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어떻게 나온 기획이에요? 너무 좋은 아이디어 같아요!” 현장에 도착한 영화 및 배우 관계자들도 들뜬 얼굴로 물어왔다. 같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모여 대담을 진행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각기 다른 영화 세편의 주연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매우 귀한 그림이다. 2월에 한주 간격으로 개봉하는 <아이>(2월 10일 개봉)의 류현경, <빛과 철>(2월 18일 개봉)의 염혜란, <고백>(2월 24일 개봉)의 박하선이 서로의 작품을 함께 응원하고자 모였다. 공교롭게도 이들 작품 모두 시스템의 부재로 소외받는 사회적 약자들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이>의 영채는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자 성노동자 여성이다. 미혼모로서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은 아이를 키우면서 부딪히는 벽에 절망하며 엄마의 자격을 자문하는 그에게, 불법 입양을 권하는 브로커가 접근한다. <빛과 철>은 2년 전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자와 의식불명이 된 남편을 간호하는 여자가 우연히 공장에서 맞닥뜨리는 이야기다. 사건 당일의 미스터리를 역추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청 노동자의 산업재해 문제를 고발하는 문제의식이 ‘빛과 철’이라는 제목과도 연결된다. <고백>에서 과거와 현재의 학대 피해자들은 서로의 상흔에 공감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대한다. 특히 사회복지사 오순은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치는 여자다.
세 작품 모두 사회적 취약 계층의 현실을 가감 없이 다루며 배우들의 파리한 얼굴이 극을 떠받치지만, 염혜란은 “심각한 얘기 말고 우리 셋이 수다 떠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왔다”며 챙겨온 주전부리를 먼저 꺼내놨다. 소외 계층과 일하는 여성, 영화계 다양성에 대한 희망까지 가닿으며 진지하게, 때로는 분통을 터뜨리며, 그럼에도 내내 유쾌함을 잃지 않고 이어진 세 배우의 대화를 전한다.
*본 기사는 <'빛과 철' 염혜란, '아이' 류현경, '고백' 박하선의 무제한 토크 ①>에서 이어집니다.
배우, 물음표를 통해 성장하는 직업
-결혼 이후 박하선 배우의 필모그래피가 상당히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어요. 심경에 무슨 변화가 생겼나 싶을 만큼. (웃음) 아직 대중매체에서 충분히 재현되지 못한 기혼 여성들의 어려운 점을 디테일하게 그린 드라마 <며느라기> <산후조리원>에 이어 아동 학대를 다룬 영화 <고백>까지, 넓게 보면 소외당한 이들에 대한 작품이에요. 최근 들어 이런 작품들과 계속 연이 닿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박하선 저도 소외당해봤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에 더 공감했던 것 같아요. 며느라기 시절을 겪었고, 경력단절 문제로 힘들어했고, 아기를 낳아봤는데 생각보다 모성이 없고 키우면서 모성이 생기는 당혹스러운 경험도 했죠. 사실 그냥 재미있는 작품들을 한 거예요. 제가 미혼이었다면 이 이야기들이 이 정도로 재미있진 않았을 텐데, 일련의 사건을 경험하니까 마음이 갔던 것 같아요. 엄마가 되고 아이에게 마음이 가니까 <고백> 같은 작품에 끌린 거고요. 사실 지지난해에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많았어요. 가까운 사람이 죽고, 14년 동안 키운 개도 죽고, 애가 아파서 한달 동안 입원하고 힘든 일이 한꺼번에 다 몰려왔어요. 내일 아침 눈이 안 떠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잔 적도 있어요. 한동안 그렇게 좋아했던 등산도 못 가겠더라고요. 누가 산에서 나를 밀어줬으면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년엔 얼마나 좋아지려고 이렇게 액땜을 하는 걸까 생각하며 버텼어요. 지난해에 제가 연기한 작품들이 연달아 공개되고 바빠지기 시작하니까 또 신기하더라고요. 결과적으로 연기에 목말라 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 같달까.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해서 그렇게 힘들어했던 시간이 별거 아니었다 싶기도 하고. 배우는 선택받는 직업이다 보니 언제 또 일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있지만요.
-예전에는 30~40대 때부터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기 시작한 중년 여성배우가 작품에서 큰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지 않았던 것 같거든요. 얼마 전에 라미란 배우가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걸 보고 시대가 많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아이 캔 스피크> <걸캅스> <동백꽃 필 무렵> <야구소녀> <경이로운 소문> 등 염혜란 배우의 비상이 무척 반가워요.
염혜란 (라)미란 선배님은 진짜 오래됐어요. 저는 미란 선배님 이후로도 너무 많은 분들이 생각나고요. 이정은 배우님, 진경 언니, 황석정· 황영희 선배님…. 제가 매체에 나오기 이전부터 그런 기운이 있었고 저는 그냥 선배님들의 혜택을 받은 거예요. 선배님들이 시작할 땐 연극배우가 매체로 나오는 일도 힘들었고 벽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토대를 잘 닦아주신 덕분에 연극쪽에서 다른 배우를 또 찾아보는 일이 가능했던 거죠. 저는 전혀 새로운 케이스가 아니에요. 그리고 운이 정말 좋았어요. 나문희 선생님이랑 공연할 때 <디어 마이 프렌즈>의 노희경 작가님이 보러 오셨다가 저를 캐스팅해주신 거거든요. 작가가 직접 캐스팅하는 게 가장 좋은 케이스라고 모든 사람들이 얘기해요. 마침 육아를 하느라 연극을 쉬고 있어서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어요. 많은 선배들이 공연과 영화를 놓고 고민하다가 영화가 엎어지면서 연극도 영화도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봐서, 원래 저에겐 늘 연극이 먼저였거든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결됐으니 타이밍이 정말 좋았죠.
박하선 아이가 복덩이네요. 너무 힘이 돼요. 제 앞에 계신 많은 선배님들을 보면서 힘을 받아요. 앞으로도 할 수 있겠구나, 나이 먹어도 계속 연기할 수 있겠구나.
염혜란 지리산은 역시 겨울산이라며 갔다온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러셀 크로의 ‘러셀’에 앞 사람이 밟고 간 발자국이라는 뜻이 있대요. 눈덮인 산에서는 여기를 밟으면 낭떠러지인지 땅인지 알 수 없는데, 그때 의지할 수 있는 건 앞 사람의 발자국밖에 없다고 해요. 제가 그걸 느껴요. 선배님들이 밟은 그 자취를 저도 따라서 가는 것뿐이에요. 제 발자국은 하나도 없어요. 연기하면서 늘 고마움을 느껴요.
-<아이>를 보고 개인적으로는 류현경 배우 최고의 연기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 당시 인터뷰를 보면 “‘류현경은 너무 친근한 이미지라 역할을 맡기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나는 나대로 가야지 하고 답을 찾았다”라고 했더라고요. <아이>에서 보여준 모습이 그 결과물인가 생각했어요.
류현경 제가 그랬다고요? 미쳤었구나! 정말이지 너무 잘못된 말을…. (웃음)
박하선 저도 얼마 전에 누가 예전 인터뷰 내용을 말해줬는데 결혼하면 평범하게 살 거라고, 일 안 한다고 했대요. 미쳤었나봐요!
염혜란 그래서 인터뷰에서 하는 말을 조심해야 해~.
류현경 그동안 강요를 받았던 것 같아요. 네 연기는 너무 평이하다, 넌 너무 평범한 배우다…. 제가 뭘 안 한 것도 아니에요. 늘 캐릭터에 맞게 연기하려고 노력했거든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제가 좋아하는 것은 ‘리얼리티’예요. 어릴 때부터 설정은 극적이지만 연기하는 당사자는 주변에 있는 언니나 엄마 같을 때 푹 빠졌던 것 같아요. 영화 보는 걸 좋아한 것도 그때부터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자고 마음먹었고, 연기를 통해 무언가를 각인시켜야겠다는 생각은 배제하게 됐어요. 생생한 현실감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지 더 많이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정말 답은 못 내렸거든요? (웃음) 지금은 극적인 상황에서 강렬한 표현을 하며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연기도 하고 싶어요. 배우는 완결된 존재가 아니잖아요. 어떤 답을 내리지 않고 계속 물음표를 가지며 성장하는 사람들이에요. 이러다가 나중엔 “제가 각인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고요?”라고 하는 건 아닌지! 아니, 제가 어떤 드라마에서 “여우같이 연기하겠습니다”라고 한 적이 있대요. 어머 미쳤나봐,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지!
박하선 단언하면 안돼요. 사람은 변하니까!
-리얼함을 계속 고민하신 것도 있고, 독특한 설정의 독립영화나 단막극을 계속하신 것도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런 게 다 쌓여서 <아이>에서 보여준 연기가 나온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류현경 저는 그저 들어오는 대로 했어요. 작품을 잰다든지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단막극만의 재미가 있잖아요. 짧은 시간 안에 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담아서 해내는 게 재밌어요. 예산이 아주 크진 않지만 이 작품을 잘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모여 있는 순간이 너무 좋거든요. 그래서 저도 더 열심히 하게 되고요. 배우로서 그런 마음이 아직 식지 않고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인 거 같아요. tvN 단막극 시리즈에 참여하는 신인 작가 분들의 대본이 정말 신선해요. 어떤 대본은 지문이 아예 없었어요. 알고 보니 원래 뮤지컬쪽에 있던 작가분의 스타일이더라고요. 그런 게 전에 했던 작품들과 달라서 연기하면서 너무 신기했어요.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최근 한국영화계에 여성배우들이 메인인 영화가 현저하게 늘어나는 한편, 유의미한 성과들이 쌓이는 단계에 있는 것 같아요.
류현경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되게 희망적이에요. 제가 어릴 때 했던 역할들은 한정적이었어요. 제가 보는 작품들도 그랬고요. 그런데 이제는 여성 중심 영화를 포함해 나이, 직업군까지, 캐릭터의 다양성이 되게 넓어졌어요. 예전에 조폭영화가 유행할 때도 그건 한때의 유행일 뿐이고 다른 이야기가 나올 거라는 희망이 있었거든요. 그런 것처럼 앞으로 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염혜란 (라)미란 언니가 자기는 시대를 잘 타고나서 주인공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저야말로 그래요. 예전 같았다면 <동백꽃 필 무렵>의 홍자영은 저 같은 배우에게 맡기지 않았을 거예요. 좀더 변호사같고 인지도 있는 배우를 캐스팅했겠죠. 홍자영을 연기할 기회가 저에게 온 것 자체가 변화의 시작이라고 봐요. 요즘 멋진 여자들을 보면 되게 평범하게 생긴 사람도 많다며 제가 그 수혜를 입은 거죠. 지금 극장에 가면 <세자매> <아이> <빛과 철> <고백>까지 전부 포스터에 여배우들이 있어요. 정말 행복해요. 한편으로는 규모가 큰 상업영화쪽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죠.
염혜란 사실 <아이> 찍다가 스스로도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소아과 의사를 여자배우가 연기하는 걸 보고 ‘여자 분이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한 거예요. 대본을 보고 너무 당연하게 남자배우가 연기할 줄 안거죠. “여자배우가 할 만한 역할이 너무 한정적이야”라고 말하면서 저조차도 그런 생각을 했다니,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어요. 세상은 이미 바뀌고 있는데 제가 아직 딱딱한 생각을 했어요. 저도 이러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싶고, 하지만 이미 변화는 시작됐으니 이야기들이 더 다양해질 수 있다고 믿어요. 지금까지 여배우들이 주축이 된 작품은 주로 캐릭터가 셌는데, 다른 상업영화 보면 보통의 소시민이 등장하는 작품도 많잖아요. 평범한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들이 투자도 많이 받고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라미란 선배가 영화제에서 배척당하던 코미디영화로 주연상을 받은 건 정말 의미가 커요. 이런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어요. 지금 페미니즘이 대세라고 하니까 혹시 여성영화를 새로운 트렌드로 보며 접근하려는 건 아닐까? 그러지는 않았으면 해요. 물론 이런 접근도 다양성의 한 과정이 될 수 있고 균형을 만들어가는 데 기여하겠지만 도구로 이용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유행의 한축이 아니라 좀더 심도 있게 여성영화를 기획해간다면 분명 아주 좋은 변화가 생길 거예요.
류현경 지금 이 얘기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트렌드라고 생각하며 도구로 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박하선 요즘엔 남자감독이 연출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성감독 작품이고, 역으로 여성감독 작품이라고 예상했는데 남성감독이 만든 경우도 많아요. 젠더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할리우드도, 한국도 좋은 여성 제작자와 감독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어요. 또 한 가지 생각한 게 있어요. 영화계를 대표하는 남자배우는 정말 많은데, 여자배우는 그에 비해 적잖아요. 같은 나이대의 배우가 맡을 수 있는 캐릭터나 장르의 폭도 너무 차이가 나요. 여자배우가 할 만한 역할이 없다고 하면 그럼 예산이 작은 영화를 하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예산이 작은 작품에서도 주어지는 기회가 줄어들었거든요. 엄마가 된 여자배우들도 로맨틱 코미디와 멜로를 할 수 있어요. 영화계에서 활약하는 좋은 여성배우들이 많지만 더 많아져야 해요. 그래도 전반적으로 달라지는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2월에 한주 간격으로 개봉하는 <아이> <빛과 철> <고백>의 의미가 더욱 남다른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대화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에요.
염혜란 아, 끝나고 우리끼리 술을 마셔야 할 분위기인데 아쉽네. 각자 같이 온 회사 사람들도 있고. 나랑 현경씨는 서로 번호가 있거든요. 박하선 배우님, 번호 좀….
류현경 저도~!
박하선 선배님, 우리 다음에 꼭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