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원래 후회 같은 거 안 하는데요." 신명고 야구부의 에이스 광호(정재광)는 자신이 프로야구 드래프트 선발전에 떨어질 거라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광호의 이름은 불리지 않고,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광호는 불안해진다. 절박해진 광호는 야구를 계속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불법 휘발유 판매에 가담한다. “야구 경기의 룰조차 몰랐다”는 배우 정재광은 처음으로 야구 배트를 잡고, 공을 던지고 땅바닥을 구르며 광호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정재광은 자신의 입시 시절을 떠올리며 “특유의 불같은 에너지”로 광호의 절박함을 그려냈다.
단편 <수난이대>로 2016년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스타상을 수상한 뒤 정재광은 영화 <버티고>에서 로프공 관우를,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전직소방관 주정태를 연기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낫아웃>의 광호를 통해, 정재광의 얼굴은 관객들에게 새롭게 각인될 것이라 확신한다.
-야구의 룰도 모르는 상황에서 작품 준비를 시작했다고.
=그래서 유튜브로 경기와 선수 인터뷰를 찾아보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준비 기간이 한 달 정도 주어졌는데 야구 학원에 다니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야구 연습만 했다.
-해보니 소질이 좀 있던가.
=괜찮았다. 야구 학원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다. (웃음) 첫 주에는 자세 잡는 연습만 했고, 차차 슬라이딩, 공 잡는 법을 배웠다. 2주 정도 남았을 때부터 타구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공이 무서워서 피하고, 잘못 피해 공에 맞기도 하면서 연습을 했다. 짧은 기간 동안 배트를 5개 정도 부러트렸는데 그 장비를 다시 준비하면서 광호의 상황이 이해됐다. 장비가 없으면 연습 자체를 할 수 없으니까 경제적 지원이 간절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더라.
-광호에게 공감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겠다.
=여러모로 애정이 많이 갔다. 하지만 상황상 관객들에게 비호감으로 비칠까봐 걱정이 됐다. 그래서 감독님께 촬영 중에 너무 비호감으로 느껴지면 바로 말씀해달라고 했다.
-광호 특유의 뚱한 표정이 있다. 덩치 큰 야구팀 에이스인데, 억울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지을 때마다 아직 앳된 소년이라 느껴졌다.
=뭘 모르는 애 같지 않나. (웃음) 너무 나쁜 아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표정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이정곤 감독이 처음부터 광호 역에 정재광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던데.
=2016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감독님이 내가 출연한 <수난이대>를 보시고, 나중에 같이 야구 영화를 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로부터 4년 뒤에 감독님이 본인 결혼식 전날에 갑자기 오시겠다는 거다. 청첩장을 주시려나 했는데 ‘4년 전 약속 기억하냐’면서 완성된 시나리오를 건네주셨다. 잠시 멍해졌다. (웃음) 다음날 결혼식 뒤풀이 자리에서 영화에 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들었다.
-광호를 준비할 때 모티브로 삼은 인물도 있나.
=크랭크인 전에 고교야구부 전국대회를 많이 보러 다녔다. 그때 한 친구가 눈에 띄었다. 4번 타자에 유망주고 몸도 좋은데 친구들과 대화할 땐 한없이 아이 같았다. 야구 외엔 관심사도 없다더라. 굳은살 가득한 손을 보면서 광호 같다고 느꼈다. 그 친구를 만난 뒤로 인물을 해석하는 데에 확신을 가졌다. 광호의 몸짓을 연구할 땐 <폭스캐쳐> 채닝 테이텀의 강박적인 움직임을 많이 참고했다.
-이정곤 감독이 삭발에 전신 태닝까지 요청했다고.
=그래서 평일엔 야구 연습하고 주말엔 태닝하고 수염을 왁싱하러 다녔다. 광호는 19살인데 나는 촬영 당시 31살이었거든. (웃음) 매일 네 끼를 먹고 근력 운동을 하며 살도 25kg가량 찌웠다. 광호 내면엔 감정의 응어리가 깊이 자리하고 있지 않나. 몸이 단단해지면서 그런 에너지가 자연스레 생겨나더라. 신기한 경험이었다.
-광호는 야구팀원들과 코치, 아버지 등 여러 인물과 갈등을 겪는다.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게 주요했을 텐데.
=감정 신이 워낙 많아서 프리 프로덕션 단계부터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감정을 잘 배율 하려고 노력했다. 촬영 감독님이 워낙 인물에 깊이 매료되시는 분이라 카메라 안팎으로 나를 완전히 광호로 바라보셨다. 현장 스텝들도 광호를 응원하는 게 느껴져서 몰입하는 데에 도움이 됐다.
-광호는 낮에는 야구를 하고 밤에는 가짜 휘발유를 배달하는 일을 한다. 낮과 밤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느낌이 들진 않았나.
=감독님이 자크 우디아르 감독의 <예언자>를 추천해주셨다. 주인공인 말리크는 교도소 모범수로 있을 때와 사회에서 일을 할 때의 얼굴이 완전히 다르다. 말리크처럼 광호도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주려고 했다.
-실기시험을 치룰 때 광호가 공을 잡기 전, 땅에 발을 비비며 준비 자세를 취한다. 그게 굉장히 능숙해서 디테일함을 잘 잡아내면서도 몸을 잘 쓰는 배우라고 느꼈다.
=의도적으로 넣은 제스처다. 광호는 여기서 승부수를 내야 하는데 코치가 일부러 공을 이상하게 던지지 않나. 어떻게든 받아내겠다는 간절한 심정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했다.
-광호가 아버지에게 한 번만 도와달라고 요청하며 "나 야구 잘했어, 못한 거 아니야!" 하고 외친다. 감정적으로 가장 힘든 신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입시하던 시절이 떠오르더라. 그 때 중앙대를 1지망으로 썼는데 선생님이 네가 무슨 중앙대냐며 만류했었다. 독기를 갖고 ‘반드시 붙어야지’ 다짐하면서도,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싶은 불안감이 공존했다. 그 두 마음이 광호의 상황과 맞닿았다. 촬영 당시에 몇몇 스텝들도 울었다. 다들 자신의 입시 시절이 떠올랐다고 했다.
-가장 신경 쓴 대사에 관해서도 말해준다면.
=코치님께 "나 어디로 가요?"라고 묻는 대사. 그 대사가 광호라는 인물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촬영 준비하면서 광호의 입장에서 일기를 썼는데, 그 신을 촬영할 때 도움이 많이 됐다.
-<낫아웃>은 본인에게 어떤 영화로 남을 것 같나.
=다시 군대에 간 기분을 느끼게 해준 영화? (웃음) 그만큼 힘들게 촬영했고, 그래서 광호가 내게 오래 남을 것 같다. 배우로서도 큰 산을 넘은 기분이 든다.
-또 어떤 역할에 도전해보고 싶나.
=너무 많은데. 액션, 코미디, 멜로, <낫아웃> 같은 성장 영화도 다시 찍어보고 싶고. 최근엔 장르물에 관심이 많다. 장르물을 통해 하나하나 완성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차기작은 유하 감독의 신작 <파이프라인>과 JTBC 드라마 <알고있지만,>이다.
=<파이프라인>에선 도유꾼 핀돌이(서인국)를 쫓는 순경 상구를 연기한다. 배유람 배우와 콤비로 나오는데 둘의 모습이 마치 덤 앤 더머 같다. <알고있지만,>에선 오지랖 넓은 조소과 조교로 등장한다. 피부도 하얗고 안경까지 써서 못 알아보실지도 모른다. (웃음)
-바쁜 2021년을 보낼 예정이다. 남은 한 해의 목표가 있다면.
=뭐가 됐든 저 자신을 잃지 않고 잘 지키고 싶다. 오디션에 떨어지든 아니든, 작품이 잘 되든 되지 않든 주저앉지 않고 내 발걸음에 맞춰 가고 싶다. 그게 올해의 가장 큰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