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바쿠라우'가 조우한 (영화의) 혁명에 관하여
2021-06-09
글 : 송경원
[송경원 기자의 프런트 라인]

무주산골영화제는 해마다 전세계 영화감독 중 동시대 영화미학의 최전선에 서 있는 감독을 선정해 소개하는 ‘무주 셀렉트: 동시대 시네아스트’를 진행한다. 올해의 감독은 브라질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자 정치와 혁명의 시네아스트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다. 그의 전작을 모두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부디 놓치지 마시길.

장르 너머, 폭력을 먹고 자란 꿈

<바쿠라우>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설명하기 곤란한 영화를 만나는 건 흥겨운 일이다. 이게 대체 뭐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바쿠라우>(2019)를 보는 내내 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말들은 영화에 대한 기분 좋은 혼란에 대한 찬사에 가깝다.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감독의 세 번째 장편 <바쿠라우>는 전작들과는 확연히 다른 결을 선보인다. 데뷔작 <네이버링 사운즈>(2012)나 <아쿠아리우스>(2016)를 기억하는 이라면 예상 밖의 급격한 변화에 당혹할 수밖에 없다.

‘디스토피아적 웨스턴’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한 <바쿠라우>는 웨스턴을 뼈대로 세운 뒤 피가 난무하는 슬래셔 무비부터 SF, 스릴러, 호러, 하드보일드, 복수물까지 온갖 장르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과격한 장면들을 뒤범벅했다. 피폐해진 브라질 사회의 한 단면을 극단적인 폭력 묘사를 통해 드러내는 이 영화는 과격한 장르영화의 껍질을 쓰고 있는 만큼 2019년 <바쿠라우>가 칸국제영화제에 공개됐을 때 많은 이들이 ‘과감하고 독창적인 스타일’에 먼저 주목했다. 파격적인 껍질에 시선이 먼저 쏠리는 건 일견 당연한 일이다.

얼핏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를 연상시키는 이 기괴한 결과물은 온갖 장르를 섞어버린 혼종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당연한 소리지만)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는 쿠엔틴 타란티노가 아니다. 설사 외형이 비슷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건 그저 각자의 길을 가는 도중에 교차한 우연에 불과하다. 애초에 두 감독은 출발과 방향, 목적지가 전혀 다르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영화사에 얽힌 사적 기억에서 출발해 장르 자체가 주는 순수한 쾌감을 여러 방식으로 구현하는 걸 목표로 한다면,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에게 있어 장르적 쾌감은 도구이자 외피에 불과하다. 장르를 종잡을 수 없는 현란함에서 잠시 한발 물러나 (감독이 수시로 시도하는 것처럼) 조감 시점으로 영화의 구조를 살펴보면 새로운 맥락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영화는 끊임없이 ‘예상치 못한 순간’들을 들이미는데 바로 이 지점이 <바쿠라우>를 끌고 가는 동력이며 비현실적인 상황을 지탱하는 근간이다. 이건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는 언제나 기발한 조합과 틀을 깨는 상상력으로 관객의 예상을 앞지른다. <바쿠라우>의 ‘예상치 못한 순간’은 조금 다르다. 아니, 다르게 읽어야 한다. 내가 궁금한 건 어떻게 장르를 비틀고, 예상치 못한 순간을 들이미는지, 그 게임의 과정이 아니다. 애초에 나는 왜 특정 패턴 자체를 예상하려 했는지, 장르라는 틀에 퍼즐을 맞춰 장면을 설명하려 했는지, 그 행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다. 나(관객)는 기시감이 드는 장면 앞에서 무엇을 상상하는가. 다음 장면으로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영화는 두번 시작된다

<바쿠라우>

<바쿠라우>는 브라질 오지에 있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상황을 다룬다. 브라질 북동부 세라 베르드 인근의 바쿠라우에는 피부색은 물론 성향마저 확연히 다른 사람들이 함께함에도 어느 공동체보다 끈끈한 결속을 이루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라 베르드의 시장 토니 주니어(타르델리 리마)가 찾아와 마을 사람들의 지지를 요구한다. 하지만 댐 건설을 이유로 마을에 물을 끊어버린 시장은 바쿠라우 주민들에게 적대적인 존재일 뿐이다. 마을 사람들의 냉담한 거절에 모욕을 느낀 시장 토니는 미국에서 온 용병을 고용해 바쿠라우 사람들을 죽이라고 청부하고 공격당한 마을 사람들은 범죄를 저지른 후 숨어 있는 룽가(실베로 페라라)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고립된 마을과 외부의 폭력, 이에 저항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바쿠라우>는 얼핏 서부극에서 기본적인 서사의 틀을 빌려온 것처럼 보인다. ‘디스토피아적 서부극’이란 그런 맥락일 것이다. 사람들은 미지의 대상을 마주할 때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한다. 부분적으로 익숙한 요소들을 발견해 거기서 안정감을 찾고 서둘러 정의 내리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드보일드, 공포, 서부극, 심지어 SF까지 <바쿠라우> 앞에 붙은 온갖 장르영화에 대한 명명들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감독이 차용해오는 건 장르의 외형만이 아니다.

오히려 관객이 어떻게 오해할 것인지, 그 인식의 고정관념까지 가져와 비트는 걸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이 영화가 서부극의 자장 안에 있다면 실로 이상한 서부극이다. 부당한 폭력으로부터 공동체를 지켜줄 또 다른 폭력, 카우보이 역이라 할 수 있는 룽가는 영화의 절반이 지난 지점에서야 등장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이 영화에서 서부극의 요소는 두 번째 장례식 이후에야 당도한다. 인근 농장에 정찰을 나갔다가 살해당한 두명의 마을 사람, 그들의 죽음과 장례식을 기점으로 영화는 피와 폭력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반부를 채우고 있는 건 무엇인가. 영화는 두번의 죽음을 기점으로 정확히 절반이 접혀 있다. 두개의 다른 영화가 붙어 있다고 해도 좋겠다. 첫 번째 영화는 공동체를 이루던 고령의 대모 카르멜리타의 장례식으로 출발한다.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카르멜리타에 애도를 보내고 카메라는 이들의 송별을 차분하게 따른다. 대모 카르멜리타의 장례식은 이성의 죽음, 오래된 형태의 공동체의 죽음, 저항과 반란의 죽음이다.

바쿠라우는 가상의 공간이지만 그들의 흔적은 상상이 아니다.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17세기 농장의 도주 노예들이 건설한 공동체 마을 ‘낄롱부’가 그것이다. 지금도 형태를 달리할 뿐 수많은 낄롱부가 존재한다. 사회 안전망 시스템 바깥으로 내몰린 이들은 법 바깥에서 뭉쳐 자경단마냥 스스로를 보호한다. 그저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기 위한 방편이라기엔 바쿠라우 주민들의 유대감은 어딘지 남다르다. 외부 세계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쳐 형성된 이들 공동체는 어떤 배경을 가지고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준다. 용납할 수 없는 건 오직 외부의 압력이다. <바쿠라우>의 전반부는 이들만의 원칙과 내부의 윤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시장으로 대표되는 외부의 압력이 이들을 어떻게 지우려 하는지를 집요하게 재현한다.

전반부 영화가 보여주는 색깔은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감독의 전작들과 맞닿아 있다. 1968년생인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감독은 비교적 장편 연출 데뷔가 늦은 편이다. 20대 중반부터 영화평론가, 기자, 프로그래머로 오랜 기간 활동해오던 그는 45살 되던 해인 2012년 첫 장편 <네이버링 사운즈>를 연출하며 평단의 주목을 받는다. 브라질 북부 대도시 헤시피에서 자란 감독은 제작사 ‘시네마스코피오’를 설립해 헤시피의 모습을 여러 단편영화에 담아내왔다.

그의 첫 장편 <네이버링 사운즈>는 일련의 단편 작업(특히 2005년작 <일레트로도메스티카>)의 확장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상류층 진입을 꿈꾸는 중산층 가정의 욕망과 불안을 그린다. 많은 토지를 소유한 프란치스코와 그의 부동산을 중개하는 조카 주앙, 부자가 되고 싶은 주부 비아와 사설 경비원 클로도알두 등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사실 도시라는 공간, 그 자체다. 정확히는 여러 사람들의 삶의 시간과 기억의 지층이 쌓인 장소로서의 브라질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특질 중 하나를 포착할 수 있다. 그의 영화는 어떤 겉옷을 입고 어떤 스타일로 치장하든 언제나 공간에서 싹을 틔운다.

요컨대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의 영화는 공간과 사람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공간은 어떻게 영화가 되는가. 감독은 <네이버링 사운즈>는 물론 그다음 영화인 <아쿠아리우스>, 최근작 <바쿠라우>에서도 동일한 태도를 유지한다. 공간은 그 자체로는 비어 있다. 거기에 사람이 들어가 관계를 만들고 기억을 쌓아나갈 때 비로소 그곳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장소가 된다. 다시 말해 장소는 누군가의 것이다. 여기서 ‘누군가’는 누구인가. 다름 아닌 그곳에서 살고 있고, 살아온 브라질 사람들이다. 감독은 이들의 현재 삶을 관찰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이 지나온 기억들을 추적하고, 그들이 나아갈 수 있는 삶의 방향에 대해 상상한다.

<네이버링 사운즈>의 오프닝에서 과거 페르남부쿠(헤시피의 옛 지명) 지역의 흑백사진을 배치한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과거는 지나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연장으로 이어져 있다. 과거 농장에서 일했던 이들이 여전히 분리되어 하층민의 삶을 살고 있는 현실. 인종, 사회, 정치적 문제들은 하루아침에 터져나오는 게 아니라 지속된 압력의 산물이라는 진실. <네이버링 사운즈>는 엔딩의 에필로그가 아니라 오프닝에서 기록필름을 제시함으로써 이를 증명한다. 이것이야말로 멘돈사 필류 감독이 공간에서 출발하는 상상력에 시간의 지층을 개입시키는 방식이다.

<바쿠라우>도 똑같다. 공간과 사람을 잇는 건 기록(혹은 기억)이기에 멘돈사 필류 감독의 영화에서는 빠질 수 없는 요소로 등장한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존재하되 기록되지 않는 것들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지워진 역사와 기억, 또는 기록되지 못했던 시간들을 필름으로 재현해 기록하기. 아무것도 없는 시골 벽지에서 마치 관광명소인 양 사람들이 자랑하는 바쿠라우 박물관은 어딘지 생뚱맞아 보이지만 사람들은 자부심을 느끼는 듯 계속 박물관을 언급한다. 그곳은 실은 피와 폭력으로 지켜낸 저항의 역사 그 자체, 필연의 장소다.

후반부 미국 용병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그의 핏자국이 벽면에 찍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말한다. “벽은 이대로 놔둬요. 있는 그대로.” 이런 맥락에서 접근하면 후반부 저격을 시도하는 미국 용병 앞에 홀연히 조상의 영혼 같은 존재가 나타나 막아서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재현한, 상징 같은 것이 아니다. 차라리 역사와 기록 그 자체를 마주하는, 영화적 허용 혹은 유희라고 할까.

<바쿠라우>에서의 폭력성은 상징 같은 게 아니다. 존재하되 지워져가는 것들의 저항을 물리적 실체로 드러낸, 세계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찍어낸 판화에 가깝다. 이것은 최대한 현실에 가깝게 모사한 ‘리얼리티’와는 다른 결에서 창조된 또 하나의 현실(혹은 진실)이다. 굳이 명명하자면 환상적 리얼리즘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마저 번거롭다. 여기엔 그저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라는 수식어면 족할 것 같다. 영화 초반 바쿠라우의 위기가 감지되는 것은 지도에서 사라지면서부터다. 그 순간 바쿠라우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 되어버린다. 동시에 우리는 목격한다. 그들이 여전히 저항하며 거기에 있음을. 두 번째 장례식의 밤, 전통 무예 카포에이라를 추면서 먼저 떠난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끝내 피와 살점과 폭력이란 물리적인 흔적으로 스스로를 증명하고 있음을.

영화는 어떻게 현실에 저항하는가

<바쿠라우>

여기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라는 이름의 창문이 있다. 세상을 향해 개방된 이 창문의 특징적인 형태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다름 아닌 조감, 위에서 찍기다. 영화마다 다른 형식을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는 멘돈사 필류 감독이 스타일적으로 반복하는 거의 유일한 인장 같은 장면이기도 하다. 멘돈사 필류 감독은 전작에서도 늘 조감으로 영화의 문을 열곤 했다. 지도 위에 추상적 이미지가 아니라 보이는 그대로의 진실을 전하는, 혹은 그들이 거기에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한 조감숏은 <바쿠라우>에서 더욱 강조되고 과장되어 아예 우주로 나가 지구를 찍어버린다. 이것은 상상된, 가상의 공간이 아니라 물리적인 실체를 띤 흔적이라는 선언 같은 이미지다. 아니, 이미지였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이조차 변형된다. 오프닝 이후로도 조감숏은 집요하게 반복되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특히 독특한 형태로 바뀌어 주변을 떠돈다. 바로 드론의 시점이다. 시장이 마을을 찾아와 협박과 회유를 하고 떠난 다음 장면, 도로 위를 달리는 한대의 오토바이 뒤로 갑자기 UFO가 떠다닌다. 당황스러울 수 있다. 농담 같아 보이기도 한다. 마치 60, 70년대 특수효과 촬영처럼 조악하고 어색한 UFO의 움직임에는 분명 영화적 유희가 투영되어 있다.

하지만 이후 마을 주민이 살해되고 UFO가 미국 용병들의 것임이 드러나는 순간 상황은 명료해진다. 동료의 시체 앞에서 분노하는 파코트(토마스 아퀴노)에게 UFO를 처음 목격한 마을 사람은 말한다. “어제 드론을 봤어. 옛날 영화에 나오는 비행접시 같았지만 드론이 맞아. (중략) 그 드론은 마을 사람들 것이 아냐. 하늘을 잘 살펴봐.” 이어지는 화면에서 카메라는 땅에 묻힌 화석 같은 이빨을 보여준다. 이 땅 위에 오래도록 쌓여온 것(아카이브)과 외부에서 내려온 위장된 시선. 둘은 양립할 수 없으니 반드시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바쿠라우>는 장르의 외피를 빌려오되 예상치 못한 방식과 등장 타이밍으로 관객의 기대를 배신한다. UFO가 등장할 때만 해도 영화가 어디로 갈지 짐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환영인지 혼란스러웠을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이후 비행물체가 드론임이 밝혀지는 순간 설명되는 상황에 내심 안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UFO가 실은 드론이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사실을 처음으로 목격한 마을 사람도 그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게 핵심이다. <바쿠라우>는 꾸며진 이야기, 상상된 공간이다. 실은 바쿠라우라는 마을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건 가짜인가. 멘돈사 필류 감독이 내내 드러내는 폭력은 그저 재현된 유희와 전시에 불과한가. 그럴 리 없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걸 상상하지 못한다. 모든 상상은 실재의 흔적들을 바탕으로 재구성된다.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에게 장르란 그런 것이다. 이것은 장르의 규칙 아래 관객의 예상을 비껴가기 위해 애쓰는 게임이 아니다. 차라리 아예 룰 바깥에서 게임의 법칙과 판을 뒤집는 혁명에 가깝다. 그리하여 장르의 패턴과 안내를 번번이 어기는 <바쿠라우>는 폭력과 공포라는 장르적인 상상력에서 출발하는 영화, 그걸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된 영화들과는 다른 차원에 머문다. 이 영화가 과도하리만치 폭력으로 점철된 것은 감독의 설명을 빌리자면 “그것이 브라질의 오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오직 폭력이라는 저항을 통해 실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지구 어딘가에 일어나고 있는 진실이다.

최후에 가서야 영화는 미국 용병의 대장 마이클(우도 키어)의 입을 빌려 고백한다. “폭력이 너무 심해.” 이제껏 놀이 같은 폭력을 퍼트린 자가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인가 싶다면, 성공이다. 영화는 후반부 피를 흩뿌리며 복수와 파괴를 향해 내달릴수록 짜릿하고 달콤한 쾌감에 봉사하는 대신 쉽사리 넘길 수 없는 이물질들을 남긴다. 이 영화를 그저 오락으로 쉬이 넘기려는 관객의 목구멍에 생채기를 내려는 듯 섞이지 않는 알맹이들은 크고 굵고 거칠다.

마을을 습격할 작전을 짜는 도중 마이클(우도 키어)의 대사도 의미심장하다. “엄밀히 말해 우린 여기 없는 거야.” “하지만 여기 있잖아요.” “아니, 우리가 여기 없다는 걸 증명할 서류가 있어.” ‘여기 있음’과 ‘서류(재현)상에 있음’이라는 두 세계가 충돌한다. 다시 말하지만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 작전에 실패하고 자살하려던 마이클 앞에 죽은 대모 카르멜리타가 등장한다. 이것은 환영인가. 유령인가. 아니, 차라리 이건 여전히 영화의 혁명을 믿는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감독의 선택이다. 그는 재현된 이야기 세계의 논리와 장르의 법칙보다 거기에 있어야 마땅할 진실을 골랐다. 어느새 지워지고 잊혀가는 가치들. 오래된 공동체의 꿈. 어쩌면 한때 영화가 품었던 혁명의 불씨. “벽은 그대로 놔둬요. 있는 그대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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