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비디오게임을 가져다 적당히 영상으로 각색해 팔아먹어보고자 했던 영화계의 시도는 마치 게임 오버를 반복하는 초보 게이머처럼 비슷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며 지금껏 이어져왔다. 저 끔찍한 우베 볼의 영화들은 논외로 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무수한 실패 사례를 손쉽게 떠올릴 수 있다.
가장 게으르고 끔찍한 방식은 대전격투 게임을 영상으로 만들어보려는 시도였던 것 같다. 대개는 이름 모를 섬이나 깊은 산속 신전 같은 곳에 게임 캐릭터 분장을 한 배우들을 모아놓고 싸움 붙이는, <용쟁호투>를 적당히 베낀 듯한 구성이다. 어차피 쌈박질 구경이 목적이니 줄거리는 아무렴 어떠냐는 식. <모탈 컴뱃>이나 <데드 오어 얼라이브> 같은 영화가 그랬다. 더 앞선 시대의 작품인 <스트리트 파이터>는 별의별 버전이 다 있었던 것 같다.
반면, 내가 가장 괴상하다고 생각했던 기획은 <배틀쉽>인데, 왜냐하면 이 영화의 원작은 보드게임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체스 게임 수준의 단순한 규칙 몇줄이 전부인 낡은 게임. 다시 말해, 스토리라고 할 게 아예 없는 게임이란 말이다. 제작진은 이 말도 안되는 원작을 재료로 해 미 해군과 외계 우주선이 바다에서 포격을 주고받는 스펙터클한 SF영화를 만들어냈다.
구미가 당기시는지?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다. 나야 이 영화를 꽤 좋아하는 편이지만, 보편적으로 사랑받을 만한 영화는 아니니까. <배틀쉽>의 전례 때문은 아니겠지만 <램페이지>도 비슷한 착상으로 기획된 영화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설프게 게임 스토리를 각색한 경우보다 차라리 백지에서 내러티브를 쌓아올리는 편이 오히려 그럴싸한 결과물을 보여준다니.
물론 성실하게 게임의 내러티브를 가져다 영화를 만들어보려 했던 시도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경우 대개는 원작 팬과 영화 팬 중 한쪽, 혹은 양쪽 모두에게 심한 혹평을 들어야 했다. <윙 커맨더>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 <히트맨>, 최근에는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과 <어쌔신 크리드>가 고배를 맛봤다. 그나마 성공작이라고 부를 만한 작품을 꼽자면 안젤리나 졸리 버전의 <툼레이더>와 밀라 요보비치가 주연한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 정도인데, 슬프게도 이 두 작품은 캐릭터와 일부 설정만 활용했을 뿐 줄거리는 완전히 새로 쓰여졌다. 게임의 내러티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례는 아닌 것이다.
대체 왜일까? 사람들이 그토록 칭송하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스토리를 보여준다는 소위 AAA급 대예산 게임조차도 왜 정작 스크린에 옮겨놓으면 참패를 면치 못하는 걸까? 그건 게임의 내러티브 구조가 영화와는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게임의 시나리오는 게임 플레이에 몰입하는 것을 첫 번째 목적으로 한다.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임무-해결-보상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주인공 한 사람,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구조다. 이걸 영화로 옮겨놓는 일이 쉽지 않은 건 당연하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최근 웹툰이나 웹소설을 영상으로 각색하는 흐름에도 조금 회의적이다. 이들 콘텐츠도 매체의 특성상 어느 정도 게임과 유사한 구조를 띠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게임을 각색하는 대신 게임의 좋은 재료들만 따다 영리하게 영화를 만들어보려는 시도도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디스트릭트 9>은 여러 SF 게임의 액션 요소들을 적절히 활용한 수작이다. <주먹왕 랄프>나 <레디 플레이어 원>처럼 비디오게임 문화 전반을 넓게 오마주하는 전략도 유효했고.
그러던 중 누군가 이런 생각을 했다.
어설프게 게임을 영화의 형식에 구겨넣으려 노력하지 말고 아예 게임의 내러티브 경험 방식을 고스란히 화면에 옮겨놓는다면 어떨까. 바로 이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SF영화가 하나 있다. 바로 <하드코어 헨리>다.
<하드코어 헨리>는 <하프라이프>나 <콜 오브 듀티>로 대표되는 내러티브형 1인칭 슈터(First Person Shooter) 장르 게임의 연출 방식을 완벽하게 모사하고 있다. 해당 장르의 게임이 그러하듯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1인칭으로만 진행되며, 우리의 주인공은 순차적으로 주어지는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쏟아지는 적들을 총으로 쏘아죽인다.
영화가 차용한 것은 단지 1인칭 액션뿐만이 아니다. 기억을 잃어 인격적으로 백지상태인 주인공, 목을 다쳐 말을 못하는 설정, 상대에게 총을 겨누거나 손짓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제스처, 심지어 서랍에 총이 보관되어 있는 모양새까지도 모두 1인칭 슈터 게임의 표현 형식 그대로다. 덕분에 관객은 1시간30분 동안 현존 최고의 슈퍼컴퓨터로도 구현할 수 없는 실감나는 그래픽과 복잡한 액션으로 가득 찬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가감 없이 펼쳐지는 압도적인 액션 장면을 통해 우리는 게임이라는 매체가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의 한계를 미리 체험해볼 수 있다. 그리고 게임 속에서 이루어지는 폭력 행위들이 실제로 얼마나 거칠고 잔혹한 일인지도 함께.
실험적인 방식을 도입한 만큼 단점도 분명한 영화다. 쉼 없이 이어지는 액션 장면의 쾌감은 유니크하지만 동시에 심각할 정도의 피로감을 동반하는 것도 사실이다. 시청하는 내내 두통과 현기증이 뒤따르는 탓에 나는 몇번이나 휴식을 취해야 했다. 결말에 이르러서는 제발 어서 영화가 끝났으면 싶을 정도로. 게임의 내러티브를 그대로 따르는 탓에 지루한 임무-해결 구조를 답습하는 문제도 여전하다. 허겁지겁 문을 닫는 결말도 아쉽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수위 높은 고어 묘사와 지나친 선혈, 부도덕한 폭력과 불쾌할 정도로 선정적인 장면을 보고 있자면 솔직히 짜증이 샘솟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중반부에 의미 없이 삽입된 ‘강간범 응징’ 장면은 많이 끔찍하다. 성폭행 묘사로 포르노적 욕망을 채운 뒤 범인을 처절하게 응징하는 모습으로 주인공의 마초성을 정의롭게 포장하기까지 하는 너절한 연출은 이제 제발 그만 보았으면 한다.
연출 방식뿐 아니라 SF 장르 면에서도 즐거운 요소들이 많은 영화다. 저예산으로도 훌륭히 구현한 사이버펑크 무대가 특히 좋았다. 매끈한 금속 질감의 화려한 세트에 LED를 도배하는 식의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지도 않았고. 현대 러시아의 도시 풍경 위에 과하지 않게 살짝 얹어진 SF 오브젝트들은 정말 매력적이다. SF 게임 팬이라면 각각의 요소가 어떤 게임에서 가져온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패러디들이 쏟아진다.
초능력자 악역 아칸과 주인공 헨리에 관한 뻔하지만 흥미로운 설정들도 재미있다. 특히 죽어도 죽어도 다시 등장해 주인공을 돕는 미스터리한 인물 지미는 정말 흥미로운 캐릭터다. 특히 지미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실로 환상적이다. 배역을 맡은 샬토 코플리의 다채로운 연기가 아니었더라면 이 영화는 지금보다 훨씬 지루했으리라.
마지막으로 경고하건대, <하드코어 헨리>는 분명 위험하고 잔인한 B급영화다. 상상 이상의 폭력 장면과 저급한 마초이즘으로 도배된 영화이기도 하다. 절반의 끔찍함과 절반의 쾌감. 대담한 실험정신과 낡은 남성성이 공존하는 이 독특한 작품을 과연 여러분에게 추천해야 할지 추천하지 말아야 할지. 마지막 문장을 키보드로 두드리는 이 순간까지도 나는 심각한 갈등에 시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