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애플' 두명의 기억상실증 환자와 이들을 지켜보는 병원 시스템의 정체
2021-05-26
글 : 김소미

때는 가까운 미래. 단기 기억상실증이 감기처럼 퍼지자 사람들은 갑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까맣게 잊어버린다. 운전을 하다 말고 차에서 내린 남자가 종전까지 자신이 타고 있던 차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 존재를 황망해하며 길바닥에 주저앉는 식이다. 주인공 알리스(아리스 세르베탈리스) 또한 얼마 못 가 병증에 시달린다. 기억을 잃어버린 그는 이름도 집 주소도 알지 못한 채 거리를 배회하다가 병원에 수용된다. 소지품도 없어 신원을 알아볼 수 없는 기억상실증 환자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그들을 찾는 가족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알리스에게는 한참이 지나도록 찾아오는 이가 없고, 그는 자신이 사과의 맛을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만을 오롯이 감각하며 침상에서 시간을 보낸다. <애플>은 기억을 잃고 의미 없는 존재가 된 무연고 환자들이 ‘인생 배우기’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설정을 통해 정체성의 본질과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질문하는 영화다.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은 병원이 지정한 구역에서 생활하는 환자들이 매일 숙제를 하듯 새로운 경험을 수행한 뒤 이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과정이다. 코스튬 파티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등의 사소한 일과부터 처음 만난 사람과 화장실에서 섹스를 하는 일탈에 이르기까지 병원의 지침은 다양하다. 그러던 중, 알리스 앞에 또 다른 기억상실증 환자 안나(소피아 게오르고바실리)가 나타난다. 로맨스를 시험당하는 두명의 기억상실증 환자와 이들을 지켜보는 병원 시스템의 모호한 정체를 중첩시키면서 <애플>은 미스터리와 블랙코미디의 두께를 차츰 늘려간다.

대개 침묵을 지키는 조용한 주인공을 따라가는 <애플>은 유기적인 서사의 흐름에 대한 강박 없이 산발적인 상황 위주로 전개된다. 이 분절된 서사의 틈새를 채우는 것은 캐릭터의 반응과 이미지를 해석하는 관객 각자의 감정과 기억이다. 화면 안을 힘없이 부유하는 알리스는 대개 텅 빈 기호처럼 존재하지만, 불쑥 작동하는 자기 내면의 흔적들을 내보이며 화면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알리스가 전자제품 매장의 TV 화면 속에 등장하는 연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멈춰 서 있을 때, 공원에서 달려든 개의 이름을 익숙하게 부를 때 한 남자가 품은 비밀과 트라우마는 굳어 있던 서사를 비로소 동요하게 만든다.

기억상실은 지극히 멜로드라마적인 소재이지만 <애플>은 기억의 부재를 통해 한 인간을 철저히 고립시킨 다음 냉정한 실험대 위에 올린다. 알리스가 동네 아이들의 꼬마 자전거를 빌려 타는 장면을 통해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곧 완전한 순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은 특히 서늘하다. 기억에만 온전히 포섭되지 않는 인간의 정체성을 질문하는 시선이 흥미로운 한편 새로운 경험을 그저 피상적으로 수행하며 사진 찍기에만 집중하는 환자들의 모습에서 오늘날의 디지털 사회를 풍자하는 날카로움도 느껴진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환자들의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은 우스꽝스러운 고군분투처럼 보인다.

<애플>로 데뷔한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은 <송곳니>의 조감독 출신으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세계와 인상적인 교집합을 보여준다.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를 우화적으로 풀어내는 플롯, 불친절한 내러티브 스타일, 기괴하고 풍자적인 블랙코미디 취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확고한 공통점이 있다. 회백색으로 한겹 덧칠한 듯한 무미건조한 4:3 화면 속에 인형극의 도구처럼 양식적으로 배치된 인물들도 선명한 인장을 남긴다.

다만 기발한 컨셉의 매력을 절제하고 따뜻한 온도로 작품을 마무리짓는다는 점에서 <애플>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들보다 한결 부드럽고 온건하게 느껴진다. <애플>은 그리스영화의 독특한 조류와 저력을 굳건히 확인시키는 작품인 동시에 란티모스보다 부드러운 어조로 인간의 불완전함을 긍정하는 크리스토스 니코우라는 새 이름을 지켜보게 만든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CHECK POINT

팬데믹과 기억상실증

<애플>은 공교롭게도 팬데믹 시대에 등장한 바이러스성 기억상실증 영화다. 오늘날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이러스가 브레인 포그라 불리는 사고 및 인지 기능 저하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애플>이 부르는 불안은 결코 영화적인 것만은 아니다.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은 우리에게 가까운 공포를 블랙코미디적으로 한번 더 비틀어버리면서 영화적 감흥을 배가시킨다.

케이트 블란쳇의 안목

지난해 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에서 처음 상영되며 심사위원장이었던 케이트 블란쳇의 마음을 사로잡은 <애플>. 크리스토우 니코우 감독의 재능에 반한 케이트 블란쳇은 <애플>의 총괄 프로듀서로 합류한 것도 모자라 니코우의 두 번째 영화인 케리 멀리건 주연의 <핑거네일스>도 전폭 지원했다.

아날로그한 근미래

근미래를 암시하지만 시대 배경을 특정하지 않는 미장센이 <애플>에 기묘한 미스터리를 드리운다. 4:3 화면 안에 깔끔하고 스타일리시한 구도로 미장센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애플>은 현대적인 이야기를 전개하면서도 폴라로이드 카메라, 커다란 카세트덱 등의 소품으로 아날로그함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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