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를 기반으로 하는 영화음악의 역사에서 메인 테마는 주로 금관악기나 현악기로 연주되었다.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상징과도 같은 존 윌리엄스의 작품을 떠올려보라. <스타워즈> <인디아나 존스> <슈퍼맨>의 메인 테마 선율은 모두 관악기가 박력 있게 치고나가는 방식이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은 또 어떤가. <시네마 천국> <러브 어페어> 등 서정성으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엔 언제나 현악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강렬한 음색의 관악기와 풍부한 울림을 가진 현악기가 오케스트라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하는 건 고전시대부터 이어져온 일반적인 문법이나, 이 틀 안에서 선율과 리듬만으로 차별화를 하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는 법. 자기 복제를 거듭한다는 비판이 서서히 쌓일 무렵 할리우드의 음악계가 찾은 대안은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였다.
그의 음악에는 모호하면서도 신비로운 뉘앙스가 가득했고, 작곡가의 개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작품에 따라 완전 다른 음악처럼 들린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리고 독창성의 한가운데에 목관악기라는 비밀이 있었다. 오케스트라 안에서 수적으로도 적을 뿐 아니라 음색을 장식하는 보조적인 용도로만 쓰여왔던 목관악기를 그는 자기 음악의 주재료로 활용한 것이다.
특히 그는 플루트를 사랑했다. 플루트 연주에 능숙했고, 악기 특유의 영롱하면서도 동화적인 사운드를 잘 살려내 곡을 쓸 줄 알았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에서는 물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무려 열대의 플루트를 동원하는 파격을 선보이기도 했다. 플루트 소리가 데스플라 음악의 인장과도 같다는 건 그가 지난해 6월에 발표한 최초의 개인 앨범이 플루트 협주곡 편성이라는 점에서도 부인하기 힘들다.
플루티스트 엠마누엘 파후드와 함께 만든 이 음반에는 이미 잘 알려진 그의 히트곡이 플루트 사운드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편곡돼 실려 있다. 영화 바깥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 음악가는 이제 진정한 거장의 세계에 들어선 듯하다.
PLAYLIST+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O.S.T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에게 처음으로 오스카 음악상을 안긴 작품. 웨스 앤더슨이 만든 이 독특한 유니버스를 위해 그는 러시아의 포크 오케스트라를 활용, 원래 그 세계에 존재하던 음악인 양 완벽한 곡을 만들어냈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그리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유럽의 다양한 음악적 자양분을 섭취하고 자란 그는 ‘맞춤형’ 음악을 잘 쓰는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고질라> O.S.T
2014년 개봉한 개러스 에드워즈 감독의 작품으로, 괴수가 등장하는 블록버스터의 음악이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손을 거치면 어떻게 달라지는지 단박에 느낄 수 있다. 굉음에 가까운 관악기 사운드가 스펙터클을 끌고 가는 동시에 블록버스터 스코어에서는 잘 등장하지 않던 피아노 소리가 자주 들려 신선함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