동사니가 여기저기 쌓여있어 완전히 방치된 것처럼 보이는 현목의 집은 한편으로 바로 그러한 상황을 표상하는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좀 더 중요한 건 그와 같은 사회적 구조에 대한 탐구와 문제 제기보다는 그 상황이 촉발한 구체적인 사태다. 성희와 현목은 지금 불편하고 어색하게 하나의 화면 안에 담긴 채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다.

여기서 이들은 마치 대화의 능력이나 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건 말의 내용뿐만 아니라 영화의 형식 때문이기도 하다. 성희가 바쁘다는 핑계로 자리를 뜨려 하고, 현목이 다짜고짜 도대체 하루 종일 뭘 했느냐고 따져 물을 때, 영화는 180도 가상선을 기반으로 하는 쇼트의 나뉨 없이 줄곧 풀 쇼트로만 두 사람을 담기 때문에 형식적인 측면에서나 내용적인 측면에서나 둘의 대화에는 별다른 진행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후로도 성희의 방문은 계속되지만, 아무것도 축적되지 않는 듯한 관계는 계속해서 원점으로 돌아가길 반복하는 것만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관계는 소멸하지 않는다. 말 거는 방법도, 대화를 끝내는 방법도 몰라서 “이렇게 하고 얼마 받으세요? 그거 국민 세금으로 주는 거죠?”, “이렇게 누가 못해.”처럼 흔해 빠진 말, “야, 너 뭐야. 내가 우스워? 어디서 어른한테!” 같이 위압적인 말을 내뱉은 뒤 각자 문을 닫고 사라져버리길 거듭하면서도, 두 사람은 그다음에 다시금 한 프레임 안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다. 그러고는 서로 화를 내보기도 하고, 짐짓 타이르는 투로 “너 일부러 그랬구나?” 하면, 잘못을 뉘우치듯이 “다음부턴 정리정돈 잘할게요.” 하며 그 위태로워 보이는 장면 사이사이에 무언가 기묘한 기운을 잠깐씩 불어넣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밀고 당기기, 그러니까 관계의 진전을 위한 힘겨루기 같은 것은 아니다. 서로를 향한 적대가 끝내 감정의 길을 터주는 일도, 삐걱대던 관계의 균형이 마침내 맞춰지는 일도 여기선 일어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성희는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서, “숨 좀 쉬고 싶어서” 한국을 떠나려는 사람이지 않은가. 여기엔 종종 무기력한 기운이 감돈다. 그런데 앞서 기묘한 기운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처럼, <에듀케이션>에서는 그렇게 좀처럼 그다음으로 이어지거나 연결되지 않고 일시적으로, 간신히, 그리고 간간이 성립되는 시간에 영화적인 감흥이 고인다.

동시대 청(소)년의 빈곤한 삶이라는 현실적인 소재와 배경에서 출발하지만, 위기와 해결의 도식을 따르거나 동시대 풍경의 세밀한 소묘 혹은 문제적 상황에 대한 안정적인 설명이 되길 거부하는 이 영화는, 대신 그처럼 잠깐 동안 지속되는 시간을 바라보는 데 집중한다. 그 시간은 둘 사이의 거리가 드러나는 풀 쇼트, 곧 도망치듯 빠져나갈지언정 당장은 타인을 마주 보고 서 있는 상황을 버티는 배우들의 불균질한 힘으로 지탱된다. 이것이 무기력이 흘러넘치고 개인의 미래는 잘 보이지 않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경계를 넘어 타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아야 하는 시대에 걸맞은 영화적 형식인 것일까. 섣불리 단정할 순 없겠지만, 이런 점은 말해볼 수 있겠다. 인물들이 한 화면에 담기는 이와 같은 형식은 한편으로 ‘함께 있음’의 양식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복합적이고 잠정적이다. 이 함께 있음은 어떠한 방법을 찾아낸다면 계속해서 이어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바스러지거나 깨어질 수도 있다.

두 사람의 지속되는 만남, 그러니까 이 영화적 세계의 작동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꼽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당연히도 현목 어머니의 존재다. 그는 스스로 행동할 수 없고 그저 가만히 누워있거나 앉아있기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숨을 쉬며 살아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성희가 현목의 집에서 활동보조 일을 할 수 있고, 현목이 성희에게 미성숙한 방식으로 말을 걸 수 있는 것이다. 이와 연관되는 다른 하나는 성희에 대한 현목의 호기심과 관심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덕중 감독이 “‘성희’는 일로서만 대하고 그치려고 하고 있는데, ‘현목’은 일로만 찾아오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본인에게 관심을 기울여 달라는 요청을 하는 거죠. (...) ‘현목’은 청소년이기 때문에 관계에 있어서 이성적인 것, 그러니까 사귄다, 아니다라고 밖에 모르는 거죠. 성숙한 친밀관계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 관계가 이성애적인 요청으로 비틀어지는 상황이 발생해서 결국 갈등을 유발하는 거고요.”(‘관계를 위해 한 발짝 내딛는 방법’ - <에듀케이션> 김덕중 감독, 서울독립영화제 네이버 블로그, 2019.12.04.)라고 적절히 표현한 바 있다. 그리고 영화가 흔들리는 순간들 또한 이 두 가지 요소와 관련이 있다.

다시 영화의 초반부, 현목의 태도에 화가 난 성희는 욕설과 함께 안 하겠다는 외마디 말을 내뱉고 현목의 집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그리고는 전철역 승강장에 앉아있는데, 현목이 돌연 다가와 사과하며 엄마가 누워있는 집으로 가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는 자신은 아르바이트 출근을 해야 한다며 출발하는 전철에 냉큼 올라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역에 남겨진 성희는 다시 현목의 집으로 돌아간다. 딱히 감정적인 유대로도, 사회적 연대로도 이어져 있지 않은 이 관계를 연장하는 건 이처럼 현목이 내비치는 은근하고도 직접적인 요구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일말의 책임감, 경제적인 필요로 인해 성희는 그 요구에 응하지만, 그 응답이 마지못해 함께하는 것 이상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성희와 현목, 현목 어머니 세 사람은 집에서, 혹은 인근 야외에서 잠시나마 같이 시간을 보낸다. 어머니는 가만히 앉아있거나 누워있고, 성희는 스페인어 공부를 하며, 현목은 방을 쓸고 닦거나 머리를 쥐어뜯으며 공무원 수험서를 들여다본다. 서로가 불편하지 않은 적절한 거리와 상태를 찾은 것만 같은 순간들은, 그러나 현목의 시선으로 인해 종종 위기에 처한다.

현목이 성희에게 공무원 시험공부를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난 뒤, 두 사람이 공부할 책을 챙겨 들고서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인근으로 나간 어느 날이다. 박스를 가지고 임시로 만든 책상을 평상 가운데 놓고서 잠시 성희의 지도가 이루어지고 나면, 현목은 박스 책상을 가지고 뒤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제 두 사람은 한 프레임에 담기지 못할 만큼 떨어져 있고, 현목은 공부에 집중하는 척하더니 이내 성희가 있는 쪽을 힐끔거리며, 카메라는 그런 현목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여기서 현목의 훔쳐보는 시선은 줄곧 나뉘지 않던 쇼트를 쪼개게 하는 동력이 된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시선의 작동이란 투 쇼트라는 잠정적인 상태를 깨고 상대방의 모습을 주관적인 나의 시선 안에 포섭하려는 시도와 맞닿아있지 않은가. 현목의 ‘이성애적인 요청’은 이처럼 시선을 던지는 관습적인 제스쳐를 통해 영화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영화가 이 시선의 방향, 각도, 목적지 따위를 정확히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평상에서 뒤쪽으로 멀어져간 현목의 정면 쇼트 다음에 이어 붙은 성희의 모습은 현목의 시점 쇼트라고는 할 수 없는 방향에서 찍혀있다. 혹은 현목의 집에서 식탁에 앉아 공부하던 성희가 계속되는 현목의 시선을 느끼고 “야.”, “야!”하며 주의를 줄 때, 이미 현목이 방 안으로 들어가 있어 그의 모습이 화면엔 보이지 않는 장면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이 영화에서 시선을 던지는 행위와 그 시선의 대상이 정확히 연결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영화적 형식에 대한 메타적인 언급이라기보다는 성희가 대화도 상호작용도 내켜 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점과 더 가까이 관련된 선택처럼 보인다. 현목은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며, 성희는 어떤 형태로든 응답을 원치 않는다. 평상에서 깜빡 잠들었던 성희는 곧 일어나 자신의 발치에서 어설프게 담배를 피우며 서성대는 현목을 발견한다. 이때 카메라는 다시 멀찍이서 두 인물을 투 쇼트로 찍고 있다. “개새끼! 너 뭐 보고 있었어!”라는 추궁에 “양말에 구멍 나서 보고 있었죠.”라는 변명이 오가는, 불안과 불편이 드리워진 장면이다. 현목을 노려보는 성희는 그의 일방적인 시선을 애써 밀어내며 위태롭기 그지없는 투 쇼트의 상태를 버티려 노력한다. 찰나의 순간이나마 잠정적인 채로 존재했던 ‘함께 있음’의 상태는 흔들리고 깨어진다. 그 상태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이후 성희는 현목에게 불쾌를 드러내고, 현목을 방 안에 들여보내고, 현목에게 등을 돌리고 서서 눈을 맞추지 않는 일련의 행동을 취함으로써 현목의 시선을 무시하고 회피한다. 시선의 교환도 대화의 구축도 실패한 자리엔 제대로 된 싸움조차 들어설 수 없음을 확인하려는 듯, 영화는 세 사람의 마지막 나들이로 향해간다.

세 사람이 나무와 호수가 어우러진 공원에서 저녁 한때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현목은 홀짝홀짝 마시던 맥주 때문에 취해있고 취한 채로 휠체어를 밀고 있다. 그 때문에 휠체어는 비틀거리며 종종 차도 쪽으로 미끄러지고, 성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휠체어를 잡아준다. 이 장면은 둘 사이엔 언제나 현목의 어머니가 있었으며, 그의 안전이 현목과 성희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일깨운다. 어둠 속에서 집에 도착한 현목이 엄마를 업고 계단을 오르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이 매우 위험한 방식으로 환기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현목은 업고 있던 엄마를 계단에서 떨어뜨린다. 바로 뒤에 서 있던 성희는 어머니의 코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확인하고 구급차를 부르지만, 현목은 돈 걱정을 하며 왜 갑자기 착한 척을 하느냐고, 그거 진짜 모습 아니지 않냐고 성희를 힐난할 뿐이다. 영화를 지속시키는 조건이자, 그저 거기에 늘 있던 존재이며, 책임의 대상이기도 한 현목의 어머니는 이 딱하고 무기력한 실패의 자리에서 피 흘리며 쓰러져있다. 현목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는 성희는 다친 어머니를 두고 그곳을 그냥 빠져나와 버린다. 성희는 자신의 집에 도착해 펑펑 울지만, 현목의 집에 다시 돌아가지는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성희의 다른 일상들이 있다. 어느 한 장면에서 그는 무작정 옛 친구들이 일하는 가게 앞에 찾아가 기다린 다음,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른 척하며 어색하게 인사한다. 친구들과 성희가 술을 마시며 주고받는 대화에서는 오래도록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 끝내 성공하지 못했던 성희의 과거가 새어 나온다. 피로하고 희망 없는 세계를 어떻게든 돌파해보려 하기보다는 얼마간 체념하고 무표정으로 버티며 관계의 책임으로부터 이탈한다는 점에서, 성희는 최근 한국 독립영화가 그려온 청년 세대 초상의 계열 안에 놓인 인물이다. 그런데 현목 어머니의 사고가 지나가고 난 뒤 후반부의 한 장면에서 성희는 어떤 한순간을 마주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러한 인물 유형들 안에서 성희를 조금은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 순간은 성희가 장애인 야학에서 줄곧 만나는 친구 은진(신선해)과 연관되어 있다.

성희는 활동보조 외에 야학에서 수업보조 일도 하는데, 성희와 은진은 그 과정에서 짝이 되기도 하고, 그와 상관없이 평범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영화 중간에 삽입된 한 장면은 장애인 학생들이 앞에 마주 앉은 수업 도우미의 얼굴을 그리는 그림 수업의 풍경을 담고 있다. 은진은 자기 앞에 앉은 성희의 얼굴을 그리고, 수업 시간 내에 그림을 완성하지 못해 성희의 얼굴을 사진으로 남긴다. 영화의 후반부, 현목 어머니 사고 이후 한 달이 지난 시점의 한 장면에서 성희는 은진에게, 자신을 그린 그림을 자기에게 마지막 선물로 주면 안 되겠냐고 묻는다. 이어지는 대화의 내용은 이렇다. 그건 성희가 아니라 성희 이전의 수업 도우미를 그린 그림이었고, 성희를 그린 그림은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그 그림을 완성해서 성희에게 주는 건 글쎄, 성희가 스페인에 다녀오면 생각해보겠다고 한다. “안 돌아오면?” “그럼 버려야지.” 이 작은 오인과 무던한 대화는 그 자체로 영화에 소소하게 즐거운 기운을 불어넣는다. 또한 얼굴을 마주 대하기, 즉 대면의 어려움 그리고 소통 과정의 불가피한 오해와 실패를 새삼 환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 성희는 실패의 지점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간 현목이 계속 성희의 단말기에 카드를 찍어 추가로 받게 된 활동보조비를 손에 들고서 말이다. 현목의 집에 도착한 성희는 얼굴의 피도 닦이지 않은 채 방치된 현목의 어머니를 본다. 이때 이 집은 일말의 책임감도 어떠한 가능성도 남아있지 않은 듯이 말라버린 공간처럼 느껴진다. 망연자실한 그 순간 바깥에서 서성이던 현목이 집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영화는 처음으로 오버 더 숄더 쇼트의 교환을 통해 두 인물 사이에 대화의 공간을 구축한다. 여기서 이들은 마침내 투 쇼트가 아니라 얼굴의 교체라는 관습적인 형식을 통해 영화적으로 대면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화의 성립을 담보하지 않는다. 현목의 집은 이미 대화가 불가능한 공간이 되어있고, 이 무책임한 아이는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 얼굴이다. 성희는 이내 현목을 마구잡이로 때리고 발로 차고 온몸으로 치고받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난폭하게 뒤엉켜 나뒹군다. 곧이어 성희의 거친 숨소리와 현목의 “왜! 왜 그러냐고요!”하는 소리만이 남은 채로 화면이 암전되면 영화는 끝난다. 그러니 이것 또한 실패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위태롭지만 얼마간의 가능성을 품은 투 쇼트, 시선의 폭력과 그것을 애써 피하는 일련의 선택을 지나 끝내 대면의 형식이 들어섰을 때 이들에게는 별다른 말없이 격렬하게 부딪치는 일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실패는 체념이나 소소한 자족, 적당한 봉합과는 달라 보인다. 함께 살기가 요원하고 그렇다고 혼자서도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실패의 순간을 외면하거나 유예하는 대신 직면하기로 선택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함께 있음’의 양식을 새롭게 모색하기 위해서 일단 실패해야 한다고, <에듀케이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며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손시내(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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