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문예영화의 전성기를 빛낸 김수용 감독의 수작 '산불'
2021-04-05
글 :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생존과 애욕 사이
규복(신영균)을 향한 애욕을 멈추지 않는 사월(도금봉).

<산불> 제작 태창흥업주식회사 / 감독 김수용 / 상영시간 80분 / 제작연도 1967년

한국 영화사에서 문예영화 붐은 1966년에서 1968년으로 기록된다. 외화수입쿼터를 부여하는 우수영화 심사에 문예영화 부문이 포함되었던 시기와 정확히 겹치는 것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그 유행의 본질은 정책 차원의 효과임에 분명하지만, 예술영화를 만들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훌륭한 작품들로 응수해낸 감독들의 역할 역시 간과할 수 없다. 특히 1967년은 문예영화 제작이 정점을 이룬 시기였는데, 그 중심에는 김수용이 있었다. 그의 작품은 1967년 한해만 <만선>(1월), <어느 여배우의 고백>(2월), <길 잃은 철새>(3월), <산불>(4월), <빙점>(6월), <고발>(9월), <안개>(10월), <사격장의 아이들>(11월), <까치소리>(11월) 등 10편이 개봉되었다.

그중 문예영화는 천승세 희곡을 원작으로 한 <만선>, 차범석 희곡 원작의 <산불>,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안개>, 김동리 동명 소설 원작의 <까치소리>를 들 수 있다(물론 <빙점> 역시 미우라 아야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지만 문예영화로 거론되지는 않았다). 1967년 작품 중 주요 영화제에서의 수상만 뽑아봐도 아시아영화제에서 <안개>가 감독상을 받았고, 대종상에서는 <안개>가 감독상을, <까치소리>가 제작상을 받았다. 그해 청룡상에서는 <산불>이 최우수작품상을, <사격장의 아이들>이 감독상을 받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1967년은 김수용의 예술성이 폭발한 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불>은 1962년 국립극장에서 초연하고 1963년 <현대문학>에 게재된 희곡이 원작이다. 김수용은 무대 공연이었던 원작의 양식미를 영화적으로 승화시키는 탁월한 데쿠파주를 보여준다. <갯마을>(1965)과 스타일적으로 유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촌 마을의 여성 군상을 시네마스코프 화면에 리듬감 있게 담아낸 경험도 촬영 현장에서 풍부한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시나리오가 설정하는 시공간은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1952년 3월, 지리산 깊은 곳의 한 마을이다. 영화는 곡식을 담고 있는 클로즈업 숏으로 시작해 호기심을 자극한 다음, 대나무 밭에서 마을 아낙들이 줄지어 곡식을 내는 장면을 수평 트래킹으로 잡아낸다.

카메라가 풀숏 사이즈로 들어가자 인물들의 모습이 자세하게 보인다. 남과 북에 속해 전쟁에 나간 남자들은 모두 죽고 대부분 여자들만 남은 마을, 이장이자 점례(주증녀)의 시어머니인 양씨(한은진)는 곡식을 거두다 양이 모자라게 가져온 사월(도금봉)의 모친 최씨(황정순)와 다투기 시작한다.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가득 채운 여성들은 인기척이 나자 일제히 관객석/카메라쪽을 바라본다. 최씨가 카메라 앞으로 다가와 이장집은 반동이라고 말하자, 밀치고 나온 양씨는 사월네가 곡식을 안 낸다고 하소연을 하고, 다시 사월이 점례의 남편은 국군으로 죽은 반동이라고 이르자, 점례는 누가 죽으러 가고 싶어서 간 거냐며 항변한다. 등장인물들이 카메라/빨치산을 직접 바라보며 말하는 과감한 인트로 신은 빨치산의 손만 등장해 곡식을 가져가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과감하면서도 정확한 숏의 연쇄

전경과 후경에는 빽빽한 대숲이 중경에는 여자들이 도열해 마을로 내려가는 장면에 이어, 카메라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점처럼 보일 만큼 멀찍이 떨어져 산속 마을의 전경(全景)을 잡아낸다. 영화는 전라남도 담양에서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됐는데, 영화 속 풍광을 보는 재미도 중요한 감상 포인트다. 영화의 마지막, 대숲이 타는 장면도 압권이다. 제작사가 구입한 천평 규모의 대밭에 실제로 불을 질러 촬영한 것인데, 당시 신문 기사는 감독과 배우들이 화상을 입을 정도로 위험한 촬영 현장이었음을 전한다.

마을 전경의 제시에 이어 점례 가족과 규복(신영균)의 등장, 그리고 사월 가족의 모습이 차례로 소개된다. 점례와 양씨가 싸리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오는 숏은 면을 넓게 가져가는 김수용 특유의 카메라 움직임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카메라가 두 인물을 따라 왼쪽으로 수평 트래킹하다 위치를 잡아 멈춘 후 후경의 점례가 전경으로 이동해 앉으면, 다시 후경에서 장지문이 열리며 시할아버지가 등장한다. 세 사람을 한 호흡으로 담아낸 숏은 이후 180도 가상선을 정확하게 지킨 숏-리버스숏의 기반이 되고, 다시 카메라가 점례의 이동을 포착하면서 부엌 공간이 노출된다. 그리고 왼쪽 전경에서 갑자기 남자가 출현해 점례의 입을 틀어막고 대숲으로 끌고 간다. 단 한순간도 영화는 인물의 동선과 이동과 정지를 반복하는 카메라가 결합하며 만들어지는 세련된 숏의 연쇄를 포기하지 않는다.

남자는 빨치산에서 도망나온 교사 출신의 규복이다. 도망가던 점례가 넘어져 치마가 들춰지고 규복은 그녀에게 다가가 관계를 맺는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는다. 점례의 시점으로 대숲 사이의 하늘이 보이고 카메라가 하강하면 막 섹스를 마친 두 사람이 프레임에 잡힌다. 이제 사월네로 장면을 넘긴 영화는 우는 아이 때문에 말다툼을 하는 최씨와 사월을 보여준다. 물을 길러가던 사월은 냇가에서 등과 엉덩이에 흙이 묻은 채 정신없이 물을 마시고 있는 점례를 발견하고 이상한 상황임을 감지한다.

대숲에 움막을 만든 규복은 점례가 가져다주는 양식을 먹고 또 관계를 가진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점례와 고향에 가족을 두고 온 규복 사이에 정이 깊어지고, 그는 숨어서라도 사는 날까지 살겠다며 자수를 권하는 점례의 말을 거부한다. 결국 규복의 존재와 둘의 관계는 사월에게 발각된다. 사월이 빨갱이를 숨겨줬다고 점례를 추궁하자 그녀는 남자가 국민학교 선생이라고 항변한다. 이때 규복의 행복한 과거를 보여주는 회상 신이 컬러로 처리되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화 속 현재가 흑백인 것과 대비된다.

사월과 점례는 번갈아가며 음식을 가져다주는(섹스하는) 것으로 합의한다. 움막으로 단장한 사월이 들어오자 기겁한 규복은 짐승처럼 기를 거냐며 절규하고 뿌리쳐보지만 사월의 애욕 앞에 그 역시 무너진다. 급기야 사월은 임신을 하게 되고, 점례와 규복이 관계 갖는 모습을 본 사월이 자기도 사랑해달라고 매달리면서 세 사람의 관계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인간의 본능

영화의 마지막, 처음으로 등장한 국군은 공비가 숨을 곳을 없애기 위해 대밭을 모조리 태우겠다는 단순한 작전을 펼친다. 인트로에서 안개에 싸여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연출되던 대밭이 이제 화염과 연기로 휩싸이며 대구를 이룬다. 규복이 불길을 피해 냇가로 나와 절명하며 드디어 마을 사람들에게도 그의 존재가 밝혀지고, 이때 사월 역시 아들을 앞에 두고 목숨을 끊는다. 규복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점례의 모습으로 영화는 엔딩을 맞는다.

사실 이 영화는 무거운 분위기로만 일관하지는 않는데, 이는 코미디 장르에도 능숙했던 김수용의 연출 감각 덕분이다. 사월의 임신에 관한 소문으로 최씨와 양씨가 싸우고 마을 아낙들이 말리는 장면에서 갑자기 옷감장수가 나타나 옷감을 팔아먹게 팍팍 싸우라고 말할 때가 특히 그렇고, 규복이 사월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 점례에게 항의하러 집으로 내려왔다가 시할아버지에게 들키지만 새로 온 머슴으로 알고 마는 장면도 영화의 마지막 순간과 이어지며 재치를 더한다.

참혹한 이데올로기 전쟁은 심산 마을도 피해갈 수 없었고, 그곳의 사람들은 생존뿐만 아니라 성욕의 문제에도 봉착했음을 영화는 탁월하게 묘사한다. 사실 희곡 <산불>의 영화화는 1963년 김기영 감독이 먼저 착수한 바 있다. 김수용의 작품도 훌륭하지만 김기영의 <산불>이 나왔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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