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은의 마음이 하는 일]
[오지은의 마음이 하는 일] 인간계 아줌마는 오늘도 생각한다
2021-06-17
글 : 오지은 (뮤지션)

노트북으로 작업을 할 때 언젠가부터 눈을 찡그린다는 걸 느꼈다. 건조감도 자주 느꼈다. 설마 하고 안과에 가봤다. 무뚝뚝한 전문의 선생님이 내 눈에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선생님은 커다란 사진을 한장 모니터에 띄우더니 진지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혈관, 신경, 내가 모르고 있던 눈의 구조.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서론이 긴가 하던 차에 선생님이 중간 결론에 다다랐다. 오지은씨는, 녹내장이, 아닙니다. (간 떨어질 뻔했네!) 그리고 녹내장의 증상과 위험, 조기 발견의 어려움에 대해 추가 설명을 한 후, 어쩔 수 없다는 느낌으로 슬쩍 말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노안이 온 겁니다. 가까운 곳이 잘 안 보이기 시작하고 눈이 건조하다… 뭐 전형적인 증상이고요.”

나는 놀라지 않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난 항상 조숙한 편이었다. 2차 성징이 빨리 왔으니 노화도 빨리 올 수 있지 않겠는가. 사람의 노화는 만 26살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미국 듀크대학교, UCLA, 영국의 킹스칼리지, 이스라엘 헤브루대학교, 뉴질랜드 오타고대학교가 국제 공동 연구진을 꾸려 1037명을 대상으로 38년간 추적 조사를 벌여서 낸 결과다. 이런 연구 결과라면 승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의 연구에 따르면 노화가 가장 빨라지는 나이는 만 38살이다. 나는 현재 만으로 39살. 게다가 8년 전에 라식수술도 했다. 스트라이크아웃 아닌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앞으로도 계속 찡그리며 노트북을 봐야 하나요?” 하고 물어보니 의사가 덤덤하게 되묻는다. “매일 모니터를 보셔야 하는 거죠?” “네 그럼요….” “그럼 안경을 맞추시죠.” 갑자기 딴 얘기지만 나는 ‘모니터를 그만 보세요’라든지 ‘일을 줄이십시오’ 같은 처방을 가볍게 말하는 의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지 못하니까 제가 당신을 찾아왔고요.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의사는 내게 요상한 안경을 씌우고 작은 글씨가 적힌 종이를 눈 가까이 댔다. 잘 보이죠? 알을 바꿔 끼우고 말했다. 이러면 더 잘 보이죠? 그리고 방금과 다른 톤으로 우물쭈물 말했다. “그러니까… 이 안경은 멀리 있는 곳을 보는 안경이 아닌… 가까운 곳의 글씨를 더 잘 보이게 해주는 안경입니다….”

처방전을 들고 동네 안경원에 갔다. 테를 고르고 결제를 하려는데 좀전까지 밝고 친절하던 점원이 우물쭈물 말했다. “어… 이 안경은 가까운 걸 잘 보고 싶을 때만 쓰는 거고… 멀리 있는 걸 볼 땐 안 쓰는 거 아시죠…?” 아니 이 사람들. ‘돋보기’라는 단어를 쓰면 하늘에서 물벼락이라도 떨어지는 걸까. ‘돋보기’ 하고 세 음절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왜 저렇게 길게 하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다. 안과 전문의나 안경원 점원이나 저 숙련된 조심스러운 태도엔 분명 이유가 있다. 자신에게 노안이 와서 돋보기를 맞추게 되었다는 사실에 예민해지는 수많은 고객이 있었겠지. 나처럼 허구한 날 앞으로 닥칠 비극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삶과는 다른 것이다. 나는 신날 것도 없고 하늘이 무너질 것도 없는 기분으로 신기한 안경을 하나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과연 돋보기는 신기했다. 정말 가까이 있는 것만 잘 보였다. 영화에서 안경을 코끝으로 내리고 누군가를 쏘아보는 장면이 나오면 그 캐릭터가 까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렇게 해야만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편집자가 계약서를 내밀면 가방에서 미끈한 안경집을 꺼내어 안경을 척 하고 걸쳐 쓸 수도 있게 되었다. 스무살이 될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진짜 어른’이 되는 느낌이었다. 이쯤 되니 10그램 정도 신이 났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어른 항목의 첫 번째 줄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적혀 있다. 곱씹어볼수록 무섭고도 맞는 말이다. 어른이 된다고 더 유능하거나 변변한 인간이 되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책임질 일이 많아지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늙는다는 개념은 어떨까. ‘사람이나 동물, 식물 따위가 나이를 많이 먹다. 사람의 경우 중년이 지난 상태’, ‘한창때를 지나 쇠퇴하다’라고 적혀 있다. 쇠퇴라니. 사전은 종종 잔인하다.

얼마 전부터 가방이나 지갑이 거추장스러워 핸드폰 투명 케이스 뒤에 신용카드를 한장 넣고 다닌다.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 깜짝 놀라 말했다. “아줌마처럼 그게 뭐야!” 순간 많은 생각이 오갔다. 나는 분류상 아마 아줌마일 것이다. 결혼까지 했으니 더욱(?) 아줌마일 것이다. 그럼 아줌마인 내가 아줌마스러운 행동을 했을 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보다 일단 아줌마스러운 행동은 무엇인가. 상상해보았다. 예를 들어 다음달에 상상마당에서 단독공연을 하는 26살 뮤지션 젊은이, 커다란 티셔츠와 넉넉한 품의 바지를 입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데 투명한 케이스는 낡아서 약간 누렇고 거기에 신용카드가 한장 들어 있다. 쿨한데? 하지만 같은 행동을 내가 하면 다르다는 거지?

최근에 인터넷에서 ‘줌내’라는 단어를 보고 크게 놀랐다(굳이 설명하면 ‘아줌마 냄새’라는 뜻이고 나이 든 여성이 단 듯 보이는 댓글에 자주 달리는 조롱이다). 세상은 어린 여성을 뒤틀린 방식으로 환영하고 좋아하고 욕망한다. 앞에도 적었듯 뒤틀린 방식이기에 당사자에게 장기적으로 도움되는 방향이 아닌 경우가 많은데, 그 어린 여자의 시기가 지난 여성에게는 더 가혹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는 듯 보인다.

문화예술계가 40대 이후 여성을 어떻게 취급하는지에 대해 적자면 <씨네21>이 특집을 한권 준비해야 할 듯하니, 이 대목은 아는 사람끼리만 아는 눈빛을 주고받고 넘어가겠다. 그래도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을 위해 부연설명하자면 네이버에 ‘아저씨’라는 단어를 치면 제일 먼저 보이는 얼굴은 원빈이지만 ‘아줌마’라고 치면 첫 페이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야한 그림이 3장 보일 뿐이라는 설명만 하겠다. 그다음 보이는 단어는 아줌마 파마라는 것도.

줌내가 나지 않는, 거슬리지 않는 아줌마가 되기도 쉽지 않은데, 멋진 아줌마가 되기는 더욱 어렵고, 동경의 대상이 되는 아줌마가 되기는 바늘구멍 통과하기다. 떠오르는 사람은 배우 케이트 블란쳇과 김희애인데 너무 구름 위의 사람들이다. 신이 아닌 인간급에서도 가능하면 좋지 않을까? 변변한 어른이 되기도 어렵고, 노화가 진행되는 것도 유쾌하지 않은데, 이 다루기 까다로운 아줌마의 굴레까지 상대해야 한다니. 건조한 안구를 누르며 문화예술 아줌마는 오늘도 상념에 젖는다.

일러스트레이션 EEW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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