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영화 일을 하고 있는 제가 취미로 보는 해외 드라마는 오직 유럽과 미국의 TV시리즈로, 최근 마음에 든 건 <왓치맨> <더 크라운> <플리백> 등 영어권 작품뿐이었습니다. 직업상 한국영화는 자주 보지만 드라마는 <겨울연가>를 본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당시엔 상당히 한국 드라마에 빠져 있어서 한국어 학원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저는 멜로드라마보다 로맨틱 코미디를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인기를 얻은 한국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가 많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10년간은 한국 드라마와 멀어져 있었습니다. 전세계가 TV시리즈 황금기에 돌입했기 때문에 보고 싶은 드라마가 너무 많았고, 지금보다 더 많이 보면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속마음을 말하자면 일본에서 한국 드라마는 아줌마들이 보는 것이라는 편견도 있었습니다(저 역시 아줌마 중 한명이라는 건 일단 제쳐두고서 말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올해 4월에서 5월 사이 일본에서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유행하고 있었음에도 제가 보기 시작한 것은 7월에나 들어서입니다. 언제나 유행하는 것은 체크하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뒤처진 원인은 첫째도 둘째도 일본어 제목 때문이었습니다. ‘연애’라면 모를까 일본어의 ‘사랑’에는 묘하게 무거운 울림이 있는데 거기에 ‘불시착’이라는 심상치 않은 말이 이어진다면 ‘엄청난 불륜극?’이라고 오해를 해도 어쩔 수 없겠죠(덧붙여 말하자면 옛날에 히트한 일본영화 중에 <사랑의 유형지>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 영화가 중년 남녀의 불륜극이었던 것도 오해를 하게 된 원인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불시착>은 로맨틱 코미디인 것 같았고 북한에 불시착한 한국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말에 갑자기 흥미가 생겼습니다. 처음부터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은 들었습니다만 제가 이 정도로 빠질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결국 저는 16화를 연달아 2번이나 보고 말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최근 좋아하는 것에 몰두해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되는 상태를 “늪에 빠지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보기 좋게 <사랑의 불시착>이란 늪에 빠져버렸습니다.
이후 <이태원 클라쓰> <나의 아저씨> <슬기로운 의사생활> 등에 빠져들었지만 아직도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역시 <사랑의 불시착>이었습니다.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에서 우리가 거의 볼 수 없었던 북한 서민들의 생활이 그려져 있는 점, 남북 군사분계선을 넘어 만난 남녀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스토리라는 임팩트가 컸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발하고 대담한 설정을 바탕으로 실제 저를 드라마에 빠져들게 한 요인은 탄탄하게 만들어진 주조연 캐릭터들의 매력이었습니다.
<사랑의 불시착>으로 한국 드라마를 처음 본 사람들 많아
그중에서도 제일은 역시 리정혁(현빈)이지만 처음에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국경 지대를 지키는 북한 군인인 그는 언제나 수수한 군복이나 단순한 모노톤의 스웨터만 입고 있으며 헤어스타일도 바가지 머리입니다. 아무리 봐도 세련된 느낌이 없는 남자라는 인상입니다. 만난 지 얼마 안된 윤세리(손예진)가 쉽게 농락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머리와 몸을 비누로 씻으라던 그가 윤세리에게 샴푸와 보디 클렌저 세트를 갖춰주고 암시장에서 아로마 향초를 찾아줬습니다. 게다가 아침 식사나 집에서 볶은 커피까지 준비해주는 걸 보면서 제 마음도 점점 변해갔습니다. 평양의 호텔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라고 해야 할까, 무자각한 채 윤세리를 지키고 있던 즈음 리정혁의 주가는 급상승했습니다.
특히 공항으로 향하는 윤세리를 구하러 온 장면에서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리정혁이 드라마 후반 정장 차림에 앞머리를 올린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는 위화감을 느꼈다는 겁니다. 아주 잘생기고 멋있었지만, 어느새 저는 바가지형 앞머리를 하고 조금 세련되지 않은 리정혁을 사랑스럽게 생각하게 된 거겠죠. 배우가 만들어진 캐릭터와 동화된다는 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여주인공 윤세리도 로맨틱 코미디와 멜로의 여주인공이 동시에 존재하는 듯한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제5중대 대원이나 마을의 여인들도 저마다 개성이 풍부해서 이들이 드라마 분위기를 띄우는 데 일조했던 것 같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는 제가 <사랑의 불시착>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진지함과 웃음의 절묘한 밸런스입니다. 이 작품은 이야기가 고조되어 최종회를 향해 가면서도 충분히 로맨틱하고 애절하며, 절체절명의 상황 이후에도 틈새 없이 대사를 주고받으며 웃기거나 바보같이 행동하거나 또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연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예를 들면 세리가 총에 맞은 정혁을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지프차를 타고 폭주할 때 “좋아하는 영화는 <매드맥스: 분노의 질주>”라고 말하며 액셀을 밟는 장면을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는 충분히 멋있고 상황에도 맞지만 뜻밖의 고백이라 시청자 역시 함께 웃게 됩니다. 그 밖에도 배를 이용한 밀출국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그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서 ‘뽀뽀’를 하고 난 뒤 세리와 정혁이 마치 초등학생처럼 말다툼을 벌이는 대목은 몇번을 봐도 웃겨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세리가 엉겁결에 그 자리에서 두번 빙글뱅글 도는 데서는, 역시 손예진은 최고의 로맨틱 코미디 배우구나 확신했습니다. 조금 과장된 움직임을 해도 그녀가 하면 귀여운 행동이 됩니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가장 즐거울 때는 주인공인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생각을 아직 모르는 시기에 서로 고집을 부리거나 말다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이미 <브리짓 존스의 일기>나 그 원작인 <오만과 편견>, 셰익스피어의 <헛소동>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로코의 철칙이 아닐까요? 생각해보면 <겨울연가>도 앞부분에서 유진(최지우)과 민형(배용준)의 사소한 다툼이 재밌었잖아요. <사랑의 불시착>에서도 정혁이 사실은 약혼자가 있다고 말할 때 “기래도 설렌다고 하니 하는 말인데…”, “잠깐만, 뭐라 그랬죠, 좀 전에?”라는 말다툼 장면이나 평양의 호텔에서 세리와 정혁의 만남과 세리와 구승준(김정현)의 재회 중 어느 쪽이 운명이며 어느 쪽이 우연인지 다투는 대목이 개인적으로 꼽는 베스트 명장면입니다.
소설이나 영화나 좋아하는 작품을 만났을 때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동료가 있으면 즐거움이 배가되고 그것이 중요한 묘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같은 드라마 팬을 찾지 못해 함께할 동료가 없었다는 게 조금 아쉬웠습니다. <사랑의 불시착>의 경우 주위 친구나 지인들이 이미 눈 깜짝할 사이에 드라마에 빠져든 사람들이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예술영화만 보던 여자 친구나 할리우드 메이저 작품을 좋아하는 거래처 남성 등 의외의 인물이었습니다.
<사랑의 불시착>으로 처음 한국 드라마를 본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저처럼 <겨울연가> 이후로 한국 드라마를 본다는 동년배 여성들도 가끔 있습니다. 물론 엔터테인먼트 업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느 모임에서 함께한 의료 관계자 부부, 사진가 남성, 우리 부부, 이렇게 5명 중 4명이 <사랑의 불시착>을 보고 있었고 심지어 상당히 드라마에 빠져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이동 중 차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던 노래 또한 <사랑의 불시착> O.S.T였고, 당시 유일하게 드라마를 보지 않았던 남편도 최근에 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저의 즐거움은 다음에 봐야 할 한국 드라마에 대한 정보와 시청 후기를 드라마 팬들과 교환하는 것입니다.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다
그럼 <사랑의 불시착>이 왜 이렇게 일본에서 폭넓은 팬층을 확보하게 되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최근 몇년간 꾸준히 인기를 끌어온 다양한 한국 콘텐츠가 밑바탕을 다진 게 힘이 컸습니다. 영화 <기생충>의 역사적 흥행으로 한국영화를 처음 본 사람도 많았고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한 베스트셀러 소설과 에세이를 통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여기에 원래부터 젊은 층 사이에서 유행하던 K팝, 화장품, 한국 음식에 대한 인기가 가세하면서 단숨에 유행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큰 요인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행해진 재택근무와 그로 인해 생겨난 갑작스럽고 긴 자유 시간이겠지요. 일본 대부분의 지역에서 4월부터 5월에 걸쳐 많은 기업, 점포, 영화관을 포함한 오락시설이 폐쇄되어 주말에 외출할 만한 곳조차 없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기 시작할 때 그동안 접할 기회나 볼 시간이 없던 연속극이 갑자기 관심을 끌게 된 겁니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지상파 방송의 시청자 수가 압도적으로 높아서 직장이나 학교에서의 공통 화제는 전날 방송된 TV프로그램입니다(덧붙여 말하자면 <겨울연가>도 지상파에서 방송됐습니다). 실제로 이 시기에는 과거 인기 프로그램들이 왕성하게 재방송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불시착>은 넷플릭스에서나 볼 수 있던 드라마입니다. 처음 넷플릭스를 시청하는 사람은 너무 많은 작품이 있어서 어떤 것부터 봐야할지 몰라 당황하기 쉽지만 <사랑의 불시착>은 일본 넷플릭스가 서비스를 개시한 2월 하순부터 한국 드라마 팬들의 지지를 받아 이미 랭킹 상위권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알려지면 이미 넷플릭스에 가입했던 사람에게만 드라마가 닿았을 것입니다. <사랑의 불시착>의 파급력이 커진 것은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유명 인사들의 힘이 컸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불시착>을 본 후 팬이 됐고, 지상파 방송이나 라디오, SNS 등을 통해 드라마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또한 자신이 얼마나 이 드라마에 빠졌는지 활발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내용이 여러 뉴스나 잡지를 통해 전해지면서 <사랑의 불시착>과 <이태원 클라쓰>는 꼭 봐야 할 드라마로, 누구나 아는 작품이 됐습니다.
그외에는 친구에게 추천하고 그 친구가 또 다른 친구에게 추천하면서 인기가 배로 늘어난 경우도 있었습니다(예를 들어 인기 만담가인 쇼후쿠테이 쓰루베가 여러 프로그램에서 <사랑의 불시착>에 대해 이야기해서 현빈씨로부터 친필 감사장을 받은 에피소드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한국에서 촬영하는 차기작을 발표하면서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에 빠졌음을 고백했습니다). 지금 봐야만 하는 작품이라는 지위를 얻은 동시에 16시간 이상 드라마 시청에 적합한 환경이었던 점이 틈새시장이었던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방영작이 전국구 인기를 얻은 최대 요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작품이 왜 <사랑의 불시착>이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이 드라마가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작품이 타이밍이 맞지 않아 기대했던 만큼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가끔 있는데, 타이밍 좋게 히트한 작품이 재미가 없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실제로 제 주위에서 <사랑의 불시착>이 재미없다는 사람은 단 한명뿐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성격이 급해서 1화만 보고 재미없다고 판단한 경우입니다. 하지만 드라마를 좀더 보면 그녀 역시 드라마에 바로 빠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곧 겨울 휴가철이 시작되는데 집에서 시간을 보낼 것 같습니다. 놓쳤던 명작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어 교재를 다시 펼쳐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