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액트리스] '파이터' 임성미 - 거짓말하고 싶지 않으니 열심히 한다
2021-04-01
글 : 조현나
사진 : 백종헌

“이미 충분히 흡수되었으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면 된다.” 대본집에 적어놓았다는 한줄의 메모만 봐도, 연기를 넘어 삶을 대하는 임성미 배우의 태도가 읽힌다. 그가 연기한 <파이터>의 진아는 탈북민 출신으로 복싱 선수의 꿈을 차근히 키워가는 인물이다. 젊은 탈북민 여성에게 가해지는 편견에 진아는 한치의 물러남 없이 맞선다. 링 안팎으로 흔들리는 진아의 호흡을 집요하게 잡아낸 임성미는 2020년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파이터>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했다.

배우 임성미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 ‘흉터 친구’ 역으로 장편 데뷔했다. 장재현 감독의 <12번째 보조사제>, 이옥섭·구교환 감독의 <연애다큐> 등을 거쳐 올해 연기 14년차에 접어들었음에도 스스로를 아직 신인이라고 겸손하게 칭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척하면서 잘하고”(봉준호), “숨 쉬듯 편안하게 연기하는 허파 큰 배우”(이옥섭·구교환)인 임성미의 내공은 그가 쌓아온 시간만큼 단단하다. 넘치거나 부족함 없이, 주어진 범위 내에서 완벽을 기하며 자신의 길을 가는 그의 뚝심이 더없이 미덥다.

-<파이터>의 어떤 점에 끌렸나.

=1인칭 시점에, 주인공 한명이 극을 완전히 이끌고 간다는 점이 좋았다. 탈북민 출신의 진아를 연기하며 분단국가라는 현재의 상황도 상기하고, 감독님이 오랫동안 고민한 부분들이 영화에 담겨 있어서 많이 배웠다.

-진아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많았는데 부담되진 않았나.

=진아는 104분 동안 퇴장이 없다. 그 호흡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부담은 됐지만 그래도 데뷔한 지 14년이나 됐는데 보여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었다. (웃음) 물론 대단한 자의식으로 ‘나의 역량을 보여줘야겠어!’ 이런 건 아니었다.

-주어진 시간이 한달 반 정도밖에 안됐다던데, 그 사이에 북한 사투리를 완벽히 익히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부동산 매니저로 등장한 이문빈 배우가 실제 연변 출신이다. 그 배우에게 특훈을 받았다. 영화 들어가기 전까지 매주 한두번은 꼭 만나서 3~4시간 넘게 입모양, 억양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체크했다. “여보세요” 한마디를 하더라도 어미를 내리고 올리는 그 미묘한 차이를, 진짜 평양 사투리를 잘 구사하고 싶었다. 내가 말하는 언어가 안정감 있게 들리지 않으면 관객이 이 상황에 몰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완벽하게 하려고 했다.

-권투 훈련은 어땠나.

=미팅 끝나고 바로 학원에 등록해서 매일 2시간씩 레슨을 받았다. 줄넘기, 잽 같은 기본 동작들은 완벽히 몸에 익혀서 현장에 가자고 마음을 먹었다. 기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술을 부려봤자 재롱밖에 안되니까. 처음 레슨을 받을 땐 바로 링 위로 올라가서 코치님이랑 맞붙고 싶었다. 근데 실력은 안 따라주고. (웃음) 마음과 몸의 균형을 맞추는 데 2주 정도 걸렸다. 코치님이 팔도 뻗지 말고 거울 속 내 눈을 바라보라고 하셨는데, 그게 너무 어려웠다. 그 자세에 익숙해지는 데도 며칠 걸렸다.

-몸 쓰는 건 좋아하는 편인가.

=좋아한다. 하지만 권투는 기존에 받던 훈련과 강도가 달랐다. 그래도 몸 연기가 참 매력 있더라. 한 만큼 보이고, 속임수가 없다.

-다른 인터뷰에서 “진아를 적극적으로 따라가려고 애쓰기보단, 진아가 자연스럽게 오게 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촉박한 와중에도 통달한 듯한 여유가 느껴졌다.

=나는 인물을 넘어서서 배우가 너무 많이 드러나면 그 영화를 안 보게 된다. 내가 관객의 입장일 때 그러하니, 내가 연기할 때만큼은 인물과 배우의 균형을 유지하고 싶었다. 욕심이 앞서면 맡은 인물이 따라오지 못할 테니 방법은 하나, 내가 물러나는 거였다. <파이터>가 그런 방식을 적용하기에 적절한 영화였다.

-<파이터>는 사실 경기의 승패보다 진아가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 맺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찾아 나가는지에 집중하는 영화다. 때문에 배우도 진아의 변화와 감정 표현에 더 집중하지 않았을까 싶다.

=말한 대로 복싱은 일종의 가이드 역할이었다. 극중 진아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다. 은연중에 열등감도 있고, 낯선 사회에 적응하려는 차에 진아를 바라보는 시선들에 대한 중압감도 있었을 거다. 부모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외로움도 존재하고. 진아 혼자 그런 정서들을 헤쳐나가야 하는 거지. 그래서 남한의 복싱 선수, 관장님, 코치님, 식당 주인, 부동산 매니저 등 인물들과의 감정을 세세하게 분리해서 접근했다. 진아 혼자 여러 다른 편견을 만난다고 생각했다.

-진아는 말로 감정을 드러내는 편은 아니다. 대신 진아의 시선이 가닿는 부분을 살피면 진아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의도적으로 눈빛 연기를 하진 않았고 먼저 진아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다. 남한의 신여성들을 바라봤을 때, 먼저 한국으로 넘어와 새 가정을 꾸린 엄마를 봤을 때 어땠을까. 그 감정을 어떻게 조율했을까. 또 진아가 그렇게 치열하게 버틴 이유는 아직 아빠가 한국으로 넘어오지 못했다는 사실과 연결됐다고 생각했다. 촬영 끝날 때까지 그런 상황을 계속 머리에 그렸다.

-진아를 떠올리면 후드티에 까칠한 얼굴과 포니테일이 바로 연상된다. 진아의 외형은 어떻게 완성했나.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끔 하는 게 목표였다. 진아의 전사나 나이, 그런 게 중요한 작품이 아니었으니까. 아직 잘 꾸미지 못하고 어리숙할 거고, 평범한데 편한 복장은 뭐가 있을까. 그렇게 해서 후드티, 청바지, 운동화,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 이렇게 정리가 됐다.

-앞서 함께한 감독들의 코멘트를 보면 ‘큰 준비 없이도 잘한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은데, 듣다보면 굉장히 성실하고 철저히 준비하는 편이다.

=주어진 상황에 대해 독서실에서 공부하듯 계속 생각한다. 시나리오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이것저것 준비하고, 현장 상황에 맞춰 가지고 있는 선택지 중 하나를 꺼낸다. 그게 현장에서는 편하게 연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어떤 배우가 현장에서 편하게 하겠나. (웃음)

-기본적으로 텍스트 해석을 중시하나.

=맞다. 글을 토대로 인물을 만나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작품의 방향성에 연기도 포함되는 거니까.

-극중 “나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는 진아의 대사가 두번 반복된다. 배우 임성미가 지속하고 있는 싸움도 있나.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엔 식욕이다. (웃음) 몸 관리를 계속 하는데 식단 관리가 정말 어렵다.

-관객과의 대화(GV)를 처음 했다고. 관객과 대면해 이야기를 나눠보니 어떻던가.

=저 배우가 어떤 사람인지 이제 조금 궁금해하시는 것 같다. 그런 점이 신선하다. 한편으로는 촬영에 열심히 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또 관객과 만났을 때 ‘이런 과정을 거쳤다’고 설명해야 하는데, 내가 열심히 해야 부끄럽지 않게 과정을 잘 설명할 수 있을 테니까. 거짓말하고 싶지 않으니 열심히 할 거다. 열심히 하면 결과는 어느 정도 따라올 테고.

-어릴 때 꿈이 코미디언이었다던데, 어떻게 연기자의 꿈을 꾸게 됐나.

=기자님, 인터뷰해보시니 느껴지지 않나. (웃음) 이런 태도로 코미디언되면 큰일날 거다. 내가 코미디로 뭔가를 할 순 없다는 걸 빨리 인정했다. 반면에 연기는 해보니 재밌었고, 질리지 않았고, 잘 맞았다. 성향이라는 게 정말 있나보다.

-<사랑의 불시착>의 장마당 상인 금순, <동백꽃 필 무렵>의 젊은 정숙(이정은), 그 밖에 <날아라 개천용>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 등 최근 크고 작은 역할로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다.

=내가 아직 드라마 시스템에 완전히 익숙해지진 않았다. 같은 연기지만 확실히 다르게 접근해야 하는 부분이 있더라. 나 같은 경우는 직접 시행착오를 겪고, 체험해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기회 닿는 대로 계속 해보려 한다. 아직 두려움이 있지만, 그렇다고 피할 생각은 없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장르나 역할은.

=영화로 이야기해볼까. <만추> <모짜르트와 고래> <베니와 준> <악마를 보았다> <델마와 루이스>. 너무 욕심부리나. (웃음) 꾸준히 연기를 한다면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내 생이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겠고 한계도 분명 존재할 테지만, 아직은 1%의 희망을 갖고 다양한 역할을 꿈꿔보고 싶다.

-올해의 목표도 궁금하다.

=아직 둥지를 틀지 못해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또 올해 가기 전에 한 작품 더 했으면 싶고. 나머지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꾸준히 해오던 훈련들을 하려 한다.

영화 2020 <파이터> 2018 <각자의 미식> 2017 <너와 극장에서> 2016 <연애담> 2015 <연애다큐> 2015 <돌연변이> 2014 <12번째 보조사제> 2014 <오늘영화> 2009 <마더> 2008 <복자>

드라마 2021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 2020 <날아라 개천용> 2019 <사랑의 불시착> 2019 <동백꽃 필 무렵> 2015 <프로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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