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과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좁은 그 공간이 지옥 같았다. 도대체 그는 그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언제 그리고 어쩌다가 그렇게 취해버린 걸까.” 나는 이 문장이 등장하는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초반 부분을 꽤 좋아한다. 자기 연민에 가득 찬 두 남자가 술에 취해 서로의 사정을 토로하다가 말도 안되는 살인 계획을 주고받는 장면 말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 문장은 정신 나간 ‘브루노’의 집착 어린 모습에 섬뜩함을 느낀 ‘가이’의 독백인데, 그 브루노의 계획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내가 너의 아내를 죽일 테니, 너는 나의 아버지를 죽여다오.” 이 제안을 듣고 술이 깨지 않는다면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당연히 가이는 술이 깬다. 하지만 이 소설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이고, 그녀의 주인공답게 가이는 조금 이상하게 군다. ‘네’도 아니고 ‘아니오’도 아닌, 애매한 반응만을 남긴 채 자리를 뜬다. 물론 가이는 자신은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내가 밉기는 하지만 죽일 정도는 아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어 파국이 밀려온다.
역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혐오스러운 인물을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작가인 것 같다. 이게 데뷔작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나의 오해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인물들의 갈등은 사랑했지만, 곤란한 상황에 빠진 자신의 주인공들에게는 별로 애정이 없었던 것 같다(<소금의 값> 같은 작품은 제외하고 말이다). 어쨌든 그녀가 인물들에게 다정하지 않았던 덕분인지, 그들은 늘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끔찍한 고난에 사로잡힌다. 가이 역시 몰랐다. 조금 섬뜩한 농담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그 대화가 실현될 줄 말이다. 하지만 더 끔찍한 건 이제 브루노가 자신의 몫을 받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내가 너의 아내를 죽여줬잖아. 자, 이젠 네가 나의 아버지를 죽여줘야겠지?” 그리고 가이를 집요하게 쫓아다니기 시작한다. 빨리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정말 냉혹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히치콕의 영화와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인물에게 가차 없었던 건 히치콕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소설의 가이가 생각이 많고, 소심하고 방어적인 인물이었던 반면에 히치콕의 가이는 조금 단순해 보인다. 그는 브루노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그의 제안을 진짜 농담처럼 여긴다. 그는 눈치가 없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이 단순함이 너무나도 공포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속이 터졌다. 딱 봐도 브루노는 이상한 사람이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괴기한 말을 했으면 좀 긴장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렇게까지 아무 생각이 없을 수 있는가.
하지만 생각해보면 삶의 지옥은 늘 그런 식으로 찾아오는 것 같다. 주의를 하건 안 하건, 긴장을 하건 안 하건, 느닷없이 갑자기 나타나 인생을 뿌리째 흔들어버린다. 1950년대 당시, 소설과 영화가 인기를 끌었던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가이 입장에서 브루노는 일종의 벼락과 같다. 하지만 그는 느닷없이 닥친 그 시련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알아채고 허둥댄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보통 사람의 얼굴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내게 스릴러나 하드보일드보다는 귀신 영화에 더 가깝다. 대체로 귀신 영화의 원혼들은 (당연히) 살아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죽었고, 살아 있을 때의 기억을 잃었다. 대신 죽는 순간의 억울함과 분노는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관점으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니까 귀신 영화 속의 인간들은 그 원한을 풀어보려고 애쓴다.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려 노력한다. 그래서 귀신이 악한 마음을 품게 된 이유를 알게 된다면, 그것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다분히 인간적인 관점일 뿐이다. 그건 어쩌면 한쪽의 일방적인, 배려 없는 해결책일지도 모른다. 귀신들은 원한을 푸는 데 관심이 없는데 인간들이 그걸 해결해주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거니까.
브루노는 마치 그런 귀신 영화의 원혼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돈이나 다른 것들이 의미가 없다. 오직 하나. 가이가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만이 중요하다. 귀신들이 인간들의 뒤를 쫓아가는 것처럼, 그들을 잡아먹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그는 가이에게 착 달라붙어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란다. 그 과정에서 그는 끊임없이 속삭인다. 너도 원했잖아. 사실 네가 원한 거잖아. 너도 좋지? 내가 네 소원을 이뤄줘서 너무 좋지? 그러니까 이제는 네가 내 소원을 들어줘야지. 약속했잖아. 이건 틀림없는 약속이야. 이걸 어길 셈이야? 살인을 향한 이 집요한 논리는 거의 가스라이팅에 가깝고 가이는 그제야 열차 안에서의 조우를 후회하지만 소용없다.
사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브루노는 가이를 찾아냈을 것이다. 원래 원혼은 그런 법이니까. 다행히 히치콕의 가이는 집념이 있다. 그는 가스라이팅에 휘말리지 않는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브루노는 원혼이고, 그에게 인간적인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원혼의 방식대로 하는 것이다. 둘 중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계속 버티고 버티는 것. 견디고 투쟁해서 이겨내는 것. 꼭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확실히 하드보일드하다. 각본을 맡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방식답게.
반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가이는 조금 다르다. 아니 많이 다르다. 그는 무너진다. “나는 누구든 무너질 수 있다고 믿어요. 내가 당신을 무너뜨릴 수도 있을 거예요.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당신을 무너뜨려 누군가를 죽이도록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고, 자신이 애매한 대답을 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얽혀 들어간다. 그는 그 순간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가 그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궤변은 없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한계까지 몰아붙인 가이의 황폐한 내면묘사를 좋아한다.
작가가 인물에게 애정이 없다고 했지만, 결국 나 역시 그렇게 쓰인 문장들을 읽으며 좋아하는 것이다. 죄의식을 느끼지만 동시에 거기서 기쁨을 느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원혼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직 하나의 감정만 남아버린 존재. 그것 외에는 원하는 것이 없는 탐욕스러운 존재.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가장 냉정하게 군 존재는 어쩌다 그녀의 책을 마주친, 나 같은 낯선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