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맥> 제작 한양영화공사 / 감독 김수용 / 상영시간 94분(81분 보존) / 제작연도 1963년
<혈맥>을 연출한 김수용(1929~)은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군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영화 일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에 통역장교로 참전했던 그는 휴전 이후 정훈국으로 배속받았고, 1955년부터 <잊지 말자 6·25> 등의 군 홍보영화를 연출했다. 그가 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1958년 만담가 장소팔, 희극배우 백금녀가 주연한 코미디 <공처가>에서다. 이후 그는 <3인의 신부>(삼성영화사, 1959), <구봉서의 벼락부자>(신필림, 1961) 같은 코미디영화를 연이어 흥행시켰다. “데뷔 이후 치열한 충무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선 영화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제작 예산을 엄격하게 지킨다는 신조를 갖게 되었다”라는 본인의 회고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충무로 제작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감독이었다.
1961년 12월 한양재단이 자본금 5억환을 출자해 만든 한양영화공사에 참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의 영화 기업화 정책에 발맞춰 아시아 시장까지 염두에 두고 설립된 메이저 영화사에서 그가 처음 맡은 작품은 제작비 1억환의 대작 <손오공>(1962)이었다. 이듬해인 1963년에는 모두 7편을 감독했는데, 한양영화공사에서만 <약혼녀> <굴비> <청춘교실> <돈바람 님바람> <혈맥> 등 5편의 연출작을 남겼다. 사실 그가 한양영화공사의 창립 기획작인 <손오공>을 감독한 것은, 당시 부사장이었던 김소동 감독이 이 작품을 연출해주는 조건으로 이후에는 만들고 싶은 영화를 연출하도록 밀어주겠다는 약속 때문이었다고 한다. 흥행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영화를 연출하던 김수용은 <돌아온 사나이>(신필림, 1960), <굴비> 같은 작품을 만나며 조금씩 작가적 자의식을 키우고 있었다. <혈맥> 시나리오를 받아든 그는 진지한 주제와 한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이야기에 그 특유의 밝고 명랑한 정서를 반영시킨다면 그만의 영화가 나오리라 생각한 것 같다.
혼재된 시공간이 의미하는 것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영화 <혈맥>의 러닝타임은 기록에 남아 있는 94분이 아니라 81분 정도이다. 2002년 한국영상자료원이 한양학원에서 35mm 상영용 프린트를 찾았을 때 필름의 상태는 영사기에 걸기도 힘들 정도로 수축되고 뒤틀린 상태였다. 2011년에 진행한 디지털 복원 작업도 쉽지 않았는데, 주기적으로 빠져나간 프레임은 물론이고 긁힌 자국과 얼룩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전체 분량의 반 정도인 무려 5만7천 프레임을 복원 시스템의 반자동 복원 모드를 쓰지 못하고 일일이 수작업으로 진행해야 할 만큼 난이도가 높았던 복원 프로젝트로 기록된다. 시나리오와 비교하면 도입부 장면이 일부 없어진 것과 육안으로도 중간 중간에 숏 혹은 프레임이 빠졌음을 감지할 수 있는데, 다행히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전체 흐름이 끊길 정도로 유실된 수준은 아니다(참고로 이 영화는 유튜브 채널이 아닌 KMDb VOD에서만 감상할 수 있다).
영화의 원작은 해방기 무대 공연으로 유명했던 김영수의 1947년 동명희극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디제시스가 혼재된 시공간으로 구성된 점이다. 원작 희극처럼 영화 역시 해방 이후 여름으로 설정되지만, 군데군데 묘사되는 내용들은 전후의 상황들처럼 인식된다. 덧붙여 영화를 촬영한 시점이 1963년이라는 점도 생각해봐야 하는데, 극중 배경으로 당시의 서울 풍경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세개의 시간대가 혼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해방 직후 상황이, 그리고 민초들의 삶이, 한국전쟁 이후를 거쳐 196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영화는 1963년 8월 제작에 착수해 10월에 개봉 했다. 1963년은 군사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10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 12월 제3공화국을 출범시킨 해이다. 당시 검열 서류에 “해방 직후 질서를 잃은 우리 사회는 잠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대 암흑상을 이루고 있었다”라고 영화를 설명하는 문구처럼, 이 영화가 공식적인 배경으로 해방기를 설정한 것은 어쩌면 신의 한수였는지도 모른다. 당시 공보국 영화과 직원이 서류에 남긴 의견은 “정부 시책과의 관계: 저촉 사항 없음”이었다.
감독 김수용이라는 오프닝 크레딧만 남은 영화는 털보라 불리는 김덕삼(김승호)이 투덜대며 집으로 돌아오는 롱숏 화면으로 시작한다. 전경에는 철조망이, 중경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걷는 털보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후에도 영화는 이 구도를 즐겨 잡는다. 행상을 하는 덕삼의 아들 거북이(신성일)와 복순(엄앵란)이 밤에 돌아올 때도, 공사장에서 다친 원칠(최무룡)이 옥희(김지미)와 돌아올 때도 같은 그림이다. 해방촌의 산비탈 판잣집에 사는 털보는 갑자기 나타난 땅주인이 집을 비우라고 하자 욕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 욕이 일본어인 점도 흥미롭다. 김수용의 회고에 의하면 이는 시나리오상의 대사가 아니라 배우 김승호가 만든 애드리브로, 털보라는 인물의 성격을 맛깔나게 살리고 있다. 배우 김승호는 극중 인물의 과거 직업까지 설정해 연기하는 배우였는데, 털보는 북해도 탄광에서 살아 돌아온 인물이었다. 다음 장면에서는 “일본말 쓰지 말라는데 화만 나면 튀어나온다”라는 애드리브 대사까지 완벽하게 이어진다.
그가 집으로 올라오면 방공호에 잇대어 만든 판잣집 3채를 배경으로 세 가족의 상황이 유기적으로 설명되는 세련된 오프닝이 시작된다. 원작의 무대는 성북동 방공호지만 감독은 서울역이 내려다보이는 지금의 힐튼 호텔 자리에 오픈 세트로 판자촌을 지어 카메라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동시에 시각적인 효과까지 거두고 있다. 털보는 자기 집임을 표시하기 위해 아들 거북이에게 명패를 써달라고 하고, 둘은 방공호에 만들어진 집으로 내려온다. 아버지와 아들이 툭탁거리는 대사가 끝나갈 즈음 위에서 양철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제 깡통영감의 집으로 카메라가 옮겨간다.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그의 재취 옥매(황정순)는 복순이를 술집에 팔려고 소리를 가르친다. 털보가 명패를 달 못을 빌리기 위해 말을 거는 노모(송미남)의 집은 평안도 출신 원팔(신영균)의 가족이다. 포탄을 분해해 팔려다 폭발해 다친 그의 아내(이경희)는 병원도 한번 못 간채 누워 있고 딸은 다리에 장애를 입었다. 동생 원칠은 일본에서 대학까지 나왔지만 일자리가 없어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시작한다. 가짜 담배를 만들던 원팔이 아직 원칠이 안 들어왔느냐고 물어보면, 이제 밖으로 나온 카메라는 그가 38선을 같이 넘었던 옥희를 우연히 만나는 모습을 담는다.
새로운 세대에게 희망을 찾다
다음 장면에서 옥희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철조망 담이 있는 2층집의 1층에 살고 있는데 그녀가 방에 들어가자 미군이 기다리고 있다. 이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원칠이 비꼬며 말하는 것처럼 그녀는 양공주였다. 사실 양공주라는 말은 한국전쟁의 산물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철조망, 양공주 그리고 월남한 사람들(영화 속 대사에서 “따라지”라고 호명되는)은 해방 공간의 미소군정에서 한국전쟁 휴전까지 연결된 분단의 산물들이다.
술집에 팔려가기 싫은 복순이는 거북이와 집을 나가고, 털보는 화산댁(석금성)의 소개로 청진댁(조미령)을 맞았지만 그녀는 돈을 훔쳐 달아나고, 원팔의 아내는 결국 숨을 거두고 원칠마저 공사장에서 다친다. 하지만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원팔과 원칠은 화해하고 새로운 엄마 역할을 하게 될 옥희는 미자를 학교에 보내고, 거북과 복순에게서 편지도 온다. “애비들은 못나서 이런 데서 헤어나질 못하지만 너희들이야 쭉쭉 뻗어 나가야지”라는 깡통영감의 대사처럼, 두 젊은이는 영등포의 방직공장에 취직해 보다 나은 미래를 개척하는 중이다. <오발탄>을 떠오르게 하던 영화는 가족 드라마 장르의 엔딩을 빌려 희망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