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브랜던 크로넨버그의 '포제서'를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와 나란히 놓고 보기
2021-03-30
글 : 이용철 (영화평론가)
자본이 철학을 대신할 때
<포제서>

※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브랜던 크로넨버그의 <안티바이럴>(2012)은 조작된 혈액과 세포로 다른 인간과 연결되려는 시도에 관한 이야기다. 흥미로운 소재였으나 이야기가 겉도는 끝에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 느낌을 줬는데,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 <포제서>는 주제와 연출 면에서 훨씬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 아버지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1983)이나 <엑지스턴스>(1999)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서, 기계와 인간의 결합은 단계를 더 나아갔고, ‘왜 인간은 기계와 결합되기를 원하는가’, ‘인간과 기계의 결합은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또는 ‘인간과 기계는 어디까지 결합하는 게 가능한가’ 등의 질문을 던지게 한다. 질문 속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현실이라는 단어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와 아들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연결함과 동시에 갈라놓는다.

<비디오드롬>과 <엑지스턴스>에서 인간과 기계가 결합해 진입하는 공간은 엄밀하게 말해 현실보다 가상의 세계에 더 가까우며 그 성격도 게임의 그것과 유사하다. <비디오드롬>의 맥스 렌은 장치를 통해 들어간 세계에서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할 뿐이며, <엑지스턴스>에서 게임 장치인 포드는 척추에 뚫어놓은 바이오 포트로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포제서>와 아버지 크로넨버그를 더 긴밀하게 잇는 작품은 <스캐너>(1981)나 <크래쉬>(1996)일 것이다. <포제서>의 살인 시도는, <스캐너>에서 타인의 행동을 조종하거나 죽음과 고통을 안겨주는 인간의 초능력을 기계의 그것으로 대체한 것과 다름없다. <크래쉬>에서 온몸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자동차라는 기계와 일체의 쾌락을 이루려던 인물들의 욕망은 <포제서>에서 거의 충족된 이후다. <포제서>는 기계와 하나가 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거대한 인물보다 현실적인 주체를 앞세워

사실 <포제서>의 세계에서 인간과 기계의 결합 자체에 관해 질문해봤자 때는 늦었다. 인간은 자발적으로 기계의 세계로 들어가기를 선택했고, 기계는 견고하게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억누른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인간과 기계의 연결이 아니라, 기계로 인해 인간과 또 다른 인간이 연결된다는 점이다. <포제서>에서 지배하는 것은 살인의 규칙이다. 모종의 조직으로 살인의 의뢰가 접수되면, 살인의 설계자인 거더가 플레이어로 타샤 보스를 선택한다. 훈련을 마친 타샤가 기계 장치를 뒤집어쓰면 살인의 게임이 시작되고, 타샤의 손발 역할을 맡은 콜린 테이트의 정신 세계는 더이상 그의 것이 아니다. 이런 단계를 거쳐 살인이 벌어지는 까닭에 각 단계의 실행자는 자신이 살인에 끼어든 것으로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기계적인 역할을 형식적으로 행했다는 핑계를 지닌 거더와 타샤는 실제로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 때문에 범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물로 남는다. 콜린이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모래 한줌만큼 남은 자유의지인데, 그게 너무 미약해서 사건의 혼선 이상을 유발하지 못한다. 게다가 콜린은 살인 이후 자살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어서 죄의식은 누구의 것도 아닌 채 사라진다. 그런데 죄의식이 그런 식으로 해소되거나 제기되지 않는 것에 대해 영화는 과연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예를 들어, <엑지스턴스>에서 우연히 게임에 뛰어든 테드 피쿨은 게임 캐릭터로 바뀐 다음 자기가 행한 살인을 놓고 죄의식을 느낀다. 그리고 게임 캐릭터를 죽였을 뿐이라는 말로 넘어가려는 게임 디자이너 알레그라 겔러에게 “이게 현실이라면 당신은 살인한 것이다”라고 답한다. 표면상 <포제서>에서는 아무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제일 궁금한 건 ‘타샤라는 인물이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다. 업계에서 전설적인 스타로 불리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주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을 죽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실 세계에서 엄마이자 아내인 그는 평범한 직장인인 듯이 행동한다. 남편과 별거 중이지만 관계를 회복 중이며 어린 아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다. 그녀는 매번 출장을 간다고 거짓말한 뒤 살인 프로젝트에 뛰어든다. 이어 스파이가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이 잠시 현실 너머에서 기계와 결합해 임무를 소화한다. 뒤돌아서서 갑자기 사이코패스로 변하지 않는 한, 그녀가 왜 이런 직업을 선택했는지 알 수 없다. 사회와 가족의 영역에서 그의 역할이나 행동을 보면 그의 범죄적 본능을 의심하기란 힘들다.

타샤에게서 혐의를 찾기 힘들어지자 나는 눈길을 살짝 돌려 거더를 보기로 했다. 거더를 연기한 제니퍼 제이슨 리는 크로넨버그 부자의 영화를 잇는 배우이기도 한데, 그는 <엑지스턴스>에서 게임 디자이너인 알레그라로 나왔다. 게임 테스트를 지휘하려던 그는 등장하자마자 현장에 잠입한 테러리스트의 총을 맞는다. 테러리스트가 그를 죽이려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현실과 허구의 세계를 교란한 죄’를 뒤집어쓰는데, 그의 죽음으로 현실 세계가 구원받을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우연이겠으나 제이슨 리가 분한 거더와 알레그라는 비슷한 성격을 띤다. 거더와 알레그라는 그들이 속한 기업을 대표하는 인물인데, 극중 위계상 상위 권력자는 한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고용된 노동자이면서 착취하는 주체로도 기능하는 두 사람의 존재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시스템을 비판할 때 거대한 인물보다 현실적인 주체를 앞세우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자세는 아들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도 반복된다.

병든 영혼이 기계와 벌인 합작극

<포제서>

반철학과 무철학을 지나 크로넨버그 부자의 영화가 도마에 올리는 것은 위험한 철학이다. 진짜로 위험한 것은 위험한 철학이며, 그들에게 그 위험한 철학은 곧 자본주의다. 아버지 크로넨버그는 <코스모폴리스>(2012)에서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을 직접 비판한 바 있다. ‘쥐가 화폐 단위가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코스모폴리스>는 똑똑한 청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정보를 끌어모아 돈을 버는 것’인 시대를 개탄한다. 28살에 거대한 부를 구축한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얻기 위해 그 그림이 걸린 교회를 매입하려고 한다.

영화는 그의 회사에서 해고당한 남자가 그에게 총구를 겨누면서 끝난다. 자본주의를 구세주로 믿고 모셨던 노동자가 구세주에게 총을 쏠 수 있을까,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질문은 아들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재등장한다. 거더와 타샤는 아직 총을 들지 않은 노동자다. 생계가 되었든 행복과 안위가 되었든, 그들은 돈을 벌어야만 그것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극단적인 살인의 영역 아래로 그들을 내몰았지만, 그들은 기계의 무감각과 게임의 착각 아래 애써 죄의식을 묻어둔다.

타샤는 박제된 나비와 마주할 때마다 생명을 죽인 죄의식을 느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잔상에 불과하다. 때때로 다가오는 손 저림증의 고통은 그 손으로 행하는 나쁜 짓에 대한 경고임을 그는 알지 못한다. 그 손으로 행복했던 가족의 피의 학살극을 초래함으로써 거더와 타샤는 자본주의 가족의 비극을 쓴다. 오래전 성 어거스틴은 병든 영혼의 슬픔을 노래했다. 자본주의의 손길이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면서 철학을 대신한 시대, 병든 영혼이 기계와 벌인 합작극, 그게 <포제서>다. 그런 영혼을 소유한들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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