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시절을 떠올리면 복잡한 기분이 든다. 내 경우엔 그때가 인생에서 사회생활을 가장 많이 한 시기였다. 에너지 넘치는 사람들과 가장 오래 한 공간에 있었던 시기였다. 사람의 마음을 읽기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원하는 것은 많았지만 무엇 하나에도 솔직해지지 못했던 시기였다. 현명하게 즐겁게 헤쳐나가신 분도 많겠지만 나는 그랬다.
어떤 아이들에겐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듯 보였다. 커뮤니티에는 내가 모르는 강한 규칙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끝내 체득하지 못했다. 메탈 음악을 너무 많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중학생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참하고 예쁜 부반장이 내 자리에 와서 머뭇거리다 질문을 했다. 전날 교실에서 나는 ‘너희가 혐오하는 그 야한 행위를 부모님이 해서 우리가 태어난 거야’라고 말해서 약간의 파문을 일으켰다. (인터넷도 없었던 90년대 중반 여자 중학교의 풍경입니다.) 한 독실한 곱슬머리 아이는 날 악마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녀는 일단 그게 사실인지를 다시 묻고 (내가 진짜 악마인지가 아닌 부모님의 야한 행위의 진위에 대해) 질문 하나를 더 했다. 지금 그녀가 사귀고 있는, 교회에서 만난 남자 친구도 야한 것을 보고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녀는 몹시 진지했다. 나는 당연하다며 코웃음을 쳤다. 하루 종일 생각하고 있을걸? 돌아보니 이런 부분이 문제였을까. 코웃음은 왜 쳤으며 하루 종일은 또 뭔가. 쿠션어를 썼어야 했다. 아마도, 약간은,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나도 잘은 모르지만, 이라고 하며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 그녀에 대한 연민과 위로의 말까지 곁들였어야지. 정보값이 없는 말의 소중함을 전혀 모르는 청소년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니 연애가 중요해졌다. 절대로 사랑이 아니다. 연애다. 독서실에서, 학원에서, 소개팅으로, 이런저런 남자애들을 만났다. 내가 속한 커뮤니티의 규칙은 더욱 복잡해졌고 난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잘나간다’는 개념이 중요하다는 것만은 알았다. 특히나 내 옆에 있는 남자는 잘나가야 했고 그러지 못하다면 갑자기 그가 한심해 보였으며 같은 규칙이 나에게도 적용되었다. 정글이었다.
그러다 한번은 벽돌만 한 핸드폰을 가지고 (당시의 부의 상징) 다니고 무스탕을 즐겨 입는 (당시의 세련의 상징-진짜라니까!) 키가 큰 옆 학교 남자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만나면 할 말도 없었지만 키가 크고 잘나가니까 괜찮았다. 내가 요즘 무슨 음악에 빠져 있고 무슨 책을 읽는지 이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 것은 누구와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매일 새벽까지 라디오를 듣고 헤드폰을 끼고 최고 볼륨으로 음악을 듣다 잠이 들었지만, 그때 드는 감정에 대해선 학교의 그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았다.
가십을 좋아하는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와서 말했다. 걔 너랑 자려고 벼르고 있대. 대체 이들은 모이면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가. 그래, 이런 얘기를 하지. 누가 누구를 차고, 누가 누구랑 키스를 했고, 누가 누구랑.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나는 그때부터 어떻게 해야 그와 자는 위험에 빠지지 않으면서 매끄럽게 헤어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잘나가는 남자애의 여자 친구가 되는 건 멋진 일이지만 그와 자는 건 구리다고 생각했다. 당시 ‘구리다’는 말은 정말 강력해서 모든 개념을 덮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잘나감과 구림은 종이 한장 차이였다. 나는 아주 가는 선 위를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무엇을 따르고 있고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모른 채로 계속 걸었다.
우리는 적절하게 대충 뭉개는 시간을 잠시 가지고 안전하게 헤어졌다. 그는 곧 한 학년 선배인 전 여친에게로 돌아갔는데 아마도 그녀가 그의 첫사랑이었던 것 같다. 나는 더이상 복도에서 얼굴이 뽀얀 그 선배를 마주쳤을 때 얼굴을 붉히지 않아도 되었다.
영화 <반쪽의 이야기>의 주인공 엘리 추는 미국 시골 마을에 사는 여자 아이다. 그곳은 자갈이 특산물이고 하루에 두번 기차가 지나간다. 이미 갑갑한데 더 갑갑한 사실은 엘리가 학교 유일의 동양인이라는 것과 레즈비언이라는 것이다. 똑똑한 엘리는 돈을 받고 아이들의 숙제를 대신해 주는데 선생님은 알고도 눈감아준다. 왜냐하면 애들이 억지로 한 숙제를 읽는 것보다 엘리가 쓴 글을 읽는 게 훨씬 재미있으니까. 그리고 엘리에게 동네를 떠나 좋은 대학에 진학하라고 충고하지만 엘리는 거부한다. 엘리에겐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영어를 잘 못하는 아빠 곁에 있어 줘야 하고, 돈도 없고, 겁도 날 테고. 엘리는 되묻는다. 그런 선생님도 이 동네로 다시 돌아왔잖아요. 그럼 결국 뻔한 거 아닌가요. 왜 나한테 그런 모험을 시키려고 해요. 조숙한 아이들은 모든 걸 알고 있지만 사실 하나도 모른다. 왜냐하면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이 자갈 마을에는 다양한 아이들이 있다. 마을 땅의 반을 가진 자갈회사 아들도 있고, 그의 여자 친구 애스터도 있고, 소시지 집 아들 폴도 있다. 폴은 애스터에게 반하지만 말주변이 없어서 엘리에게 연애편지 대필을 부탁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는데 이 일을 어쩌나. 엘리도 사실 애스터를 좋아한다…. 그렇게 얽히고설키는 사랑의 작대기. 감독은 그 과정을 가까이서 자세하게 따뜻하게 소소하게 그려낸다. 과장하지 않은 점이 좋았다. 하이틴영화 특유의 알록달록한 색감과 말투가 여기엔 없다.
아이들은 괜찮은 척하며 몰래 고민하고 마음을 주고받고 성장한다. 10대의 내면은 마치 팽창하는 풍선 같아서 스스로도 파악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감추려 하고 진짜 속내를 나누기 힘들어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누게 되는 순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그 기적을 잘 경험하지 못했다. 나는 고등학교 내내 항상 적절한 말을 고르고 적절한 웃음을 짓고 가끔 노래를 부르는 조금 이상한 그런 애로 지냈다. 잘 처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전학을 가게 되었다. 반 친구들이 편지를 줬다. 교생 선생님에게 보내는 강렬하지만 아주 짧은 사랑 같은 거구나. 내 전학은 심심한 아이들에게 잠시 감상적인 무드를 주는 좋은 이벤트이며 이들은 돌아서자마자 날 잊겠지. 나는 아무 기대 없이 편지를 열었다. 거기서도 잘 지내라는 말, 건강하라는 말, 다정하지만 금세 잊힐 말들이 적혀 있었다. 그러다 한 편지를 열었다. 오며 가며 인사만 하는 ‘노는 아이’가 준 편지였다. 키가 크고 마르고 얼굴이 시원스레 생겨서 인기가 많았고 나는 그를 한번도 진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친해지고 싶었지만 너는 항상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진짜 너와 얘기하지 못해서 아쉽다.
아이들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나였다. 헛똑똑이.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갑자기 밀려든 마음이 당혹스럽고 또 미안해서 펑펑 울어버렸다. 태어나서 남 앞에서 그렇게 많이 운 건 처음이었고 그 이후로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