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지금 이 순간. 너무 소중하다!”(안희연) 개봉을 앞두고 <어른들은 몰라요>의 시사회가 열린 날, <씨네21> 카메라 앞에서 이환 감독, 동료 배우 이유미와 포즈를 취하던 배우 안희연이 대뜸 탄성을 질렀다. 아이돌 그룹 EXID의 하니에서 배우로 전향한 직후, 소속사도 없이 혼자 지내던 시절에 만난 첫 작품이 <어른들은 몰라요>다. 그사이 웹드라마 <엑스엑스> <아직 낫서른> 등을 거치며 차곡차곡 배우 생활을 경험했지만, 처음 제대로 작업한 장편영화를 이제야 개봉하고 떠나보내는 일이 아직은 낯설고 어색하다. “<어른들은 몰라요>와 이별할 거라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곁에 앉은 이환 감독, 배우 이유미가 글썽이는 안희연을 따스하게 위로해준다.
<박화영>(2018) 이후 두 번째 장편영화 연출작이자 전작의 세계관을 보다 대중성 있게 확장한 작품인 <어른들은 몰라요>를 통해 이환 감독은 <똥파리>(2009)에서 증명했던 배우로서의 매력도 여전함을 보여준다. 독립영화 생태계에서 자신만의 야생을 만들고 있는 감독 겸 배우 이환, 그리고 파격적인 변신을 선보인 안희연의 새 출발 사이에서 굳건히 날 선 중심을 잡고 있는 주인공은 배우 이유미다.
<박화영>에 등장했던 17살 여고생 세진(이유미)의 스토리를 확장한 이번 영화에서 이유미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하고 낙태하기 위해 거리를 떠도는 여성을 우리 앞에 데려다놓는다. 잡초처럼 살아남으면서도 일순 제 손으로 자기 삶을 파괴해버리는 이 소녀에 관해 어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대신 비슷한 처지의 소녀 주영(안희연)과 거리의 배달부 재필(이환)이 그녀를 지키려 고투한다. 이해받으려 노력하지 않는 아웃사이더들과 그들이 속한 거친 환경을 구현한 영화 <어른들은 몰라요>. 그 세부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감독 이환, 배우 이유미·안희연에게 직접 몇몇 장면에 얽힌 기억을 물었다.
#인고의 워크숍
캐스팅부터 촬영까지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요즘 영화 프로덕션에서 오랜 사전 워크숍은 보기 드문 광경이다. <어른들은 몰라요>팀은 연습실에 모여 각자 맡은 인물에 대한 해석을 “아무런 검열도 제한도 없이 마음껏 풀어놓는”(이유미) 시간을 오래 가졌다. 안희연은 “연기 경험이 없는 나를 위해 감독님과 이유미 배우가 주영의 가족을 연기해주며 인물의 전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회상했다. 이들의 사전 워크숍은 영화를 이끄는 두 배우, 이유미와 안희연에게 각각 기록할 만한 순간들을 안기는 데 성공한 듯싶다.
<어른들은 몰라요> 속 세진은 겁먹거나 울어야 할 것 같은 순간에 내내 기이하게 웃는데, 감정을 잃어버린 듯한 미성년의 모습이 도리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대본에 인물의 말투와 웃음소리까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는 배우 이유미는 워크숍을 통해 “세진의 웃음을 다양한 버전으로 실험하면서” 디테일을 다듬었다. 한편 “실제 안희연이 가진 기존의 생각을 전부 부숴버리는”(안희연) 경험도 워크숍에서 일어났다. 주영이란 인물을 창조하려 애쓰던 안희연에게 이환 감독은 “캐릭터와 너무 붙지 말 것, 오히려 밀어낼 것, 그냥 안희연의 모습을 가져올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천변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클라이맥스 신에서 악에 받쳐 욕지기를 내뱉는 주영의 모습에서 우리가 아는 ‘하니’는 찾아볼 수 없다.
#경험과 관찰이 뒤섞인 10대의 디테일
늦은 밤,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 세진에게 또래로 보이는 주영이 다가온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이다. 자신을 도와주면 돈을 주겠다는 적극적인 주영을 따라나선 세진이 당도한 곳은 어느 전자제품 매장. 주영은 익숙하게 세진을 매장 안쪽의 화장실로 이끈 뒤 천장의 숨겨진 공간에 밀어넣는다. 둘은 그곳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자 몰래 빠져나와 물건을 훔치고, 다시 천장 안으로 들어가 아침을 기다린다.
이 독특한 디테일은 이환 감독의 고등학생 시절에 “학교에서 꽤나 떠들썩하게 회자됐던 실제 사건”이다. 감독은 남고생들의 파란만장한 스토리를 세진과 주영의 삶에 대입했다. “평소에도 10대들의 모습이 눈에 잘 보이고 그들로부터 직접적인 영감을 얻는다”는 이환 감독은 야심한 시각에 공사장에 모인 10대, 지하철 물품 보관함 앞에서 옷을 갈아입거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화장을 고치는 10대의 모습을 영화 속의 디테일로 녹여냈다.
#가출팸의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
프로듀서, 미술팀과 의정부 재개발 지역을 방문한 이환 감독은 폐가들 사이에서 로케이션 장소를 찾았다. 세진, 주영, 재필, 신지 팸이 부동산 중개업자를 속여 몰래 잠입한 허름한 빌라는 하필이면 전 세입자가 무속인이라는 설정이다. 샤머니즘적인 인테리어가 다소 오싹하고 환상적인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이 하룻밤 장면은 <어른들은 몰라요>에서 “예산이 두 번째로 많이 들어간 장면”(이환 감독)일 정도로 이미지에 공을 들였다. 게다가 아이들은 이 장면에서 밤새 약에 취해 근심을 잊으려 한다.
“연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약에 취한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하면 눈 풀린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몸의 균형을 잡아야 할까 같은 기술적인 요소를 많이 고민했다.”(안희연) 배우들의 클로즈업이 자주 쓰이는 이 신에서 이환 감독은 인물의 충동적이고 쾌락적인 행동을 기이하게 포착했다. “하나의 동작을 잡아서 단시간 내에 빠르게 여러 번 반복하도록 주문했다. 1분 동안 머리를 70번 쓸어넘긴다든가, 계속 담배를 피운다든가 하는 식으로 반복적인 행동에서 이상한 감각을 만들어내려 했다.”
#영향 아래의 소녀
학교와 집에서 버려진 소녀는 지하 공간에서 종종 활기를 되찾는다. 10대들이 어른과 뒤섞여 그들만의 게임과 유흥, 폭력을 키워나가는 반음지는 이를테면 록볼링장이다. 형형색색의 번쩍이는 조명들 사이에 있을 때 세진은 그나마 안전해 보이는 동시에 그 화려함 속에서 그녀가 가진 외로움과 공허함도 부각된다. 중반부에 졸피뎀에 취한 세진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느닷없이 틈입하는 록롤러장 신은 환상 혹은 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장면에서 세진은 또래 소녀가 보드를 타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본다.
“롤러장 장면을 연기할 때 감독님이 보드 타는 소녀를 보고 드는 감정을 그저 마음대로 느껴보라고 했다. 현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는 그저 자신이 자유롭고 아름다운 소녀로 비치기를 바라는 세진의 마음이 보였다.” 배우 이유미를 중심으로 일부 장면에서 사이키한 조명과 색감이 두드러지는 <어른들은 몰라요>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박화영>이 보여준 ‘가출청소년의 하이퍼리얼리즘’을 탈피하려는 이환 감독의 새로운 시도다. “날것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노출하기보다는 시네마틱한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과감한 조명 사용, 힙합, 세진이 롱보드를 타는 설정” 등을 도입해 색과 소리, 움직임 면에서 표현성을 높이고 관객과의 접점을 고려했다.”(이환 감독)
#가장 낯선 안희연을 만들다
아이돌 그룹으로 생활하며 대중 앞에서 잘 다듬어진 모습을 보이는 데 익숙했던 가수 하니는 <어른들은 몰라요>로 날것의 안희연을 고민했다. “그동안의 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정돈된 이미지가 생겼는데 <어른들은 몰라요>를 찍으며 그 고정된 부분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이 컸다. 주영은 거리 생활을 한 아이라서 특히 거친 느낌이 나도록 하려 했다. 촬영 기간 동안 머릿결이 안 좋아 보이도록 방치했고, 주영의 몸에 있는 문신의 위치나 도안도 감독님과 많은 상의를 거쳤다.” 안희연은 주영이 되기 위해 애써 고친 나쁜 습관 하나도 잠시 복원해야 했다. “그동안 없애려 노력했던 손톱 물어뜯던 버릇을 다시 꺼냈다.” 캐릭터를 위해 필요하다면, 배우는 종종 자신의 악습마저도 묵혀둔 일기장처럼 서랍에서 꺼내어 펼친다.
#배우 이환의 정체성
“처음부터 재필을 연기하려 한 건 아니었다. 이유미, 안희연 배우가 모두 캐스팅되어 있는 상태에서 재필을 찾기 위해 많은 배우를 만났다. 사실 다른 배우가 재필을 연기했다면 재필의 역할이 더 돋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재필이 약간 기능적으로 남아 있길 바랐다. 세진과 주영 사이에서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 인물 정도로 말이다. 감독인 내가 그 역할로 들어가 세진과 주영 사이를 이어주는 것 또한 한 방법론일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접근했다.”(이환 감독)
#감독, 배우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팀워크
“내 정서를 절제하는 대신 상대배우를 지켜보며 그들의 감정을 조금씩 찌르는 식으로 작업했다. 연출과 연기를 겸업하는 입장에서 상대배우의 반응을 끌어내고 지켜보는 과정이 아주 흥미로웠다.”(이환 감독)
“우리는 언제 친해진지도 모르게 서로에게 흡수되었다.”(이유미) 이환 감독은 워크숍 리허설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본 촬영에서는 대체로 여백을 열어놓고 진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세진과 주영, 재필 일행이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 초반 무렵에 등장하는 옷가게 장면도 그중 하나다. 세진과 주영도 보통의 또래 아이들과 비슷하게 보인다. 아무런 고민이나 걱정도 없는 얼굴로 웃음을 터뜨리는 두 여자의 장면은 짧고 유일해서 더 애틋하게 다가오는 <어른들은 몰라요> 속 작은 안전지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