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류는 콘텐츠의 인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으로부터 촉발된 또 다른 중요한 흐름이 있다. 고경범 CJ ENM 영화사업본부 해외사업부장은 “<기생충> 이전에는 주로 컨셉과 스토리를 담은 한국 IP(지적재산권)에 관심이 있었다면,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 이후에는 한국 창작자에 대한 니즈가 생겨났다”고 말한다.
“<극한직업> <써니>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등 한국영화 IP를 기반으로 한 리메이크에 대한 관심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언어도 문화도 다르다 보니 창작자를 현지로 데려와서 같이 일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 한국인 감독이 한국어로 만든 영화가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장편영화상 등 4관왕을 휩쓰는 최고의 영예를 거두면서, 유능한 한국 창작자들과 직접 작업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보다 구체화됐다. 그것이 <기생충> 전후를 나누는 차이점이다.”
물론 <기생충> 이전에도 연상호·나홍진 감독처럼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꾸준히 받은 감독들이 있고, 정정훈 촬영감독은 <그것> <커런트 워> <좀비랜드: 더블 탭> <라스트 나이트 인 소호> <언차티드> 등 할리우드 대작에 연이어 참여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 <300>의 제작자 보니 골드먼이 참여하는 <하보크> 연출 소식이 기사화된 정병길 감독 역시 2017년 칸국제영화제 때부터 지속적으로 관심을 받았다. “2017년 칸국제영화제에 갔을 때 한 할리우드 기자가 ‘내가 아는 내용들이 있는데, 아마 러브콜이 많이 갈 것’이라는 말을 전해줬다. 그때는 기분 좋으라고 한 소리인 줄 알았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이메일로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최근 1~2년 사이 생긴 중요한 변화는 칸국제영화제에 진출한 경험이 없는 감독이나, 감독 및 촬영감독 외 다른 부문의 크리에이터들에게도 제안이 들어온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해외에도 어느 정도 마니아층을 갖고 있던 감독이나 언어 장벽이 상대적으로 덜한 촬영감독에게 주로 제안이 갔다. “지금은 한국 작가들에게 관심이 많다. 한국의 스토리텔링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올라와 있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장점을 어떻게 활용해 미국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예전에는 완성된 스토리를 샀다면 이젠 크리에이티비티에 대한 역량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관심사가 확장된 거다.” (고경범 CJ ENM 영화사업본부 해외사업부장)
포스트 봉준호를 기다리는 할리우드
<기생충>으로 촉발된 한국 창작자에 대한 관심에 더해서, 글로벌 OTT 덕분에 수혜를 입은 창작자들도 있다.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넷플릭스로 향한 <사냥의 시간>은 <기생충>의 최우식이 출연한다는 점에서 베를린국제영화제 때부터 화제를 모았고, 실제로 영화를 좋게 본 할리우드 업계 관계자들이 있었다. 최근 윤성현 감독은 할리우드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고 차기작 개발에 들어갔다. 그는 “구체적으로 진행된다고 얘기하긴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영국과 미국 배경의 이야기가 될 것 같다”고 전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당시 영화를 좋게 본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었는데, 넷플릭스 공개 이후 넷플릭스를 통해 다른 에이전시의 연락을 더 받았다. 미국 영화산업에서 감독들은 에이전시뿐만 아니라 매니지먼트사와도 계약을 맺는데, 후자는 넷플릭스를 통해 연이 닿았다.” 그 이후에도 “신생 제작사는 물론 마틴 스코시즈 감독과 작업한 프로듀서나 <1917> 제작사, <퍼스트맨> 제작사와도 얘기를 나누고, 작품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이십세기 폭스, 워너브러더스, 넷플릭스와도 미팅을 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 그의 근황이다.
매체에서 일찌감치 유망한 신진 필름메이커의 리스트를 정리하기도 한다. <기생충>이 각종 시상식에서 선전하던 지난해 말, <할리우드 리포터>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영화 작가들을 만나다”라는 타이틀로 <벌새>의 김보라, <생일>의 이종언, <69세>의 임선애, <비밀은 없다>의 이경미, <콜>의 이충현 감독을 소개했다. 당시 기준으로 전세계 영화제에서 20개 이상의 상을 받은 <벌새>의 김보라 감독이 리스트의 최상단에 올랐고, 이종언 감독이 이창동 감독의 <밀양> <시> 조감독 출신이라는 점, 박찬욱 감독과 함께 일했던 이경미 감독이 넷플릭스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의 감독을 맡게 됐다는 정보를 담는 등 선배 세대와의 연결 고리도 강조했다. <69세>는 부산국제영화제의 화제작이었다는 점에서, <콜>은 <버닝>의 전종서가 출연하고 감독의 단편영화가 호평받았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코로나19라는 복병
하지만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이같은 흐름이 훨씬 가속화될 수 있었다는게 산업 내 반응이다. 할리우드 산업이 셧다운에 들어가면서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 프로젝트들이 많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제작사 대표는 “코로나19 때문에 진행되던 것들이 모두 중단됐다”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인종 다양성이 할리우드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아시아 콘텐츠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 비백인들을 중심으로 한 콘텐츠를 준비하면서 우리에게도 제안이 들어왔는데, 전부 보류됐다.” 하지만 프로덕션이 정상화됐을 때보다 구체화될 수 있는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다. <옥자>의 최두호, 김태완 프로듀서는 봉준호 감독과 함께 <해무>의 할리우드 리메이크 제작에 참여하는데, 제작사는 <그린 북>을 만든 파티시펀트다.
<HBO>와 함께 드라마 <기생충>을 준비 중인 CJ ENM의 차기 라인업 중에는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 리메이크도 있다. 아리 애스터 감독이 <지구를 지켜라!> LA상영 당시 모더레이터를 맡은 것을 포함해 이 작품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 CJ ENM이 인지했고, 아리 애스터의 제작사 스퀘어페그와 공동 제작 형태로 리메이크를 진행했다는 후문이다. 현재 장준환 감독과 아리 애스터가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고경범 부장은 “코로나 상황이라 아직 시나리오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진정되고, 본격적인 메인 프로덕션에 들어간다면 연출자가 작업하던 음악감독, 편집감독이 함께 진출하는 식으로 더 다양한 기회가 가시화할 것”이라고 전했다. 정병길 감독 역시 “할리우드가 생각보다 관대한 곳이다. 영어를 잘하는 것보다 영화를 잘하는 게 중요하다며 부서별로 통역을 다 붙여줘서 언어 장벽에 대한 부분도 해소됐고, 한국인 스탭을 데려가는 것도 반대하지 않는다”라며 또 다른 협업의 가능성을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