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이만희의 첫 문예영화 '물레방아'
2021-03-22
글 :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욕망이라는 이름의 환상
물레방앗간에서 서로의 욕망을 확인하는 금분(고은아)과 방원(신영균)

<물레방아> 제작 세기상사주식회사 / 감독 이만희 / 상영시간 92분 / 제작연도 1966년

1963년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4년 <마의 계단>, 1965년 <흑맥> 등의 장르영화로 평단과 관객 모두로부터 고른 지지를 받았던 이만희는 1966년을 그의 해로 만들었다. 그해 개봉작만 <군번없는 용사>(3월), <잊을 수 없는 여인>(7월), <물레방아>(11월), <만추>(12월) 네편이었고, 제작을 완료하고 개봉을 기다리는 <사기왕 미스터 허>와 <얼룩무늬의 사나이>가 있었으며, 12월에는 <방콕의 하리마오> <냉과 열> 두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개봉한 영화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어느 하나 새롭지 않은 시도가 없었다.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으로 제명을 바꾸고 개봉)로 반공법 위반 사건을 겪은 후 만든 <군번없는 용사>는 반공영화를 본격적으로 표방한 작품이었(지만 신성일이 분한 북한군 장교를 너무 멋있게 그려 역시 문제가 되었)고, <잊을 수 없는 여인>은 처음 만든 멜로드라마, <물레방아>는 처음 도전한 문예영화 그리고 <만추>는 이야기보다 영상을 앞세운 이만희의 첫 시도였다. 놀라운 대목은 이러한 일련의 실험들이 모두 호평을 받은 것이다. 1966년의 한국영화 베스트텐(부산영화평론가협회)에는 그의 1965년 마지막 작품 <시장>을 비롯해 <군번없는 용사> <만추> <물레방아> 네편이 올랐다.

1966년 한국영화계는 <유정>(감독 김수용)의 흥행 성공을 계기로 문예영화 붐이 일었다. 문학 등 문예작품을 원작으로 한 예술성 있는 영화라는 의미의 문예영화는 예술성을 추구하는 영화 전반을 느슨하게 지칭하기도 했다. 1960년대 한국영화의 특별한 현상임에 분명한 문예영화는 산업 논리 내에서 감독들의 자유로운 미학적 시도가 가능했던 장르인 동시에 영화의 절적 향상을 위한 당국의 보상제도이기도 했다.

당시 영화계에 문예영화가 유행한 결정적인 이유는 국제영화제 출품작으로 선정되거나 관제 이벤트인 대종상의 주요 부문에서 입상하면 해당 영화사가 외화 1편의 수입쿼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제도와 맞물려 66년부터 68년까지 다수의 문예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국가의 영화 정책이 어느 정도 순기능을 만들어낸 대목으로 평가할 수 있다. 관객은 완성도가 높아진 한국영화의 출현에 지지를 보냈고, 비록 흥행에 실패하더라도 영화제 수상에 유리했기 때문에 제작사들은 감독을 믿고 예술영화에 투자할 수 있었다.

가장 독특한 문예영화 <물레방아>

신필림이 제작한 <벙어리 삼룡>(감독 신상옥, 1964)이 크게 히트하고, 김수용이 연출한 <갯마을>(1965), <유정> 등이 잇달아 흥행에 성공하며 문예영화 붐이 촉발되자, 세기상사 역시 나도향 원작 소설의 영화화를 추진한다. 이 프로젝트를 이만희가 맡으면서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가장 독특한 문예영화가 등장하게 된다. 영화 <물레방아>는 나도향이 1925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주인에게 아내를 뺏긴 머슴이 주인과 아내를 모두 죽인다는 모티브만 가져와 완전히 새롭게 창작됐다. 각색이라기보다 오리지널에 가까운 시나리오는 백결의 데뷔작이고(그는 이후 이만희의 예술영화에 함께한다), 촬영은 앞서 언급한 이만희의 작품 대부분을 촬영한 서정민이 맡아 감독의 영상미학을 뒷받침했다.

캐스팅 과정도 흥미롭다. 신영균을 방원으로 일찌감치 낙점한 이만희는 <유정>의 남정임처럼 금분 역을 신인에게 맡기기 위해 콘테스트까지 열었다가 결국 고은아를 선택했다. 금분 역에 대해 이렇게까지 고민한 것은 영화를 보면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영화계는 신영균과 고은아로 주연이 결정되자, 앞서 그 둘을 활용해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 김수용의 <갯마을>과 비교하기도 했다. 역시 외화 수입쿼터를 부여하는 공보부 우수영화 심사제의 문예영화 부문에서 <물레방아>가 <만추>에 1표차로 밀려 선정되지 않자, 영화를 제작한 세기상사가 당국에 항의했던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문예영화의 범위가 문학작품을 영화화한 영화에 한정된다는 세기상사의 주장에, 공보부는 넓게 해석해 문예·예술영화에 걸쳐 심사한 결과라고 응수한다.

환상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강변의 나루터 풍경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오른쪽 전경에 나룻배가 있고 저 멀리 한 사람이 걸어온다. 자세히 보면 배 뒤의 장대에 무엇인가 걸려 있다. 짚신을 들고 오던 남자는 발의 모래를 털고 짚신을 신는다. 그는 내리쬐는 태양 사이로 긴 막대기에 짚신이 걸려 있는 것을 본다. 개울가에서 목을 축이던 남자는 떠내려온 버선 한짝을 주워 마을로 들어간다. 풍악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니 물레방앗간 앞에서 마을 축제가 한창이다. 이만희의 전매특허라 할 대사 없이 진행되는 인트로가 일품이다. 나그네가 노파에게 젯날이냐고 물어보자 미모의 여자가 버선을 빌려달라며 다가오고 남자는 여자에게 주운 버선을 전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홀린 듯 축제판으로 들어가 씨름판에서 마을의 장사를 이기고 여자는 그 모습을 보며 기뻐한다.

이제 축제의 하이라이트다. 물레방앗간 앞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탈을 쓴 여자를 때리는 시늉을 하고, 탈을 벗겨내자 바로 그 여자다. 여자의 이름은 금분(고은아)이고, 남자는 방원(신영균)이다. 마을 노인은 여자의 행방을 찾는 방원에게 옛날에 죽은 여자의 혼을 잘못 본 거라며 이 마을은 나그네들이 발붙일 곳이 못 되니 떠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처럼 모호함으로 가득한 도입부는 영화의 에필로그와 겹치며 흥미로운 구조를 만들어낸다.

방원은 강첨지(허장강) 집에서 일하며 금분을 찾아다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른 그녀를 발견한다. 큰 비가 내리자 둘은 물레방앗간으로 들어가고 서로의 욕망을 확인한다. 금분이 쌀 열섬을 빚져 강첨지에게 곤란을 겪는다는 것을 알게 된 방원은 항아리 공장을 하는 신치규(최남현)의 머슴으로 자신을 팔아 쌀을 갚는다. 둘은 부부가 되지만 신치규는 시종일관 금분을 차지할 기회를 엿보고, 결국 금분은 물레방앗간에서 신치규와 동침한다.

매를 맞고 쫓겨났던 방원은 안개 낀 새벽 물레방앗간으로 돌아와 누워 있는 둘을 발견한다. 먼저 신치규를 낫으로 죽인 그는 금분이 자신을 거부하자 주먹으로 내리쳐 그녀를 죽인다. 그녀는 물레방앗간 앞으로 걸어 나가 숨을 거두고 마을 사람들이 와서 그녀의 시신을 옮긴다. 젯날 퍼포먼스의 정확한 반복이다. 감옥살이를 마친 방원이 젯날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 시나리오와 달리 영화는 그가 다리 위에서 쓰러지는 모습으로 끝맺는다(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 중인 당시 촬영 현장 사진을 살펴보면 수염이 덥수룩하게 긴 방원이 다시 마을을 찾아오는 장면을 촬영해두긴 했다). 이만희가 방원의 귀환 신을 들어낸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방원이 일으킨 살인 사건과 옛날부터 마을에서 전해 내려온 이야기가 맞물리며 영화 속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것이다. 또 금분은 원귀가 씐 것일 수도 있고 축제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다시 영화 초입을 복기해보자. 막대기에 걸려 있던 짚신은 방원의 것이 아니지만 방원 같은 나그네의 것일 수 있고, 방원이 주운 버선 한짝은 금분의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특히 방원이 마을에 도착하는 도입부는 시나리오로 추정컨대 인트로와 에필로그의 촬영분을 섞어놓은 것이다.

시나리오처럼, 마을로 다시 돌아온 방원이 떠도는 여자의 사연에 대해 여자를 너무도 사랑한 남편이 영원히 자기 것으로 하려고 죽였다고 설명해준다면 이야기는 닫혀버리지만, 이만희는 과감히 열어두는 쪽을 택한다. 지금 우리가 온라인에서 볼 수 있는 <물레방아>는 1981년 세기상사가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한 필름이 원본인데, 아쉽게도 영화 중반 10분과 영화의 마지막 5분 정도 사운드가 유실된 상태다. 자막으로 대사를 파악해야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만희의 데쿠파주에 집중할 수 있는 영화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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