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비를 닮은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에 일어난 9년 세월의 마음을 담은 작품
2021-04-28
글 : 송경원

기다림은 너를 만나기 위해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가능한 한 모든 감각을 동원해 상황을 시뮬레이션하는 와중에 마음은 점점 더 깊어간다. 그렇게 자맥질해 들어간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마주하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이유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순애보를 다룬 이야기는 대부분 성장담과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비를 닮은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에 일어난 9년 세월의 마음을 담은 영화다. 서울과 부산, 편지를 주고받는 두 남녀 사이의 시간을 따라가는 이 영화 역시 기다림을 소재로 한 숱한 이야기의 자장을 벗어나지 않고 익숙한 궤적을 따라 맴돈다.

뚜렷한 목표도 꿈도 없는 삼수생 영호(강하늘)는 습관처럼 입시학원을 다니는 중이다. 마찬가지로 삼수 중인 수진(강소라)이 영호에게 호감을 드러내며 다가오지만 낯선 만남은 부담스러울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영호는 문득 초등학교 운동회 때 넘어졌던 자신에게 손수건을 건네준 소녀 소연(이설)을 떠올린다. 갑자기 무슨 용기가 샘솟았는지 소연에게 편지를 보내는 영호. 하지만 소연은 지병이 악화되어 전신마비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다. 소연 대신 편지를 확인한 동생 소희(천우희)는 소연 대신 영호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헌책방을 운영하는 엄마를 돕던 소희는 영호에게서 묘한 친근함을 느낀다. 그렇게 편지가 오가는 사이 두 사람은 자신을 억누르던 알을 깨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용기를 조금씩 얻는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상투적이고 익숙한 클리셰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대놓고 복고풍의 감성 로맨스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영화다.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기다림을 형상화한 노골적인 소재나 다름없다. 이메일과 휴대전화를 넘어 SNS로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지금, 전달 과정이라는 시간을 부여하는 편지는 이제는 거리에서 사라진 우체통처럼 낡고 오래되어 사라져가는 것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영화가 복원시키려는 낭만은 명확하다. 문명의 이기가 비어 있는 시간을 허락지 않고 자꾸만 지워내고 단축시키려고 할 때 우리가 잃어버린 것, 아련한 감성을 되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영호와 소희가 주고받는 편지는 물론 가죽공방을 운영하는 영호의 아버지, 헌책방을 운영하는 소희의 어머니 등 주변 인물과 소품들이 모두 애틋함이라는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중심에 다름 아닌 ‘비’가 있다.

영화는 영호의 삼수생 시기인 2003년과 어엿한 우산공방의 장인이 된 2011년을 오가며 진행된다. 소희는 만나길 바라던 영호에게 “12월 31일에 비가 내리면 옛 초등학교 자리로 너를 만나러 가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영호는 12월 31일이 되면 우산을 들고 비를 기다린다. 전체관람가가 증명하듯 영화는 순수, 선의, 꿈, 낭만 같은 단어들로 써내려간 수필집 같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아련한 로맨스를 되살리고자 하는 의도는 이해가 가지만 방식들이 지나치게 낡고 오래됐다. 옛 정서를 살린다고 연출까지 예전 것을 따올 필요는 없는데, 이 영화는 복고‘풍’이라기보다는 감성을 비롯해 연출, 스타일까지 그냥 80, 90년대 영화(혹은 TV드라마)에 머물러버린다.

대사는 요즘 보기 힘들 정도로 문어체이고, 상황은 시종일관 내레이션이나 대사로 설명되며, 인물들의 동기나 사건 역시 우연에 기댄다. 무엇보다 캐릭터들이 지나치게 교과서적인 순수함으로만 뭉쳐 있어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어두운 구석이 있어야 밝은 희망이 빛나는 법인데 시종일관 유아적인 세계관에서 만들어진 순수를 강요하다보니 공감보다는 실소가 먼저 나온다. 좋은 의미, 나쁜 의미 양쪽에서 요즘 보기 드문 순진한(혹은 그러고 싶은) 영화다. 비 내리는 풍경 속에서 ‘또닥또닥’ 소리를 발견할 수 있는 감성의 소유자라면 코드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CHECK POINT

비와 음악의 이야기

동명 제목으로 유명한 부활의 명곡 <비와 당신의 이야기>와는 의외로 관계가 없다. 반대로 그만큼 이 영화가 비와 추억, 기다임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말이기도 하다. 대신 여행스케치의 <옛 친구에게>를 비롯해 비와 관련된 추억의 노래들이 선물처럼 등장한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복고풍의 음악들이 비처럼 촉촉한 감성을 채워줄 것이다.

<H2>에서 <시월애>까지

기다림을 모티브로 한 영화들의 클리셰를 피해가기 어려우니 반대로 정면 돌파를 택한다. 기다림이란 결국 수신자와 발신자 사이가 어긋날 때 발생하는 법. 영화는 여러 가지 장치로 두 사람의 만남을 엇갈리게 만들며 관객을 추억 속으로 초대한다. 시간을 초월해 편지를 주고받는 <시월애>(2000)는 물론 엇갈린 편지의 주인에 얽힌 영화 <러브레터>(1995), “기다리는 시간까지 데이트의 일부니까”라는 만화 <H2>의 명대사가 생각나는 장면까지, 기다림에 대한 잠언 같은 순간들로 가득하다.

그들 각자의 이야기

영호와 소희의 이야기가 중심이지만 주변 캐릭터들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다. 특히 영호를 좋아하는 솔직, 당돌, 발랄한 수진 역의 강소라 배우의 경우 특별 출연임에도 주연 못지않은 분량과 풍성한 에피소드를 자랑한다. “<미생>에서 호흡을 맞춘 강하늘, <써니>에서 함께했던 천우희 배우와 다시 한번 작품을 통해 만나고 싶어서 출연을 결정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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