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영화 '어른들은 몰라요' <박화영>을 연출한 이환 감독의 영화가 그리는 10대 사회
2021-04-14
글 : 김소미

임신한 여고생 세진(이유미)은 패스트푸드점에서 시간을 때우다 동갑내기 주영(안희연)을 만난다. 의지할 곳 없는 18살 세진과 주영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가출해 거리를 떠돌던 비행 청소년들의 조우는 곧 서로의 ‘불량한’ 삶에 대한 말없는 의리와 연민으로 이어진다. 생계와 낙태를 모두 제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두 여자는 언제든 미성년자를 모텔로 유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어른들의 세계를 제 발로 맴돈다. 한끼와 하룻밤이 급급한 이들에게 무책임한 어른들의 도덕적 질타는 그저 가소로울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위협을 느끼고 모텔을 뛰쳐나온 주영 앞에 지나가던 재필(이환)의 오토바이가 멈춰 선다. 정체불명의 건달인 재필과 신지(한성수)가 불쑥 세진과 주영의 삶에 끼어든 순간 이후로 네 사람은 매일 함께 밥을 먹고 잠이 든다. 재필은 낙태하려는 세진을 도우려 애쓰지만, 가난하고 무지한 이들의 모험은 번번이 실패로 귀결된다.

이환 감독의 전작 <박화영>에서도 가출 청소년의 일원으로 등장했던 17살 세진을 배우 이유미가 그대로 연기했다. 세진의 삶을 확장하고 재구상한 또 다른 ‘거리의 이야기’인 <어른들은 몰라요>는 전작에 비해 감독 스스로 보다 “보편적이고 정서적인” 결을 지향한 작품이다.

가출 청소년 세계의 거친 면면을 극단적인 사실주의로 포착했던 <박화영>이 10대 세계의 투박한 생리와 패기, 날카로운 언어의 한가운데에 카메라를 설치했다면 <어른들은 몰라요>는 관객을 불편한 목격의 자리에 데려가기보다 드라마와 감정의 온도를 높이는 데 집중했다. 배우 이유미와 안희연은 살아남기 위해 약아빠진 10대들의 모습을 재현하면서 두 인물의 개성 또한 효과적으로 스케치해냈다. 불안정하고 반사회적인 세진과 그보다 현실적이고 성숙한 주영의 조화가 극을 균형감 있게 이끈다.

영화의 표면에는 한층 화려한 색과 조명이 채색됐다. 충동과 폭력의 연발, 끊임없는 일탈의 세계를 벌레스크적인 양식으로 담아내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세진은 보드를 타는 순간에만 자신답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보드 장면마다 트렌디한 팝 음악과 역동적인 트래킹숏을 삽입해 뮤직비디오적인 리듬을 형성했다. 배우들의 정제되지 않은 표정과 움직임들이 록볼링장, 록롤러장 등의 어지러운 사이키 조명 아래로 번쩍이는 순간, 독특한 미장센과 조명을 배경으로 약에 취한 10대들의 하룻밤을 기이하게 잡아낸 순간 역시 도전적이다. 플래시백으로 설명하는 법 없이 곧바로 이야기의 현장으로 뛰어드는 화법 또한 여전하다. 우연히 세진과 주영을 구해준 것을 계기로 자연스레 한몸처럼 어울려다니는 재필의 행동은 영화 내내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세진과 주영의 첫만남이 그랬듯, 영화는 스토리텔링으로 인물들의 당위를 만들어가는 대신 때로는 맹목에 가까운 정념을 향해 좇아간다.

이환 감독의 영화가 그리는 10대 사회는 어른들이 만든 선명한 계급사회의 그림자 세계에 가깝다. 가난하고 소외된 삶에 미성년이라는 족쇄까지 더해지면 어둠은 더욱 짙어진다. 외부 세계와의 대결이 강해질수록 내부자들의 관계와 결속은 더욱 절대성을 띠고, 관계가 곧 처참한 파국을 만든다. <박화영>에서 단짝 친구 미정을 향한 박화영의 감정이 비극을 불러낸 것처럼, <어른들은 몰라요>에서도 등장인물은 서로를 구원하거나 파괴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들이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는 마치 폭력뿐이라는 듯이, <어른들은 몰라요>는 그 엉망진창 속을 일말의 두려움 없이 첨벙거리며 나아간다. 어리석고 순수한 얼굴들의 끊임없는 일탈을 2시간 넘는 러닝타임 동안 마주하는 것은 조금 괴롭고 쓸쓸한 경험일지 모른다. 그 물리적인 체험의 시간 동안, 어느새 ‘어른’의 도덕관이나 책임감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생겨나 마음에 작은 흔적을 남긴다.

CHECK POINT

이환의 세계

괴팍한 거구의 10대 여성이 또래의 ‘엄마’를 자처하며 세상과 싸운다. 전작 <박화영>이 10대 청소년들의 폐쇄적인 내부 사회를 조명하며 주인공 박화영의 존재감을 부각했다면, 이번 영화에선 외부 세계와 대결하고 생존하기 위해 고투하는 네 청춘 인물들의 드라마가 한결 멜로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여전한 폭력 속에서, 인물들은 감정과 감각에 취한 채 몸을 내맡긴다.

이유미의 도약, 안희연의 변신

왕년의 이정현을 연상케 하는 배우 이유미의 동물적인 연기가 이야기를 힘 있게 끌고 간다. <속닥속닥> <박화영> 등을 거치며 어느덧 데뷔 10년차에 들어선 이유미는 여전히 자연스럽게 10대 연기를 소화하는 동시에 지나친 과잉 없이 인물의 비정상적인 행동과 광기에 당위를 불어넣는다. 아이돌 그룹 EXID의 센터에서 배우로 거듭난 안희연 또한 첫 연기 도전작임에도 불구하고 준비된 잠재력과 에너지를 모자람 없이 한껏 표출했다.

“우리도 살아야 되잖아요”

<박화영>의 명대사, “니들은 나 없으면 어쩔 뻔 봤냐?”는 <어른들은 몰라요>에서 “우리도 살아야 되잖아요”로 이어진다. 살아남기 위해 발칙해질 수밖에 없었던 10대들의 맹랑함, 패기, 그리고 처연함이 종종 귀에 꽂히는 대사로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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