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개봉한 두편의 근사한 졸업영화에 대해 생각해봤다. 당장 내 졸업이 걱정인데 배부른 소리를 늘어놓았다.
벅찬 숨을 뱉어낼 때까지
첫 번째 영화를 찍는 감독의 심정이 구체적으로 어떠한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몇 가지 사례에 비추어 그 시간을 통과하는 연출자 내부에 대단히 복잡한 감정들이 감돌게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가령, 누벨바그의 젊은 감독들은 영화를 찍을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프랑수아 트뤼포가 그러했다. 그토록 열망하던 영화를 자신의 권한으로 찍는다는 것, 현장의 스탭을 지휘하고 배우들과 교감하는 일. 그것은 한 시네필의 사적인 시간과 영화의 시간이 겹치는 순간이며, 영화의 아이(Cine-Fils)가 비로소 극장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이기도 할 터이다. 벽을 넘는 행위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트뤼포에게도 이는 호기심과 긴장, 두려움과 조급함, 그리고 서투른 열정을 수반한 단 한번뿐인 경험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결코 두번은 찍을 수 없는 예외적이고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진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의 경험을 고백하는 예도 있다. 일본의 영화감독 요시다 기주는 처음 연출자의 관점에서 영화 이미지를 들여다보는 순간에 찾아오는 범용한 감상을 전한다. 그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영화는 매혹적이고 찬탄을 머금은 대상으로 각인되지만, 직접 이미지를 구성하는 영화감독이 되어 작은 카메라 프레임을 통해 화면을 바라본다면 실로 평범하기 짝이 없는 피사체를 목격하게 될 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 이미지란 비밀스럽고 신비로움을 간직한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카메라 렌즈에 비치는 것이 찍히기만 한다면 영화로 성립할 수 있는 타협의 결과물이 된다. 그리하여 감독의 자의식은 머릿속의 구상과 눈앞의 카메라에 붙잡힌 물질적 대상간의 차이를 인지하는 데서 발생한다. 요시다가 데뷔작 <쓸모없는 녀석>을 포함한 초기 영화들에서 기존 상업영화의 문법, 혹은 영화의 시선 자체에 의문을 던지는 작업을 펼친 데는 이런 시각적 원체험이 선사한 충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데뷔작의 예시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경우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모스필름은 <이반의 어린 시절>의 제작을 다른 감독과 배우들로 한 차례 진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편집된 분량의 반응이 좋지 않았고, 이에 절반 넘게 촬영된 영화의 제작이 중단되고 만다. 재개된 프로젝트를 수락한 연출자가 바로 타르코프스키였다. 그는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에 원작 소설을 다시 읽고, 시나리오를 전부 수정한 뒤, 기존의 배우들과 스탭을 교체하고 나서 촬영에 돌입했다고 밝힌다. 당시 크랭크인을 앞둔 타르코프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로에서부터의 시작”을 필요로 한 것이다. 에릭 로메르가 말했듯이 영화가 ‘거절의 예술’이라면, 요시다와 타르코프스키의 사례는 한명의 연출가로서 그러한 거절의 영토로 진입했음을 자각하는 각각의 절차를 예증한다. 주목받는 데뷔작의 대다수는 새로움을 표방한 과장된 선언을 내세우거나, 흥분과 열정으로 가득 찬 도전적 작업인 경우가 많지만, 이들의 사례에서처럼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다른 많은 것을 지워가는 필연적인 거절의 작업 또한 우리에게 외면할 수 없는 논점을 던져준다.
거절의 데뷔작(들)
교훈이 될 법한 무용담을 늘어놓으려는 의도는 아니다. 새삼스럽게 첫 번째 영화에 대한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거론한 것은 올해 극장에서 마주친 두편의 특별한 데뷔작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한편은 개봉을 앞둔 김덕중 감독의 <에듀케이션>이고 다른 한편은 지난 8월 개봉한, 그러나 작품의 성취에 비해 많은 환대를 얻지 못한 오정석 감독의 <여름날>이다.
두 영화 모두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졸업작품으로, 오정석 감독은 <에듀케이션>의 촬영을 담당하기도 했다. 소박한 규모이기는 해도, 독자적인 작업이라기보다는 시스템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절차와 과정을 밟은 협업의 결과물인 셈이다(두 영화의 이야기에는 또한 ‘졸업영화’라는 제도가 부여하는 과도기적 시기에 대한 반영이 새겨져 있다. 한 시기를 통과하는 지점이자, 이전까지와는 다른 시간으로의 이행이자, 한명의 연출자의 시작점을 표시하는 졸업영화의 미묘한 성질에 대해선 달리 이야기할 기회가 있길 바란다).
굳이 분류하자면 김덕중과 오정석의 첫 영화는 요시다, 또는 타르코프스키가 직면한 태도의 계열에 속하는 데뷔작이다. 무언가를 드러내기보다는 무언가를 거절하고 생략하는 데서 영화적 스타일을 찾은 이 영화들에서는 첫 영화를 찍는 이들에게서 쉽게 발견되는, 세계를 뒤흔들어보려는 조급한 열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대신 아주 미세하고 민감한 자극들, 이를테면 통증을 호소하거나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에 뒤척이는 몸의 촉감, 여름이라는 날씨의 감각, 화면의 경계를 넘어 들리는 웅성거리는 소음, 차분히 둘러앉아 음식을 섭취하는 일상적인 미각, 떠나가고 배회하고 끝내 되돌아오는 발걸음의 동선과 같은, 무척 사소해 보이지만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의 변용을 가져다주는 순간들에 반응한다. 지면에 닿는 휠체어의 마찰을 지각하듯이(<에듀케이션>), 혹은 물가에 던져진 낚싯대의 진동을 기다리는 것처럼(<여름날>) 일상의 제스처를 통해 예민하게 감지되는 현실의 질감을 끌어들이는 작업이다.
그렇다고 두 영화가 마냥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면들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에듀케이션>과 <여름날>은 공통되게 여름을 배경으로 두고 있지만, 계절 특유의 활기찬 생명력과 광채가 펼쳐지는 장면들은 드물게 묘사된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두 영화는 불이 꺼진 어두운 방 안으로 주인공이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작품들은 환한 명도의 ‘밝은 방’을 가리키는 영화가 아니다. 그런 이례적인 어둠 내부로 진입하면서 주인공의 고립과 예기치 못한 관계의 생성, 돌연한 사라짐의 순간들이 연결된다. 여름의 어둠 속에서 정확히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그런 불확실한 어둠 아래 우리의 시선과 몸짓은 무엇을 향해 있을까?
<에듀케이션>, 통증과 숨통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가온 것은 허리를 다친 성희의 몸과 관련된 문제다.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걸어가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그녀는 통증으로 인해 움직임을 멈춘다. 이 고통은 지극히 물리적이다. 몸의 통증은 화면의 지속을 단절시키고 중단에 이르는 순간을 도입한다. 그런가 하면 이어지는 초반부 장면에서 성희는 스페인으로 떠나 돌아오지 않겠다는 계획을 말하고는, 거기서 뭘 하겠냐는 질문에 숨 좀 쉬면서 살겠다고 답한다. 반대로 말하면, 성희는 이곳에서 숨을 쉬기조차 쉽지 않다.
뒤틀려진 뼈, 질식 직전의 호흡. 영화는 그녀가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된 원인을 친절히 설명하는 대신 이 불균형에 휩싸인 몸을 고등학생 현목의 집 안으로 들여보낸다. 성희는 장애인 활동 보조인이고, 현목의 집에는 중증장애인이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어머니가 있다. 현목의 말에 의하면, 불빛을 비추면 어머니가 반응하기 때문에 집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불을 켜지 않는 어두운 상태를 유지한다. 돌이켜보면 이 집은 공포영화의 무대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온갖 쓰레기들로 어지럽혀 있고 어두움이라는 외양이 전제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성희가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고자 했던 심리적 기제들에 낱낱이 노출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성희가 현목의 집 내부에 머무는 시간 동안 신체의 중첩과 충돌이 발생하는데, 전자는 성희와 현목 어머니의 몸이 나란히 화면에 놓일 때다. 허리 디스크로 인해 자세를 바로잡아야하는 성희의 몸과 와상 장애로 의식과 움직임을 잃어버린 현목 어머니의 몸이 한 장면에 주어지는 것이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오류가 발생한, 완전하지 않은 두개의 몸. 결코 같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 시간에는 기묘한 고통의 공유와 평온함이 감돈다. 벽에 등을 대고 스트레칭을 하던 성희가 바닥으로 쓰러져 현목 어머니의 발가락을 만지는 순간처럼(이는 손발톱을 깎아주는 활동 보조인의 통상적인 업무를 초과하는 정서적 순간이다) 기이한 친밀감이 두 사람의 접촉으로 형성된다.
후자의 충돌은 성희와 현목이 수행하는 행위에서 나온다. 두 사람이 단말기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다 성희가 쓰러지고 만다. 이 잠깐의 몸짓은 물론 영화가 마련한 강렬한 결말을 조심스럽게 예비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에듀케이션>이 인물에게 카메라를 비추는 방식은 문틀이나 복도, 창문과 같은 여러 종류의 프레임 내부의 프레임을 통한 관조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실내의 카메라는 비교적 낮은 위치에 자리 잡으며 손쉽게 프레임 주변부로 밀려나는 인물들의 움직임을 지켜본다. 이 장면에서도 카메라 프레임은 두 사람의 위치를 문틈 사이로 제한해두고 있으며, 성희가 쓰러지면서 그 비좁은 화면 가장자리로부터 그녀의 신체를 벗어나게 한다. 이러한 화면 구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특정한 경계를 만들어낸다. 심도와 거리감을 조성하는 그와 같은 경계적 프레임의 단면은 개인의 몸을 압박하고 가두는 두터운 분리장치로 기능한다. 그건 성희와 현목이 기도가 막힌 어머니의 몸을 흔들고 두드리는 격정적인 장면에서도 그러하다. 그들은 정당한 자리를 잃어버린 자들이고, 정해진 자리를 강요당한 사람들이다.
성희와 현목이 어두운 방에 머물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향하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다. 우연을 가장해 마주친 옛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성희는 돌연 자리에서 이탈해 혼자 사라져버린다. 이와 유사하게 현목은 성희에게 좋은 곳으로 가자고 제안한다. 정작 도착한 곳은 특별히 좋다고 말하기 애매한 평범하기 짝이 없는 호수다. 하지만 그곳에서 미성년의 시기를 견디는 현목, 그 시기를 통과하고 또 다른 문제들과 직면한 성희, 그리고 그들을 불투명하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이 잠시나마 펼쳐지고 이내 사라진다. 성희와 현목이 어머니의 휠체어를 끄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이는 단순한 동행이라기보다는 세 사람의 몸을 긴밀하게 결합시키는 임시적인 동작이 된다.
하지만 영화는 이것이 결코 지속될 수 없는 동작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해 제 몸을 가누지 못한 현목은 업혀 있던 어머니를 계단에서 떨어뜨리고 만다. 이 고장난 몸짓으로 모든 관계가 부서진다. 그리하여 성희와 현목의 신체가 다시 부딪히는 영화의 마지막은 당혹스러운 결말이 아니라 그렇게 부서진 관계를 맨몸으로 증언하는 순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토록 초라한 신체를 숨길 방법은 제시되지 않는다. 몸을 지탱하는 휠체어라는 보철물도, 목소리를 듣게 해주는 음성 장치도 없다. 어머니의 굳은 몸은 더는 빛에 반응하지 않는다. 몸싸움을 하는 두 사람의 신체가 뒤엉키고, 격한 숨소리가 가득 들린다. 그들은 숨을 내쉬며 살아 있는 걸까? 하지만 누구도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여름날>, 풍경 앞에 멈춰서
이 영화의 네 번째 숏은 정자에 앉아 원경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는 승희의 옆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화면에 인물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구체적으로 무엇에 초점을 두고 보는지 식별하기는 불가능하다.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는 것일까? 그보다 조금 앞서 중경에 보이는 마을과 논밭을 보는 걸까? 단순히 ‘풍경을 본다’라고 말하면 충분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진술에는 불가피한 모호성이 따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섯 번째 숏에서 승희는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는 대신 프레임 안으로 걸어들어와 밭을 일구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이상하게도 시선이 이끌린 것은 네 번째 숏과 다섯 번째 숏의 후경에 드러난 바다의 풍경이 거의 똑같다는 점이다. 직전 장면에서 보이는 배와 조선소 크레인들이 같은 자리에 배치되어 있다. 아무리 풍경이라지만, 부동 상태의 피사체가 같은 모습으로 연속적인 숏의 흐름에 삽입되었을 때 의구심이 생겨난다. 구도를 조금 비틀어 풍경을 다르게 보여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두 장면 사이에 다른 장면을 넣어 연속된 풍경의 위화감을 줄이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따지고 보면 촬영이나 편집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승희가 정자에서 내려와 할머니가 있는 밭으로 걸어올 동안 바다에 정착된 배와 크레인이 움직이지 않는 건 크게 어색하지 않다. 카메라가 연속해서 같은 방향에 대고 화면을 구성하는 것도 특별히 논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연달아 이어 붙는 두 장면에 중복해서 나타난 풍경의 면모는 연출자의 의도를 초과하는 어떤 지각적인 장치로 받아들여진다. 말하자면, 부동의 풍경은 정자에서 밭으로 걸어온 한 인물의 시간을 압도한다. 그것은 인물의 서사를 초과하는 풍경의 무심함에 직면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부동의 풍경 앞에서 무기력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다른 움직임, 다른 감각, 다른 시간이 필요하다.
<여름날>은 차분한 호흡으로 한 인물을 보여주는, 그러나 인물의 얼굴에 직접 카메라를 비추기보다는 그 사람의 뒷모습과 시선과 걸음을 포착하는 영화다. 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고, 승희는 이따금 움직임을 멈추고 무언가를 바라보거나 기다리며, 불빛을 끄고 어둠에 사로잡히거나, 혼자 잠자리에 든다. 그녀가 무슨 일로 거제에 머무는지도, 어떤 상황에 부닥친 건지도 설명되지 않는다. <여름날>의 매혹적인 측면은 흔히 무기력의 근거로 거론되는 이러한 인물의 (비)행동을 영화의 동력으로 조직한다는 데 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여름날>은 무기력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영화다. 잠에 들고, 한밤의 어둠 속에 멈춰 서는 승희의 행위는 역설적으로 풍경에 붙들린 ‘유배된 시간’을 벗어나 카메라로 명확하게 감지되지 않는 인물 자신의 고유한 감각을 프레임 내부로 끌어들인다. 운동이 제거된 빈 화면으로부터 삶의 다른 질감을 포착하는 이런 장면들은 진정 부동의 풍경에 대항하는 일상적 일탈의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갑작스러운 상실이 발생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승희는 그녀 할머니의 죽음과 대면한다. 그리고 할머니가 매번 누워 있던 침대에 앉아 슬픔을 삼킨다. 영화의 도입부에 컨테이너에서 어머니의 옷을 발견한 것처럼, 상실은 흔적을 남기고 자리에서 사라지는 경험을 마주하게 한다. 그렇게 흔적과 사라짐에 대한 자각을 끌어안고 승희는 새벽에 폐왕성을 오른다. 이전에 낚시를 가르쳐준 친구와 함께 걷던 그 길로 올라, 영화의 네 번째 숏과 다섯 번째 숏이 그러한 것처럼 조금도 변하지 않은 풍경을 마주한다. 아내가 죽은 다음날 새벽의 아름다움을 지켜보는 <동경 이야기>의 히라야마처럼, 승희는 그 자리에서 숨을 고르며 할머니의 죽음, 그리고 전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을 모두 받아들인다. 이 결말은 반복과 정지의 상태가 무기력한 절망이 아니라 어떤 회복의 순간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에듀케이션>과 <여름날>의 마지막 장면은 비유적인 허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억눌린 삶 속에서 숨을 쉬고 싶어 하는 인물들의 몸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를 듣는다. 강인하고 아름다운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