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영화, 영화인을 집계하는 연말 송년 설문 기간은 한해 동안 관람한 영화에 대한 정리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 작품, 저 작품을 떠올리며 영화 목록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영화의 이미지들이 겹치고 포개져 어떤 경향을 이루는 순간도 종종 마주하게 된다. 나에게 2020년의 한국영화를 상징하는 이미지는 어딘가로 헐레벌떡 도망치는 누군가의 당혹스러운 모습으로 기억될 듯하다.
<사냥의 시간>과 <#살아있다> <반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콜>에 이르기까지 올 한해 관객을 만난 화제의 한국영화에서 이러한 이미지를 만날 수 있었다. 벼락처럼 불현듯 닥친 재난 앞에서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의 탈주를 꿈꾸며 살아남기 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는 2020년의 한국영화 속 인물들의 악전고투는 코로나19 팬데믹 훨씬 이전부터 지금, 여기의 한국 사회에 디스토피아가 당도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생존 이외의 모든 것들을 부차적인 요소인 양 다루는 세계가 스크린에 반복적으로 재현된다는 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송년호 특집으로 올해의 한국영화를 결산하는 네 가지 테마의 글을 보내온 프런트라인 비평 지면 필자들의 글에서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씨네21>이 선정한 올해의 한국영화 1위는 홍상수 감독의 <도망친 여자>다. 누군가는 올해도 홍상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올해는 시네마의 폐허에서 변치 않는 모습으로 영화의 신비를 탐구하는 창작자의 성실함이 영화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이들에게 주는 위안이 각별히 더 컸다고 생각된다. “영화로부터 도망치는 것인지 영화로 도망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도망침이 2020년 가장 큰 위로를 준 것은 분명하다”는 김철홍 평론가의 코멘트를 더불어 언급하고 싶다. 홍상수 감독의 <도망친 여자>를 제외하고 한국영화 베스트5에 선정된 모든 작품이 신인감독의 데뷔작이라는 점은 코로나19로 인한 특수한 상황임을 감안하더라도 주목할만한 결과라 할 만하다. 개성 넘치고 야심만만한 감독들의 첫 장편영화가 올해의 한국영화계에 비춘 ‘작은 빛’은 위기 속에서 언제나 더욱 강한 면모를 보이곤 했던 한국영화의 저력에 다시금 희망을 걸어보게 한다.
2020년을 마무리하는 이번호에서 안타까운 작별의 소식도 전해야 할 것 같다. 정훈이 만화 연재가 송년호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씨네21>의 많은 독자들에게도 편집부에도, 해학 넘치는 친구였던 남기남, 씨네박 같은 캐릭터를 더이상 지면에서 만날 수 없게 된다. 뜨거운 안녕을 앞두고 정훈이 만화를 오랫동안 담당해온 이다혜 편집팀장이 정훈이 작가를 인터뷰했고, 남선우 기자가 역대 정훈이 만화 베스트10을 소개했다. 매주 목요일 “정훈이 만화 들어왔어요”라는 이다혜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면 한 주의 마감이 끝나가고 있음에 묘한 안도감이 들곤 했다. 다음주 마감이 돌아오면 더이상 그 말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큰 허전함으로 다가올 것 같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이별은 아니라고 확신하며, 남기남과 다시 만나게 될 그날까지 멀리서나마 정훈이 작가의 행보를 응원하고 지지하려 한다. 그동안 정훈이 만화를 연재한 정훈이 작가와 독자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P.S. <화양연화> 개봉 20주년을 맞아 <화양연화 리마스터링> 국내 개봉을 앞둔 왕가위 감독을 인터뷰했다. 김성훈 기자가 무려 7개월간 섭외에 공을 들였고, 전세계 독점으로 송년호에 인터뷰를 게재할 수 있게 됐다. 독자 여러분을 위한 <씨네21>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