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인물들이 전투를 벌이는데 그 속에 나를 위한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어쩐지 표면적인 투쟁 아래 다른 이야기가 흐르는 것만 같다. 이 두 번째 투쟁에 관해 말하기로 한다. 너무 잘 보여서 보지 못한 그것에 관해서.
시선으로부터의 도피
프랑스의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국기를 어깨에 두르거나 손에 들고 페이스 페인팅한 사람들이 곳곳에 모여든다. 이윽고 커다란 함성과 함께 사람들이 뛰쳐나오고 거리는 온통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인파들로 북적인다. 레주 리 감독은 <레 미제라블> 오프닝 시퀀스에서 월드컵의 응원 열기를 담는다. 그런데 이 풍경 속에서 이들이 흥분하는 원인을 확증할 수 있는 근거로서의 이미지는 단 한컷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 흔한 축구 경기 장면 인서트조차 없다.
오프닝 시퀀스 속 상황으로부터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는 월드컵이 한시적인 이벤트여서가 아니라 이들의 행위가 그것의 목적으로부터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응원의 행위는 모니터, 전광판과 같은 물질적 근거를 잃어버린 채다. 궁극적으로 이들이 모인 이유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들은 여기에서 무엇을 하는 것인가.
사람들이 마주 보고 선 곳에는 에펠탑과 개선문 등 프랑스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보인다. 새삼 건축물의 상징성에 주목해야 할까. 그러나 건축물들은 다른 많은 역사적 유물처럼 오늘날 유명한 관광 상품이 됐을 뿐이다. 건축물은 거리에 넘쳐나는 프랑스 국기들처럼 그저 프랑스를 상징적으로 반복하는 기표일 뿐이다. 목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행위들은 해석을 기다린다. 그들은 지금 축구를 응원하는 것인가 혹은 혁명을 하려는가. 놀이인가 시위인가. 판단 불가한 군중의 집합은 곧장 현실의 반영이라고 단언되곤 한다.
이것은 오늘날 혁명에 관한 코멘트이며 혁명의 느슨함을 은유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닐지라도 그것은 너무도 익숙해서 더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분석일 뿐이다. 목적을 잃은 상황은 최신 업데이트된 현실 진단처럼 보이지만, 그런 현실 분석쯤은 예술 작품의 역사 속에서 쉽게 발견된다.
사뮈엘 베케트가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1952)에서 고도가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은 채 그를 기다리는 이들만을 보여주면서 목적 상실과 그 가운데에서도 작동하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보여주었다. 같은 해에 존 케이지는 연주하지 않는 방식의 피아노곡 <4분 33초>를 작곡한다. 연주의 시간은 관객의 기다림과 초조함과 웅성거림과 같은 다양한 소리로 채워진다. 목적 상실과 그 이후에도 작동하는 부스러기로서의 행위는 예술 작품 속에서 여러 버전으로 반복되었다.
나쁜 농부라는 은유
목적 상실은 현재적 진단이기보다 과거의 메아리다. 그렇다고 새삼스레 손을 뻗어 저기에 우리의 목적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봉준호는 <기생충>(2019)에서 미처 존재를 깨닫지 못한 암흑을 벌레스크적 방식으로 소생시킨다. 누군가는 암흑 속에서 출몰하고, 누군가는 암흑 속으로 굴러떨어진다. 비어 있는 통로에 보이지 않는 문이 존재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어두운 문을 통과해 부활하거나 문에 부딪혀 떨어져 사라진다. 목적은 인물들과 함께 시시때때로 모습을 바꾸며 문을 드나든다.
레주 리는 두 가지 시도를 한다. 목적을 만들어내기, 그리고 목적을 이동시키기. 여기 하나의 목적이 있다. 그것은 쪼그라든 모양새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서커스단 홍보용 트럭을 타고 마이크를 통해 험악한 경고를 송출하며 도시를 헤집는다. 그들은 조지가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 경우 살인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조지가 누구인지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분위기상 중요한 인물이 실종되었다고 짐작할 뿐이다. 조지가 동물원의 새끼 사자로 밝혀지는 순간, 상황은 지독한 농담 같은 소동극으로 변한다. 새끼 사자가 실종된 것이 대단치 않은 것이 아니라, 상황의 심각함을 감당하기에는 난감한 대상이란 거다.
물론 동명 소설과 연상 작용 속에서 ‘고작’ 새끼 사자 실종 사건이 낳게 될 파국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혹은 사자가 더는 새끼가 아니었을 때 벌어질 위협을 내다보게 된다. 어떤 방식이든 이것은 불길한 방향으로 확장될 것이다. 새끼 사자 실종 사건은 서커스단과 마을의 시장,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관, 사자를 보호 중인 소년과 이들을 보호하는 이슬람 커뮤니티 등 다양한 집단이 얽혀드는 복잡한 국면으로 변한다. 성장할 새끼 사자처럼 본래의 목적이 다른 방향으로 성장해 뻗어나가는 것은 불가피하다.
영화에서 인용되는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중 한 대목은 이것이다. “세상에는 나쁜 풀도 나쁜 사람도 없소. 다만 나쁜 농부가 있을 뿐이오.” 이는 풀도 사람도 개별자로 있을 때는 악하지 않지만, 그것이 집단을 형성하고 다른 집단과 만날 때 이기주의와 은폐와 악이 시작됨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제 막 이곳 몽페르메유에 전근 온 스테판(다미앵 보나르)은 경찰과의 충돌로 얼굴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소년 이사(이사 페리카)를 위해 최소한의 응급처치를 한 유일한 어른이다. 그러나 그도 결국 집단을 우선하는 경찰 조직의 논리에 순응하고 만다. 바깥에서 볼 때 그 역시 한 사람의 시민보다 집단의 논리를 우선시한 경찰 무리일 뿐이다. 빅토르 위고의 글은 실제적인 것에 더해 해석의 차원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실제 나쁜 농부는 없을지라도 우리 눈에 나쁘게 보인다.
사건을 중재해야 할 경찰이 아이들을 감당하지 못해 고무탄을 발사한 사건은 새끼 사자 실종 사건에 이어 새로운 목적성을 획득한다. 목적의 탄생은 어디선가 나타난 드론을 통해 선언된다. 드론은 사건을 해결해야 할 경찰이 사건이 되었음을 확증하는 목격자이자, 경찰에 의해 발각되면서 스스로 하나의 목적이 된다. 드론에 의해 실수(혹은 범행)가 노출되었다는 사실보다 경찰들을 압박하는 건 시선을 관장하던 그들의 위치를 드론에 빼앗겼다는 데 있다.
앞서 등장한 순찰 장면에서 경찰은 마을을 관장하는 시선의 주인임을 드러낸다. 경찰들은 순찰차 안에서 시민들로부터 일정 거리를 확보하며 시민들의 시선을 피해 감시 활동을 벌인다. 그 과정에서 경찰 크리스(알렉시 마낭티)가 흡연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버스를 기다리던 미성년자를 과도하게 추궁하는 일이 발생한다. 크리스의 행위는 경찰의 부도덕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이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기 위해 사건을 촉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크리스는 이 과정에서 자신을 촬영하려는 학생의 휴대전화를 집어던져 박살내기까지 한다. 이를 통해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노출한다. 그는 카메라의 대상으로서 사건의 일부가 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드론은 경찰이 더는 사건 바깥에서 시민들을 판단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집단으로 움직이는 마을에서 유일한 독립군처럼 보인다. 드론은 순찰차보다 훨씬 덜 거추장스러운 모양새로 더 편리하게 도시를 감시하는 기계다. 그런데 처음 드론숏이 등장하는 방식에 관해서는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드론숏이 등장할 때 그것은 도시 전체를 조망하는 인서트숏을 위해 쓰인다. 지금 벌어지는 사건과 거리를 두고 잠시 숨 고르는 기능을 하거나 지금도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사건들을 상상하게 한다.
<레 미제라블>의 드론숏 역시 처음에는 시선을 특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중립적인 인서트숏처럼 보인다. 숏이 어느 아파트 창가에 선 낯선 소녀를 보여줄 때까지도 다소 위험하긴 하지만 곧 새로운 대상으로서 소녀의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옷을 갈아입으려던 소녀가 드론을 마주 보면서 그것이 영화 내부에 있는 실제 드론의 시선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제야 보통 드론숏에서 말끔히 삭제되기 마련인 드론의 소음에 주목한다. 드론의 시선은 영화 바깥에 놓인 감독의 시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영화 내부의 한 소년의 시선으로 축소된다(이 소년이 감독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동시에 드론의 시선은 중립성에서 벗어나 소녀의 삶을 훔쳐보는 부도덕한 시선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전환의 순간은 의문을 남긴다. 그렇다면 개인의 시선으로 환원되기 이전의 드론숏은 중립적인가. 그것이 개인의 시선으로 환원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그 시선을 중립적이라고 용인할 수 있었을까. 중립적인 시선은 개인의 시선으로 환원되기 전까지만 가능한 연약한 것이다. 중립적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판단을 할 수 없어 그 의미를 자꾸만 유예시키는 단어다. 찍은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의미는 사후적으로 발현된다.
과대화된 눈의 욕망
처음에 경찰관의 눈과 뷔즈(알 하산 리)의 드론은 비슷한 층위에 놓여 있었다. 뷔즈의 드론을 발견한 소녀가 다른 소녀들을 이끌고 뷔즈를 찾아와 그에게 항의하는 시퀀스는 크리스가 버스정류장에서 세명의 미성년자에게 과도한 추궁을 하는 시퀀스가 마무리된 직후 등장한다. 소녀들은 마치 크리스의 행동에 항의하는 것처럼 보이고, 뷔즈가 자신의 잘못에 더해 경찰에 대한 항의까지 대신 들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포개지던 두 층위의 시선은 경찰이 이사에게 고무탄을 발사한 상황 이후 결별한다. 누군가의 사적 일상을 채집하던 부도덕한 카메라는 의도치 않게 사건을 증언할 도덕적인 목격자가 된다. 시선의 담지자로서 사건을 캐내려던 경찰들은 이제 스스로 사건이 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삭제된 목적의 자리는 경찰의 과잉 진압 사건으로 채워진다. 이러한 상황이 뜻하는 것은 이것이 시각의 우위를 두고 벌이는 게임이라는 점이다.
영화가 그려낸 세계 속에서 권력을 쥐거나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능력은 보는 것이다. 이들의 싸움은 대부분 시선을 둘러싸고 이뤄진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수 있지만, 그것이 때때로 노골적이고도 분명하다는 점이 주목된다. 소년의 경찰에 대한 공격은 주로 그들의 눈을 향한다. 그와다(제브릴 종가)는 고무탄을 발사하기 직전, 소년들을 제압하기 위해 휴대용 최루가스통을 총기처럼 들고 위협한다. 이때 소년 하나가 가스통을 빼앗으려 달려들면서 가스가 분사되고 그와다가 최루액에 맞아 힘겨워한다.
그는 눈의 불편감으로 자극된 상태에서 추적을 지속하다 고무탄을 발사하고 만다. 경찰에 대항한 집단의 행태는 가시권을 피해 잠복해 있다가 기습해 상대의 시야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물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경찰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동차 뒤에 잠복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경찰의 눈을 향해 물총을 쏜다. 이들이 쏜 물총으로 인해 자동차의 창은 온통 뿌옇게 되어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 될 때까지 계속된다.
레주 리의 카메라는 자동차 내부에 놓여 관객의 시야가 흐릿하게 가려지도록 둔다.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 정도로 보이던 소요는 말하자면 메인 이벤트 전 긴장을 푸는 사전 행사에 불과했다. 경찰들은 곧 이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시민들에 포위된다. 어딘가에서 나타난 이사가 폭죽을 총처럼 쥐고는 경찰차를 향해 발사한 것이 신호탄이 된다. 경찰은 더는 자신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차를 버리고 뛰쳐나와 이들과 다시 한번 뒤섞여야 한다. 소년들의 행위는 혁명의 기운을 가득 담고 있지만, 혁명의 대열에 관객을 위한 자리는 없다. 관객은 이들과 마주 보는 자리에서 그들의 공격을 감내해야 할 뿐이다.
아이들은 낡은 아파트로 경찰을 유인한다. 그곳에서도 이들은 잠복한 채 몸을 숨긴 뒤 연기를 과도하게 발생시키는 화염병을 이용해 이들이 앞을 분간할 수 없도록 만든다. 곧 크리스가 소년이 던진 물체에 맞아 눈의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진다. 눈에 대한 공격은 한편으로 눈을 위한 문명이 과도하게 발달한 우리 시대에 가장 적절한 공격법처럼 여겨진다. 인터넷을 통한 전세계적 연결망의 구축은 이 세계를 채우는 영상물의 향연으로 보충된다. 오프닝 장면에서 언급한 목적의 상실과 눈에 대한 과장된 강조는 대조적인 흐름처럼 보이지만 서로 통한다. 군중이 뿜어내는 열기가 놀이인지, 폭동인지, 소요인지, 혁명인지 식별 불가능한 상태였을 뿐 그것이 볼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식별 불가능성은 볼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만 성립한다. 눈은 보이는 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선과 메모리의 분리 접합이 용이한 드론의 원리는 흥미로운 영감을 준다. 드론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다. 드론은 경찰에 의해 손쉽게 박살나면서 운명을 다한다. 하지만 그 안에 든 메모리는 경찰을 더 많이 애태우며 오랫동안 살아남는다. 중요한 것은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았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영화가 요구하는 것도 눈을 뜨고 크게 보라는 선언이기보다는 우리의 눈은 한계에 의해 가려지더라도 메모리 칩을 챙기는 것을 잊지 말자는 당부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도착한 마지막 장소에서의 대면은 보라는 선언이기보다는 볼 수 없음을 인식하고 시인하기 위한 자리다. 스테판은 경찰 조직 내에서는 가장 평화적인 방식으로 조율을 시도한 자이며, 셋 중 유일하게 변화 가능성을 지녔다. 그와다와 크리스가 차례로 눈에 손상을 입은 와중에 스테판만이 아직 시각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지 않은 채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상태다. 그 때문에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횃불을 든 이사와 마주 볼 수 있었다. 아니, 스테판은 마주 보는 장면을 위해 남겨져야 했던 눈이다.
이제까지 영화 속에서 침묵이 놓인 자리는 갑자기 발사된 탄환에 의해 강제적인 방식으로 탈취되거나 소요 사태를 예고하는 불길함을 담고 있었다면, 이사와 스테판이 서로를 마주 보는 장면에 이르러 자발적인 방식으로 행위의 정지와 침묵이 생성된다. 제대로 보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모든 것을 관망할 수 있는 전능한 자리가 아니라 딱 횃불 하나만큼의 작은 빛이다.
좁고 가파른 광장에서
혁명을 위한 장소는 어디인가.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했던 광장인가. 광장은 그 자체로 다양한 시민들의 평등한 뒤섞임이라는 환상을 작동시켜왔다. 그러나 영화는 더는 광장의 평화를 믿지 않는다.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광장은 끊임없이 도망쳐야 하는 도시 공간이 된다. 이들이 도망치는 데는 이유가 없으며,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경찰은 용의자가 흑인 아이라는 사실만을 전해 듣고 마을을 탐색하던 중 한 무리의 아이들을 쫓는다. 경찰은 이들이 도망갔기 때문에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아이들은 그저 자신들을 쫓아와서 도망쳤을 뿐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표적이 되어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는 광장보다는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오프닝 시퀀스에서의 광장이 클로징 시퀀스에서의 한 낡은 아파트의 좁은 층계와 복도로 변화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우리에겐 시선으로부터 도망칠 곳이 필요하다. 탁 트인 시민의 광장은 한 폐쇄된 건물 속으로 움츠러든다. 광장의 시선은 평등하지 않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보고, 누군가는 시야를 차단당한다. 평등하지 않을 바에야 너도나도 시선을 제약당하는 이 폐쇄적인 공간이 가장 평등한 공간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이것은 절망적인 분석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우리에겐 계단이 필요한데, 그것은 우리가 서로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