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너무 다른 세 자매가 각자의 삶에 치여 바쁘게 살아간다. 돌아오는 아버지 생일에 곧 모일 예정인 전씨 자매들 사이엔 표피부터 선명하게 저마다의 불행이 새겨져 있지만, 영화가 주목하는 건 그 안에 가리워진 뜻 모를 그림자다. 유년 시절 한집에서 자라난 자매가 원가족의 뿌리를 벗어나 제각기 다른 삶으로 향할 때, 어느새 아득히 벌어진 생활상의 격차만큼이나 마음의 무덤은 깊이 패어가기 마련. <세자매>는 그 공동에 처박힌 소리 없는 말들이 어느덧 흘러넘치는 광경을 바라본다.
우리 주변에서 지금도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여성들, 희숙(김선영), 미연(문소리), 미옥(장윤주)을 연기한 세 배우 문소리, 김선영, 장윤주를 만났다. 외양에서 풍기는 분위기에서부터 진짜 자매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은근한 어울림을 풍기면서도 제각기 독보적인 개성을 잃지 않는 여자 셋의 아우라가 돈독한 수다 속에서 펼쳐졌다. 그들로부터 배우라는 직업의 타고난 천성, 그리고 기막힌 앙상블의 묘미를 실감했다. 조심스레 활기가 감돌기 시작한 새해 극장가의 돋보이는 한국영화 <세자매>는 서로 고르게 바통을 주고받는 여자들의 전력과 협심으로 힘차게 달리고 있다.
*본 기사는 <'세자매'가 된 배우 문소리·김선영·장윤주를 만나다>에서 이어집니다.
기혼 여성의 서사, 특이점을 얻다
-기혼 유자녀 여성배우 세명이 이끄는 영화라는 점을 짚어보고 싶다. 사적인 정보라 불필요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대수롭지 않은 공통점일 수 있지만 한국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캐스팅 구조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또 서사 내적으로도 기존의 시스터후드 영화들이 주로 ‘청춘’ 혹은 ‘로맨스’의 테마를 동반한 것과 달리 <세자매>는 평범한 기혼 여성들의 일상사를 소재로 한다.
김선영 정말 그렇네.
문소리 기혼 여성은 바람 정도는 나야 서사를 얻지! (웃음) 애엄마 캐릭터는 여태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늘 그려지는 대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잖나.. 그런데 이번엔 너무나 다른, 각기 개성 넘치는 세명의 기혼 여성이 그려지고 그들 각자의 아픔을 다룬다. 말하다보니 우리 영화가 또 남다른 획을 그은 게 아닌가 싶다. (웃음)
-<허스토리> <미쓰백> <내가 죽던 날> 등 최근 몇년간 주목받은 여성감독의 영화, 여성 서사의 상당수에 김선영 배우가 얼굴을 비쳤다. 바깥에서 평가하는 것 말고, 배우들이 느끼기에 여성 서사가 증가해 실질적으로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 체감되나.
김선영 말 그대로 얼굴을 잠깐 ‘비쳤지’. (일동 웃음)
문소리 에이, 신도 훔쳤다는 소문이 있던데.
김선영 하나 정도 살짝 가져갔으려나? (웃음) 질문에 솔직히 답하자면, 내 대답은 ‘전혀 아니다’다. 솔직히 아직 한참 멀었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한국영화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여성이 주체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오랫동안 익숙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훌륭한 감독들은 남자, 작가도 남자. 역사가 그렇게 흘러왔기 때문에 이 정도를 두고 변화가 체감된다고 말하긴 어렵다. 결론은 그래서 불만이라는 게 아니라 이제 조금씩, 이렇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거다. 지금의 흐름에 모두가 동조해주지도 않을 것이고 누군가는 저항도 할테지만 어느 순간 분명한 변화가 올 거라 본다. 아직은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관객으로서도 전혀 체감하지 못하겠다.
문소리 관객으로서는 그래도 훨씬 나아진 것 같지 않아?
김선영 언니는 나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영화계에서 일을 시작했으니 그 변화가 피부로 확실히 와닿을 것 같아. 난 계속 연극 바닥에 있다가 이쪽으로 온 게 이제 6년 정도라 그사이에 체감하기엔 역부족이었지.
문소리 안 그래도 아까 같이 <올리브 키터리지> <미세스 아메리카> 같은 작품들을 이야기했는데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무척 대단하고 부럽다. 참 우아한 여성 서사라는 생각도 들면서.
김선영 맞아. 넷플릭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또 어떻고.
장윤주 크. 여형사 두명 정말 멋있잖아!
문소리 <올리브 키터리지>의 프랜시스 맥도먼드를 보면서 ‘우린 반성해야돼’ 하고 혼자 무릎을 꿇었다. 무릎 꿇으면서 그렇게 쾌락을 느껴본건 처음이다. (웃음) 언니! 프랜시스 맥도먼드 언니! 정말 사랑해요! 멋있으면 다 언니 아닌가? 얼마 전에 홍보 때문에 <노는언니>를 찍었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박세리 선수에게 언니, 언니 했다.
김선영 난 언니 소리는 안 나왔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공손해지더라. (웃음)
문소리 (자매들 바라보며) 그렇게 자극받으며 ‘우린 뭘 만들 수 있을까? 우린 저기까진 아직 멀었나? 그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김선영 언니가 해요. 언니는 할 수 있어요, 난 언니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로!
문소리 하하하. 혼자선 기운이 달리니 같이하자. ‘가끔 저 감독님은 영화는 재밌는데 왜 저렇게 남자들 이야기만 하는 거야’ 싶을 때가 있다. 가만히 있기에는 좋은 작품들이 주는 자극이 아직은 너무 큰 것 같다. ‘내가 선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그 기회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빨래 개다가도 하고, 애 아침 차려주다가도 하고, 문득문득 하는데, 내가 혼자서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인가 싶기는 하다.
김선영 기득권에 있는 사람들이 움직여서 문을 열어줘야 한다. 여성 서사가 없고 여자배우들의 기회가 부족하다고 여자들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꼭 움직여줘야 할 남자감독들이 동참해야 한다.
-주연배우가 작품의 프로듀서를 겸할 때의 현장은 또 다른 분위기일 것 같다.
문소리 난 오히려 편했다. 아무리 쉽게 다가가도 현장에서 배우들이 어려워하는 분위기가 조금은 있기 마련인데, 내가 가운데서 그냥 다 펼쳐놓고 전달하는 구조가 되니까 배우들도 오히려 내게 다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장윤주 ‘이 여자 정말 일 잘하네!’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웃음) 명쾌한 소통에 속이 다 시원하더라. 언니는 타고난 데가 있다.
김선영 앞으로 내가 출연하는 영화를 다 문소리가 프로듀싱해줬으면 한다.
문소리 뭐? 하하하, 또 이렇게 칭찬을 해주네! 어디까지나 김상수 프로듀서를 도와서 공동 프로듀서로 일했기에 가능했다.
-서로를 잘 아는 프로페셔널한 여성들이 가까이에서 알아본 서로의 장점에 대해 마음껏 나열하는 순간을 마련해보고 싶었다. <세자매>에서 모이기까지 데뷔 시점과 계기, 배우로서 확장 과정이 너무도 달랐던 세 사람이 서로에게 들려주고 싶은 격려가 있다면.
문소리 <도전! 슈퍼모델> 같은 프로그램에서 심사하는 모습이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특유의 유쾌하고 털털한 모습으로 장윤주 배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에 굉장히 다른 면을 많이 알게 됐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구석도 있고, 드러내지 않는 어둠도 많은 사람이더라. 배우로서는 아주 필요하고 훌륭한 자질이잖나. 그 재능을 활용해 앞으로 좀 많이 나와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김선영 배우는 내가 보기에 유일무이한 사람이다. 배우로서 아주 집요하고 고집 센 부분도 지금 모습 그대로 쭉 지켜갔으면 한다. 선영아! 나는 왔다갔다할게. 굽었다가 휘었다가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열심히 뛰어볼 테니 넌 지금 그 길로 계속 가.
김선영 (감동해 훌쩍이며) 감독님들 계속 연락 주세요, 전 이대로 쭉 할게요. 저는 우리 문소리 언니가 앞으로도 계속 코푸로듀서(coproducer)를….
문소리 코 풀고 싶어? 하하하, 너 그 생각했지 지금? 맞지?!
장윤주 설마.
김선영 어후, 진지하게는 말 못하겠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두 사람.
문소리 이제 딱 윤주가 “저, 이제 가볼게요” 할 타이밍이다. (웃음)
장윤주 소리 언니가 연기는 당연하고, 앞으로 영화인으로서 아직 막혀 있는 부분들을 계속 뚫어주었으면 싶다. 선영 언니는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귀한 인재다. 선영 언니가 연기하는 인물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작은 역할일지언정 맛깔스러움을 넘어 속이 시원한 데가 있다. 배우로서 타고난 본능이 성실함과 맞물린 것 같다.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