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가 역사를 구현하는 방식
2021-05-19
글 : 김철홍 (평론가)
피 흘리지 않으며 정치하기

흑인 인권운동가 프레드 햄프턴의 말년을 담은 전기영화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를 보고, 다소 거친 비교지만 그의 삶이 유관순 열사의 삶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족에 닥친 전쟁 같은 상황에서 한 운동의 리더 역할을 한 위인은 여럿 있겠지만 이렇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을 나란히 놓고 생각해보면 미국에서 벌어진 전쟁이 조금 더 비극적으로 느껴지는데, 그건 이 모든 일이 벌어진 후에도 그들(흑인-백인)이 계속해서 같은 땅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 또한 많은 복잡한 요소들을 배제한 채 내린 결론이지만 단순히 말해서 우린 다른 땅에서 그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척 살 수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이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에 프레드(대니얼 컬루야)가 마오쩌둥의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고,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다”는 말을 당원들에게 주지시키는 모습이 나오는 것은 적절하게 보인다. 흑인으로서 차별받지 않는 보통의 삶을 사는 것은 정치의 문제인데, 정치는 피 한 방울만 흘러도 전쟁으로 변모해 약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잃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자들은 그 점을 활용하는 데 능했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는 메시지가 아직도 필요한 현재에, 논쟁적인 집단과 그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을 주인공 삼아 정면 승부하는 영화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이 메시지가 힘을 얻으려면 피가 나서는 안된다는 중요한 조건이 있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어떤 방법으로 딱지가 앉은 모두의 마음에 상처내지 않으며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가. 영화는 ‘블랙 메시아’의 주변에 있던 ‘유다’ 빌 오닐(러키스 스탠필드)을 주목한다.

때는 1968년, 흑표당 일리노이주 지부장 프레드의 영향력이 날로 거대해지자 FBI는 조직 내에 정보원을 잠입시키는 작전을 통해 이를 무력화하려는 전략을 세운다. 영화는 빌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유다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며 시작된다. 빌은 FBI를 사칭하는 방식으로 다른 흑인들의 차를 훔치다가 체포당하는데, FBI 요원으로부터 정보원 제안을 받은 빌의 오묘한 표정 위로 날카로운 음악과 함께 영화의 타이틀이 떠오른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이 타이틀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제목을 구성하는 다섯개의 단어(JUDAS, AND, THE, BLACK, MESSIAH)는 분절되어 하나씩 나타나는데, 다른 글자들이 검은 바탕에 흰색으로 적힌 반면 ‘BLACK’이라는 글자만 반대로 흰색 화면에 검은색으로 표기된다. 이때 연속되는 다섯개의 정지된 이미지(백-백-백-흑-백)가 만들어내는 잔상효과로 인해 BLACK이라는 글자가 입체적으로 부각되고, 이는 백인들에 둘러싸인 흑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로 작용한다.

이 이미지는 동시에 조각의 기법 중 하나인 음각과 양각을 떠올리게 한다. 주로 도장을 만들 때 사용되는 기법으로, 음각은 글자 자체를 파내어 배경에 색이 묻어나오게 하고, 양각은 글자를 제외한 배경을 파내어 글자가 도드라지는 결과물을 만드는 방법이다. 말하자면 오프닝의 흑백으로 이루어진 음각-양각 이미지는 영화 전체가 하나의 도장처럼 ‘찍힌’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우게 한다. 영화가 주변 인물인 빌의 내면을 파고들어갈 때 역으로 프레드가 부각되는 것처럼, 무언가에 힘이 작용될 때 오히려 더 강력한 반작용이 생긴다는 것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탄압하면 할수록, 더 강해질 것이다’는 메시지는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전체 서사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문구다. 경찰에 의해 본부가 불타 폐허가 된 순간 흑표당은 적대적이었던 크라운 갱단과 화합을 이루고, 흑인 지도자들은 감옥에 갇힐 때 오히려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영화 후반부 프레드는 합당치 않은 이유로 다시 감옥에 갈 위기에 처한다. 수감 전날 흑표당의 수뇌부는 특별자금을 마련하여 프레드를 망명시킬 계획을 세우는데, 이때 프레드는 정당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민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며 그 돈으로 병원을 설립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영화에 나오진 않지만 공권력의 탄압으로 탄생된 프레드의 영웅적인 선택은 훗날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데 일조했을 것이 분명하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가 주목할 만한 것은 앞서 말한 영화의 메시지가 이미지와 결합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프레드가 그 결단을 내릴 때, 프레드 얼굴 바로 옆에는 전등이 놓여 있다. 전등의 밝은 빛은 오프닝의 그 이미지가 그랬던 것처럼 프레드의 피부색을 더 뚜렷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샤카 킹 감독은 오프닝과 마찬가지로 이미지의 대조를 통해 이를 더욱 강조한다.

영화는 이어서 같은 방에서 프레드를 지켜보던 빌을 보여주는데, 이때 빌의 옆에도 하나의 전등이 있다. 그러나 그 전등은 프레드를 비추던 것에 비해 현저히 크기가 작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빌은 자신의 고유한 색을 잃는다. 영화가 가장 고조되는 순간인 프레드가 당원들 앞에서 연설하는 신에서도 이러한 대비는 지속된다. 프레드는 흰 현수막과 열광하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찍히는 반면, 빌은 시종일관 흐릿한 배경, 또는 군중에 가려진 채로 그려진다. 빌이 초라하고 작게 표현될수록 프레드를 향한 관객의 마음은 커진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에 분명 이 전쟁에 책임이 있는 당사자의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배경으로 존재할 뿐 영화는 대놓고 그들을 지목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들이 만든 상황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한 인물을 파고들어 이 문제의 전체적인 구조를 드러나게 한다. 비유하자면 상처에 난 딱지 대신 그 주변부를 긁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영화는 피 흘리지 않으며 정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프레드의 의지를 현재 이곳에 다시 살려낸다. 혁명가는 죽일 수 있어도, 혁명은 죽이지 못한다는 영화 속 프레드의 말은, 그렇게 한편의 영화로 증명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또다시 빌이 있다. 정보원 역할을 하며 고통스러워하던 빌은 프레드가 암살을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백인들로 가득한 식당에서 프레드는 FBI 요원으로부터 자유통보를 받는데, 다음 장면에서 빌은 동일한 실제 인물인 윌리엄 오닐이 출연했던 한 다큐멘터리의 푸티지를 통해 다시 소환된다. 영상 속에 갇혀 영원한 대중의 심판을 받는 운명에 처한 빌을 보고 있으면 바위산에 묶여 매일 간을 쪼아 먹히는 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가 떠오른다. 그를 보며 제우스의 가혹함에 대해 따지기보다는, 왜 그가 불을 훔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이 영화가 바라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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