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생> 제작 세기상사주식회사 / 감독 정진우 / 상영시간 104분 / 제작연도 1966년
1957년 <황혼열차>(감독 김기영)로 데뷔한 배우 김지미는 말 그대로 스타의 신전에 올랐던 인물이다. <별아 내 가슴에>(감독 홍성기, 1958), <비오는 날의 오후 3시>(감독 박종호, 1959) 등 일련의 멜로드라마에서 비운의 히로인을 체화하며 전후 사람들의 폭넓은 공감을 끌어냈다. 김지미가 유독 더 빛난 이유는 미모의 스타라는 달콤한 찬사에만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중반부터 그는 조연도 마다하지 않고 연기 폭을 넓혀갔는데, <혈맥>(감독 김수용, 1963)에서 맡았던 양공주 옥희 역이 대표적이다. 외모에 비해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영화계의 평가도 이즈음 사라졌다.
1960년대 중후반 문희, 남정임, 윤정희가 트로이카 배우군을 형성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할 때도, 김지미는 또 다른 축을 이루며 스타와 배우라는 스펙트럼 사이에서 절묘하게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갔다. 그는 비련의 여주인공과 팜므 파탈, 어떤 역할이든 범상치 않은 파토스적 에너지를 발산하며 관객을 압도해낸 배우다. <골목안 풍경>(감독 박종호, 1962), <불나비>(감독 조해원, 1965) 같은 작품에서 절박하게 자신의 욕망을 좇다 처절한 파멸에 이르는 여성을 연기한 김지미를 인식했다면 <하숙생> 역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복수하는 남자
영화는 석양이 지는 강둑길을 수평으로 잡은 화면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걷고 있는 사람을 점처럼 보여주며 시작한다(사실 오프닝 크레딧 화면이지만 크레딧 정보가 유실된 상태다). 이 화면을 배경으로 주제곡 <하숙생>이 가수 최희준의 목소리로 들린다. 한 남자가 하숙집을 찾아오는데, 그가 내려놓은 아코디언에서 카메라가 이동해 창호지의 구멍으로 트랙인하면 건너편 저택의 이층이 보임과 동시에 한 여성의 비명이 들린다. 의문의 남자가 새로 하숙집에 들어오자마자 옆집에 도둑이 드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다음날 탐문을 온 경찰은 신분증과 이름이 다른 민구(신성일)를 경찰서로 연행한다. 그는 지하실에서 취조를 당하며, 어린 시절 자기를 버린 어머니에 대한 원망, 애인의 목숨을 구하려다 얼굴에 화상을 입어 성형수술을 받고 나서 이름까지 바꾸게 된 사연을 얘기한다. 영화는 초반 10여분 동안 스릴러의 분위기를 유지하며 이야기를 출발시킨다. 사실 도난 사건은 민구의 사연을 듣기 위한 장치였고, 카메라는 그를 뒤통수와 측면에서 반복적으로 잡아내며 미스터리한 정체성을 부각한다.
민구가 하숙집으로 돌아온 후 카메라는 우사장(최남현)과 그의 둘째부인 재숙(김지미)이 있는 저택으로 이동해 둘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옆집의 민구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기 시작하는데 그 곡은 바로 영화의 주제가 <하숙생>이다. 그 소리에 놀란 재숙의 클로즈업이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것으로, 영화는 그의 복수가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민구가 연주하는 아코디언 소리는 재숙을 신경쇠약과 강박증으로 내몰지만 역설적으로 하숙집의 구성원을 묶어내는 효과를 낸다.
각자의 사연을 가진 하숙집 사람들 역시 아코디언 연주에 반응하는 것이다. 주인 송노인(김희갑)은 10년째 소식이 없는 아들이 돌아오길 바라고, 3년 전 깡패에게 남편을 잃은 여인(전계현)은 복수를 다짐하며, 소설가 지망생인 청년(오현경) 역시 그의 아코디언 연주에 영감을 받아 막혔던 이야기를 풀어낸다. 대단히 정교하지는 않지만, 내러티브가 영화 속 소설 내용과 맞물리게 설정한 것은 도전적인 구조화임에 분명하다.
학대받는 여자
재숙이 아코디언 연주자 민구를 찾아가며 둘의 이전 스토리가 플래시백으로 설명된다. 재숙은 화학도 인석(민구의 원래 이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 당선된다. 그는 실험실을 찾아온 그녀와 다투다 화학약품이 폭발하는 바람에 얼굴에 화상을 입은 것이다. 민구가 계속 인석임을 부정하자, 재숙은 그의 성형수술을 담당한 대전의 의사(윤일봉)를 찾아가고, 두 번째 플래시백을 통해 나머지 얘기가 전해진다. 재숙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살해당했다고 생각한 민구는 자살 소동 이후 마음에 면도칼을 품고 복수를 다져왔다.
전작 <초우>(1966)에서도 그랬지만, 감독 정진우는 남자의 신체를 훼손하는 것으로, 정확히 말하면 얼굴에 상처를 만드는 것으로 여성 학대의 면죄부를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초우>는 각각 정비공과 가정부라는 서로의 신분을 숨기고 데이트하는 철수(신성일)와 영희(문희)를 통해 청춘의 영롱함과 서글픔을 동시에 그리는 작품이다. 영화 후반부, 철수는 영희에게 홈세트를 선물하기 위해 돈을 훔쳤다가 행인들에게 맞아 만신창이가 된다.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 그가 자신의 신분을 털어놓자, 그녀 역시 대사의 딸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영화에 대한 평가를 주저하게 만드는 <초우>의 마지막 신은 대단히 폭력적이다. 철수는 영희를 사정없이 때린 후 머리채를 잡고 마구간으로 끌고 가 관계를 맺는다. 그의 광기 어린 격분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다시 <하숙생>으로 돌아오자. 영화는 반복적으로 돈과 그 대척점의 올바른 삶에 대해 얘기하지만, 민구가 추구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는 정확히 말해주지 않는다. 아코디언 소리가 싫은 부인을 위해 하숙집을 통째로 사버리려는 우사장의 제안을 아들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며 송노인이 거부하는 에피소드가 간접적인 설명일 뿐이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민구와 재숙은 처음부터 인생의 방향이 맞지 않았고, 민구는 자신을 절에 버린 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내면 깊숙한 곳부터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인물이었다. 러닝타임 내내 영화는 복수하는 남자와 비열한 남자가 한끗 차이임을 스스로 노출한다. 신성일의 얼굴과 그의 목소리를 연기하는 성우 이창환의 음성 또한 그렇게 느껴진다.
민구는 호텔 방에서 재숙과 같이 있는 모습을 우사장의 딸에게 보여주며 결정적인 복수를 하고, 충격을 받은 우사장의 딸은 민구의 아코디언 연주에 이어 직접 피아노로 <하숙생>을 연주해 재숙의 학대에 가담한다. 결국 그녀는 비오는 서울 도심의 야경 속에서 배회하다 정신을 잃는다. 재숙이 정신병에 걸리면서 소설/영화는 완성된다. 송노인의 아들이 하숙집 여인의 남편을 죽인 범인으로 밝혀지면서 서브플롯 역시 마무리된다.
결말부는 수미상관 구조를 완벽하게 맞춘다. 재숙은 처음 민구가 취조받던 지하 공간처럼 정신병원의 지하실 의자에 앉아 혼잣말을 되뇌고, 복수를 끝낸 민구는 아코디언을 버리고 인트로와 똑같은 황혼의 언덕길을 반대로 걸어간다. 최희준이 부르는 <하숙생> 역시 반복된다.
영화는 1966년 1월 말부터 방송한 김석야 극본의 KBS 라디오 연속극을 원작으로 4월 중순 촬영에 착수했고, 감독의 전작 <초우>에 뒤이은 6월 30일 역시 아카데미극장에서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다. 14만 가까운 관객을 모아, 남정임의 데뷔작 <유정>(감독 김수용)과 일본 현지 로케이션으로 재일 교포 북송 문제를 다룬 <잘 있거라 일본 땅>(감독 김수용)에 이어 그해 흥행 순위 3위를 차지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신성일이 분한 남자의 복수와 김지미가 분한 처벌받는 여자의 모습에 왜 그렇게까지 공감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