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는 흑산도로 유배 간 정약전(설경구)이 물고기에 해박한 청년 창대(변요한)를 만나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고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과정을 담은 흑백의 시대극이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 흑백영화, 게다가 섬에서의 촬영이 주를 이룬 <자산어보>의 제작 과정은 영화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얘깃거리로 흘러넘친다.
<님은 먼 곳에> <즐거운 인생> <박열> <변산>의 프로듀서로 이준익 감독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김성철 프로듀서, <동주> <박열> <변산>과 <자산어보>까지 연이어 이준익 감독의 영화미술을 담당하게 된 이재성 미술감독, 그리고 <변산>의 촬영감독이었던 이의태 촬영감독까지. 이들이 어떤 고민을 하며 <자산어보>를 만들었는지 제작 과정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자산어보>가 탄생한 곳, 가거댁의 초가집
흑산도로 유배 간 정약전이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집필하는 공간인 가거댁(이정은)의 초가집은 영화에서 중요한 공간 중 하나다. 제작진은 여러 여건을 고려해 흑산도가 아닌 인근의 도초도에 가거댁의 집을 지었다. 두개의 방이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가운데가 시원하게 뚫려 있어 바다가 훤히 보이는 이 집은 이준익 감독이 직접 디자인했다. 이재성 미술감독은 “언덕에서 바다를 내다볼 수 있는 집이었으면 했고, 그런 입지를 찾은 다음엔 한옥의 특징인 차경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도록 창을 내고 집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가거댁 세트를 짓는 현장에는 일반적인 영화 세트팀이 아니라 전문적으로 한옥을 짓는 분들이 투입되었다. 가거댁의 집은 현재 도초도에서 그 실물을 확인할 수 있다. 제작진은 촬영 후 세트를 철거하지 않고 도초도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김성철 프로듀서의 말에 따르면 “전라남도 신안군청에서 이곳을 일종의 관광 명소로 활용하려는 계획이 있었고, 그래서 가거댁의 집은 (보존을 염두에 두고) 처음부터 최대한 튼튼하게 지으려 했다”고 한다. 튼튼하게 집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풍광은 훌륭하지만 바람이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탓에 집이 날아가지 않도록 대비하기 위함이었다고.
음영과 질감의 멋
가거댁의 집 내부는 풍족하지 않은 살림살이를 짐작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정갈한 인상을 준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여러 번 덧댄 흔적이 보이는 창호지와 우둘투둘한 벽의 질감이다. 이재성 미술감독은 “<자산어보>에는 빤빤한 부분이 없다”면서 “일부러 한지를 덧발라 오래된 초가집처럼 보이게 텍스처 작업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자산어보>는 흑백영화이기 때문에 색이 아닌 음영과 질감으로 시각적 효과를 준 부분이 많다. 흑백영화 촬영이 처음이었던 이의태 촬영감독은 “이준익 감독이 참고하라고 언급한 흑백영화 중에는 <할복> <귀신이 온다> <거미의 성> 등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최민식 사진작가의 흑백 인물 사진들, 투박한 질감이 살아 있는 인물 사진들을 많이 찾아봤다”고 말했다.
영화를 보면 흑산도 어부들의 옷이나 인물들의 의상이 지나치게 낡고 투박해 보이는데, 이 역시 의도한 부분이다. “흑백영화에선 의상의 채도나 질감에 따라 인물이 살기도 하고 묻히기도 하더라. 화면이 단조롭지 않게 의도적으로 의상과 미술에서 질감을 추가했고 인물의 주름도 많이 살렸다.”(이의태 촬영감독)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의 표정
영화에는 수많은 바다의 표정이 등장한다. 성난 바다도 있고 해무 낀 바다도 있고, 낮의 환한 바다도 있고 달빛 받은 밤바다도 있다. 해무 낀 바다 저편으로 우이도가 빼꼼 보이는 장면은 이의태 촬영감독의 기다림이 건져 올린 장면이다. 이의태 촬영감독은 촬영 현장에 늘 작은 카메라 하나를 더 가지고 다녔다. 특별한 순간을 언제 어디서 마주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 해무 낀 바다 장면도 점심시간에 찍은 것이라고. “그날도 비가 왔는데, 점심 때 잠깐 하늘이 열리면서 해무는 남고 빛은 바다에 닿는 멋진 풍경을 보게 됐다. 가거댁 세트 마루에 앉아 있다가 운 좋게 찍었다.”
영화 초반부, 동생 약용을 그리워하던 약전이 밤바다에 빠지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에도 비밀이 숨어 있다. 흑산도의 밤바다는 마땅한 광원이 없는 공간이다. 주변에 빛이라곤 월광뿐인 공간. 바닷가 갯바위에 라이트를 설치해 촬영을 진행하기도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고심 끝에 이의태 촬영감독은 이 장면을 밤이 아닌 낮에 찍었다. “일반적으로 컬러영화의 ‘데이 포 나이트’는 파란색이 주는 힘으로 밤 신을 만드는데, 흑백영화의 경우 어떻게 표현될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조금은 뻔뻔하게, 어둠을 표현할 색이 마땅치 않아도 달이 떠 있으면 밤처럼 보일 거라 생각하고 후반작업에서 달을 CG로 만들어 넣었다.”
세번의 태풍
촬영 기간, 세번의 태풍이 <자산어보> 현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특히 도초도의 가거댁 세트가 태풍의 직접적 영향권에 들었다. 김성철 프로듀서는 “태풍이 오면 죽을 맛”이었지만 “태풍이 오지 말란다고 오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애초 세트를 튼튼하게 짓고 잘 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며 노심초사와 유비무환을 오갔던 마음을 전했다. 일단 태풍 소식이 들려오면 “도초도의 이장님과 주민들”까지 나서서 그물로 지붕을 덮고 비닐로 문짝을 감싸는 데 일손을 보탰다고 한다. 그럼에도 “문짝이 날아가고 마당이 물바다가 되는”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했다. 이재성 미술감독은 “세번의 태풍이 지나가는 동안 스탭들도 태풍에 대응하는 노하우가 생겨, 처음엔 많은 것을 바람에 날려보내야 했지만 세 번째에는 많은 것을 지켜낼 수 있었다”면서 이제는 추억이 된 이야기를 웃으며 들려줬다.
날씨와의 싸움
촬영이 이루어진 도초도, 자은도, 비금도 등이 모두 서해의 섬들이라 간만의 차가 컸고, 따라서 제작진은 물때를 잘 파악하고 움직여야 했다. 물이 얼마나 들어오고 빠졌는지 보여주는 물때표 앱이 스탭들의 필수품 아닌 필수품이었을 정도. “날씨나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도 했지만, 이준익 감독님은 최대한 그날 촬영은 그날 끝냈다. 주어진 환경 안에서 최선을 다해 최대한의 집중력으로 빨리 찍는 게 방법이라면 방법이다.” 김성철 프로듀서의 말처럼, 바닷가 장면은 대체로 촉박한 시간과 변화무쌍한 날씨와의 싸움 속에 이루어졌다.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 파도가 세게 치면 “역동적 바다”를 카메라에 담아내는 식으로 대응하고, 창대가 배 타고 바다로 나갈 때 파도를 뚫기 힘들면 스탭들이 기꺼이 바닷물에 몸 적셔가며 배를 띄우는 식으로 영화를 완성해나갔다. 참고로 창대가 고기 잡을 때 타는 작은 배는 옛날 목선을 재현하기 위해 전통 배를 제작하는 분에게 의뢰해 제작한 것이다.
포구 어시장의 진풍경
이재성 미술감독이 가장 고생한 장면으로 꼽은 건 포구 어시장 장면이다. 제작진은 생선 3t을 공수해와 자은도 해변에 실감나게 어시장을 차렸다. 김성철 프로듀서는 “미술팀과 소품팀이 고생을 많이 한 장면”이라며, “냉동 생선부터 마른 생선, 활어까지 어마어마하게 많은 생선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보니 진짜 어시장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생선 비린내와 파리 떼 역시 촬영 현장을 더욱 어시장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는 홍어, 가오리, 문어, 오징어 등 여러 바다 생물이 등장하는데, 인천과 목포의 수산시장을 돌며 각종 어류를 공수해오는 담당 제작부원이 있었다고 한다. 김성철 프로듀서는 “싱싱한 상태로 촬영해야 했기 때문에 활어의 신선도를 확인하는 게 중요했다”며 “영화가 다름 아닌 자.산.어.보니까 영화에 나오는 어패류 하나하나가 소중한 캐릭터였다”고 말했다.
흑백영화의 다채로운 얼굴
<자산어보>는 흑백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밝고 따뜻하고 생생한 느낌이 든다. 그건 영화의 주요 이야기가 흑산도에서 벌어지는데, 흑산도 장면이 유독 환하게 찍혔기 때문이다. <자산어보>의 공간은 크게 네곳으로 나눌 수 있다. 약전의 한양, 약전과 창대의 흑산도, 약전의 우이도, 창대의 나주. 이의태 촬영감독은 공간마다 콘트라스트를 다르게 가져가 분위기를 조절했다. “약전이 유배 가기 전의 초반부는 콘트라스트를 강하게 갔고, 흑산도에선 밝고 따뜻하고 정감 있는 느낌으로, 약전의 우이도는 그보다 조금 어두운 느낌으로 촬영했다. 창대의 나주는 백주에 벌어지는 부조리함을 강조하기 위해 밝게 찍었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었던 창대가 희고 깨끗한 옷을 입게 되는데, 여전히 얼굴은 어둡지만 옷은 희기 때문에 인물의 콘트라스트 역시 세질 거라 생각했다.” <자산어보>는 흑백이 얼마나 다채로운 빛을 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마술적 순간
“대부분의 스탭과 배우들이 섬에 계속 머물며 촬영했다. 감독님이 제일 붙박이였고, 두 번째가 변요한 배우였다.”(김성철 프로듀서) 촬영 중 다른 일정이 있었던 이정은 배우는 중간중간 섬과 육지를 오갔는데, 섬에 들어올 때마다 먹을 것을 잔뜩 사들고 와 사람들에게 라면과 해장국을 끓여주는 등 요리 솜씨를 뽐냈다고. 김성철 프로듀서는 <자산어보>의 현장이 “희열과 치열함이 뒤섞인 현장”이었고 특히 “거의 모든 스탭이 눈물을 흘렸던 마지막 촬영날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눈물은 촬영장에 있던 모두가 약전과 창대의 관계에 깊이 몰입한 채 함께했다는 증명이었다. 촬영감독님도 이를 꽉 깨물고 촬영하고, 이준익 감독님도 울고. 본인 촬영이 없었던 설경구 선배는 변요한 배우가 감정 잡는 데 방해될까봐 모자 뒤집어쓰고 뒤에서 촬영하는 거 지켜보고. <자산어보> 현장은 마술적 순간으로 가득한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