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
2021-06-21
글 : 강화길 (소설가)

※이 글에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잠자는 살인>의 일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드라마 <미스 마플>

가장 좋아하는 탐정을 말하라면, 역시 미스 마플이다. 어릴 때는 아니었다. 나는 셜록 홈스에 열광했고, 좀 자라서는 필립 말로와 켄지 그리고 제나로를 좋아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스 마플을 싫어했던 건 아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사실 다른 추리소설들보다 미스 마플 시리즈를 더 많이 반복해서 읽었다. 하지만 어디서도 ‘제인’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선뜻 꺼낸 적이 없었다. 박진감이 좀 없다고 생각했달까.

그래. 더 솔직히 말해보자. 미스 마플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탐정의 모습과 거리가 있었다. 내게 제인은 현장에 가보는 일도 거의 없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뜨개질을 하며 수다만 떠는 할머니에 가까웠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탐정이라면 자고로 혈기왕성하고, 힘도 좀 쓸 줄 알고, 실패도 많이 하며, 인생의 온갖 험난한 일을 다 겪어봐야지. 뜨개질이라니. 너무 온화하잖아.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제인 마플. 그녀야말로 젊은 시절, 온갖 경험을 다 해본 사람이고, 인생의 어느 길목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렇게 나이를 먹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제야 조금 철이 든 나는 미스 마플을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

드라마 <미스 마플>은 총 6시즌까지 있는데, 대부분은 제인 마플이 주인공인 원작을 각색한 것들이지만 애거사 크리스티의 다른 이야기에 제인을 등장시킨 작품들도 있다. 인기가 꽤 많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시즌3 이후부터는 주연배우가 달라진다. 시즌4 이후의 미스 마플도 매력적이지만, 나는 초반 시즌의 배우가 연기한 ‘제인’을 더 좋아한다. 굳이 비교해서 말하자면, 초반의 제인 마플이 약간 더 능청스럽고 장난스러우며, 눈치가 빠른 것 같달까.

물론 나의 주관적인 인상에 불과하다. 뭐랄까, 나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그 앞에서 무엇도 숨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니, 이미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좋아하는 에피소드도 시즌3 안에 더 많다. 그중 하나를 골라 이야기해보자면, 역시 <잠자는 살인>이다. 원작도 정말 좋았지만, 드라마로 각색된 버전도 정말 훌륭하다. 죄책감을 느끼며 21년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 과거를 묻어버리고 싶지만 그 과거가 살아 숨쉬며 나타나는 바람에 도저히 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된 어른들의 이야기.

<잠자는 살인>에는 온갖 장르가 다 뒤섞여 있다. 시작은 고딕소설의 한 장면과 비슷하다. 결혼을 앞둔 21살의 그웨인은 원래 인도에서 살았다. 그녀는 영국에 들어와 신혼집을 찾아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저택을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녀는 저택을 바로 사들이고 공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알 수 없는 기시감이 자꾸만 그녀를 따라다닌다. 양귀비꽃으로 꾸며진 벽지를 주문했더니, 원래 그 집의 벽지가 양귀비꽃 벽지였다든지, 벽을 허물고 문을 만들려 했더니 사실 그 자리에 원래부터 문이 있었다든지(이전 주인이 문을 감추기 위해 가벽을 세웠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자 그녀는 점점 무서워진다. 나는 왜 이 집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있는가. 왜 모든 예감이 다 맞아떨어지는가. 집의 이상한 기운과 분위기가 그녀를 옥죄어온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어떤 장면을 목격한다. 기억한다. 떠올린다. 바로, 계단 아래 복도에서 한 아름다운 여자가 목이 졸려 죽는 장면. 그웨인은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그웨인은 환상에 사로잡혀 벌벌 떨고만 있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찾고, 누군가를 소개받는다. 바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 미스 제인 마플.

자, 여기서부터는 미스 마플의 수사극이 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미스 마플은 그웨인에게 일종의 경고를 한다. “과거를 파헤치고 싶어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처음에는 이해가 안됐다. 미스 마플이야말로 미해결된 사건을 가장 싫어하지 않는가. 하지만 내내 극을 지켜보면서 이해하게 됐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 할머니는 알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과거는 완전히 잊고 싶은 일이며, 진실이 드러나는 걸 막을 수 있다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치부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스 마플이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마플은 모든 사건에는 이면이 있고, 그 이면이 드러나면 누군가는 상처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웨인에게 굳이 그 사실을 경고하는 이유는 아마 마플이 어른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더 인생을 많이 산 사람. “약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배신”하는 세상을 조금 더 많이 아는 사람. 마플은 바로 그런 세상에서 계속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그래도 계속 살아가야 해요.

이야기는 정말로 미스 마플의 충고대로 흘러간다.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극단, 연극, 가수, 정신과 의사, 마약과 불륜! 미스 마플은 이 모든 진실을 탐문으로 알아낸다. 과거를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고, 능청스럽게 설득한다. 재빠르게 눈치챈다. 역시나 뜨개질을 하면서.

하지만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는 건, 미스 마플이 파헤친 ‘진실’만은 아니다. 21년 만에 나타난 살아 있는 과거 ‘그웨인’과 그녀를 애틋하게 지켜보는 ‘휴 혼빔’의 콤비극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은 ‘과거’에 다가갈수록, 서로를 향한 자신들의 진심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이 살인극에는 로맨스도 있다.

사실 특별한 일은 아니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언제나 로맨스에 능했다. 온갖 악독한 인물들 사이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인물들을 슬쩍 밀어넣곤 했다. 아무리 험악하고 끔찍한 일이 있어도, 사랑할 사람들은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비참한 과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듯 말이다. 그렇게 계속 살아가는 것. 나이 먹는 것.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다정한 충고를 건넬 수 있는 어른이 되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이라는 듯이. 아무래도, 미스 마플을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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