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확산하기 직전인 올해 초 미국 실리콘밸리에 다녀왔다. 인공지능과 자동화 시대를 앞장서서 주도하고 있는 그곳의 양극화 실태를 취재하기 위해서(필자는 시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KBS 기자다.-편집자). 아마존, 구글, 애플 등 현재 전세계 시가총액 톱10 기업은 모두 이용자 데이터를 원료 삼은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화를 이루고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끌어모으는 회사들이다. 세계 부자 1위인 아마존 창업주 제프 베이조스의 자산 규모는 공개된 것만 1130억 달러(약 125조원)에 이른다. 기업들이 천문학적 부를 쌓아가는 동안 실리콘밸리 지역의 부동산 시세는 하늘을 찌르는 수준이 됐다.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가장 작은 원룸 월세는 3천달러(약 330만원) 아래를 찾기 어렵다. 지은 지 50년 된, 방 2칸에 욕실 1개짜리 허름한 주택이 매물로 나와 찾아가봤는데 적어도 200만달러(약 22억원)는 받아야 한다고 했다. 집값을 감당하지 못하는 다수의 직장인들이 차에서 먹고 잔다. 그마저 도망다니지 않고 고정된 장소에 머무르려면 월 1천달러 이상 주차료를 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도심은 어딜가나 노숙인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은박지에 마약을 담아 흡입하는 모습을 백주 대로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을 취재하러 다니다 칼 든 노숙인에게 공격을 당해 겨우 도망치기도 했다. 아프리카계 자국민에게 총을 쏘고 곤봉을 휘두르는 강력한 경찰력은 그곳에 없었다. 최근까지 노숙 생활을 했다는 30대 남성은 “월세 900달러를 내며 살았는데 IT 기업 직원에게 3천달러씩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집주인이 터무니없이 월세를 올려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노숙이 노숙인의 탓이 아니고 빈곤이 빈자의 잘못은 아니다. 기술이 발전하는 가운데 자본의 욕망에 세상을 내맡긴 사회의 풍경이 이랬다. <엘리시움>의 양분된 세상이 떠오른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남의 일이 아니기도 했다.
엘리트들이 그들을 위하지 않음을 깨달을 때
지난 20년간 미국에선 제조업 일자리 약 500만개가 사라졌다. 이중 80%가 자동화 탓에 없어진 것으로 추산된다. 빈곤한 러스트 벨트 백인 노동자들은 화가 나 있다. 연단에 설 때마다 대신 화를 내며 “중국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갔다”라고 목청 높이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진심 어린 신뢰를 보낸다. 21세기 시장 자본주의의 최대 피해자들이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층이 된 것은 시대의 역설이다.
트럼프 시대가 개막한 2017년, 힐빌리 출신의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가 출간된 건 그래서 뜻깊다. 러스트 벨트 지역의 백인 하층민, 이제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저학력 백인 보수층을 가리키게 된 ‘힐빌리’의 지리적·문화적 기원이 내밀하게 담겼다. 저자 J. D. 밴스는 마약과 폭력에 찌든 엄마를 피해 외조모의 도움으로 예일대 로스쿨을 나와 실리콘밸리에서 자수성가한다. 그 성장 과정은 대략 이렇다. “엄마 집에서 지낸다는 건 엄마의 다섯 번째 남편이자 내게는 가까운 미래에 엄마의 ‘전남편’이 될 남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냥하지만 낯선 남자와 말을 섞어야 한다는 걸 뜻했다. 그리고 엄마의 가구를 보며 지난날 엄마가 밥 아저씨와 싸울 때 그 뒤에 숨어 있었던 내 모습을 떠올려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어쩌다 집 안에 싸움이 없으면 이웃이 싸우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 지긋지긋한 동네에서 “나는 지금도 지인이나 친척들이 오바마를 두고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과 연관 있는 사람이라거나 반역자라거나 혹은 멀리 떨어진 변방 국가에서 태어난 외국인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심심찮게 듣는다”라는 것이 책에서 밝힌 이 지역 분위기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밴스의 고백은 러스트 벨트 유권자들의 표심을 꿰뚫는 명석한 진단이기도 하다. “오바마를 보고 있으면 내가 어렸을 때 존경하던 사람들과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명확하고 완벽하게 표준 발음을 구사하는 오바마의 억양은 그저 생경하기만 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 지역사회 사람들이 현대 미국의 엘리트 사회가 우리를 위한 게 아니라고 믿기 시작하던, 바로 그때 등장했다.”
힐빌리를 구성하는 것
이 회고록에 바탕한 영화 <힐빌리의 노래>는 얼핏 ‘개천에서 난 용’의 성공 스토리로 보인다. 어린 밴스(오언 아스탈로스)가 TV 화면에 스치는 앨 고어나 빌 클린턴에 관심 보이는 정도를 제외하면 정치적인 언급도 없다. 론 하워드 감독의 작품 연보 중 범작의 범주에 들어갈 이 영화는, ‘주인공이 저학력 백인 사회에서 외조모의 도움 속에 열심히 공부한 다음 대형 로펌 면접을 보기까지의 이야기’다. 충분히 식상해 보인다.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은 이토록 구질구질한 백인들의 밑바닥을 보는 미국인 관객의 심정이다(이제는 트럼프 시대를 끝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상식 있는 미국인들 말이다).
<힐빌리의 노래>는 미국인 관객과 그렇지 않은 관객의 감상에 상당한 차이가 나는 대표 사례로 꼽힐 작품이다. 예컨대 ‘물에 빠진 학생을 구하려는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가 있다면 2014년 이후 한국인 관객과 다른 나라 관객의 감상 차이는 실로 현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집단 트라우마라는 작품의 외연은, 원작을 그저 피상적으로 다룬 것일지도 모를 영화의 내면과 만나고 충돌하며 종종 뜻밖의 지점으로 나아가곤 한다. 그렇다면 마약에 절어 있는 밴스 엄마(에이미 애덤스)의 눈 밑 다크서클만으로도, 이 영화는 고통스럽게 트럼프 집권기를 지나온 미국인들의 상처를 건드리기에 충분하다.
<기생충>에서 기우(최우식)는 부잣집 사람들을 보기 좋게 속이고 들어가서도 이 집에 자신이 어울릴지 줄곧 걱정이다. <힐빌리의 노래>에서 밴스는 아이비리그 로스쿨을 다니면서도 종종 욱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고개를 떨군다. 면접 자리와 다름없는 만찬장에서, 그리고 엄마를 돕겠다는 애인과의 통화에서, ‘돈이 다리미인’ 금수저들과는 다른 기질이 문득 튀어나온다. 그토록 부정하고 싶은 켄터키 시골의 애티튜드가, 어쩌면 지리적 유전자로서 자신을 구성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밴스는 생각한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도널드 트럼프가 어떤 인물인지 그의 취임 전까지는 잘 몰랐다고 치자. 지난 4년간 그는 거짓말 또는 사실과 다른 말을 2만번 넘게 내뱉었다. 인종차별적 언행을 일삼았으며 이민족을 핍박했다. 코로나19 치료를 위해 “환자 몸에 소독약을 주사하면 되지 않겠냐”라던 그의 대처 속에 미국인 사망자는 25만명을 넘겼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그가 무슨 짓을 해도 그다지 놀라지 않게 되었는데, 올해 대선에서 4년 전보다 약 1천만표를 더 얻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이 세상에 ‘힐빌리를 구성하는 것’들이 남아 있다면 극우 포퓰리즘은 언제든 재등장할 것이다. 남의 나라 얘기만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