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트립 투 그리스' 그리스 투어를 떠나는 오랜 콤비의 여정
2021-07-02
글 : 김소미

“우리 거의 10년간 이렇게 여행했잖아. 그럼 거시적인 의미에서 우리도 10년간 오디세이를 쓴 거라고.”(롭 브라이던) <오디세이> 속 오디세우스의 모험담을 따라 그리스 투어를 떠나는 오랜 콤비의 여정에 이보다 더 뻔뻔하고 적절한 농담이 있을까. 영국의 걸출한 코미디 배우 둘,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던이 <트립 투 잉글랜드>(2010)에서 시작한 인연을 <트립 투 이탈리아>(2014), <트립 투 스페인>(2018)을 거쳐 <트립 투 그리스>에서 마무리 짓는다. 호화로운 파인 다이닝과 역사적 명소들의 우아한 이미지 위로 엉뚱한 익살과 개인기를 덧대는 능청스러움은 여전히 기세 좋게 유쾌하다.

그동안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던을 여행하게 만든 건 영국 잡지 <옵서버>의 미식 여행 기획 덕택이다. 에디터들은 종종 두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일정을 무사히 소화하고 있는지 확인하곤 하는데, 수화기 너머로도 저들끼리 쉼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기 바쁜 경쟁적 만담 탓에 채 한마디를 이어가기 쉽지 않은 에디터의 고역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마디로 ‘업무적 미식’은 콧대 높은 두 배우의 여행을 거들 뿐이다.

아름다운 해변가와 목가적인 정원에 테이블을 펼쳐 놓은 남자들은 그리스신화와 오디세이,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로 운을 뗀 다음 온갖 대중문화 속 아이코닉한 순간들로 뛰어든다. 매끄러운 연결점이나 적당한 맺고 끊음 따위는 결단코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아느냐고 면박을 준 뒤 <해리 포터>의 조앤 K. 롤링을 나란히 놓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읊은 뒤 배우 톰 하디의 성대모사(<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베인)를 덧붙인다. 적당히 끊어도 될 이야기를 하염없이 장광설로 이어가는 일도 부지기수다. 시리즈 내내 우려먹는 말론 브랜도 성대모사 역시 <트립 투 그리스>에서 빠지지 않는다.

귓가가 어수선한 사이 시야엔 휴양 여행다운 볼거리가 가득하다. 미식이 아무리 덤이라 해도 남자들의 신랄한 수다가 진행되는 동안 마이클 윈터바텀의 카메라는 레스토랑의 키친 풍경을 담아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분주한 셰프들의 움직임, 파인 다이닝부터 로컬 푸드에 이르는 음식의 향연이 코스에 맞춰 착실히 진행되는 과정이 펼쳐진다. 주변을 살피는 윈터바텀 감독의 다큐멘터리적 화면 위로 자신들의 실제 사생활과 출연 작품들을 교묘히 섞어내는 두 배우의 대화가 더해지면 어느새 리얼리티의 경계가 묘하게 흐려지기도 한다. 이 또한 <트립 투…> 시리즈의 묘미다.

아름다운 데다 웃기기까지 한 여행에 잡념이 끼어들기란 쉽지 않지만 시리즈의 최종장을 그리스에서 마무리 짓기로 한 마이클 윈터바텀은 까끌한 현실의 조각 하나를 구태여 집어넣었다. 여유롭게 첫끼를 마친 두 배우가 조우하는 인물은 스티브가 이전 출연작에서 함께 공연한 난민 출신의 배우 카림이다. 카림을 그가 사는 난민 캠프까지 데려다주기로 한 스티브와 롭은 난민 캠프의 실제를 둘러보는 것으로 사실상 자신들의 오디세이를 시작한다. 유럽과 그리스의 정치적 지형도를 의식한 설정이 다소 피상적으로 머무르는 가운데 두 남자를 근심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도 그림자를 불려간다.

지난 10년 사이, 그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나이듦을 자각하게 됐다. 오프닝 신부터 이미 여행지에 도착해 유유자적한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이 시리즈의 전통인데 시리즈가 거듭할수록 인물들은 여행의 정취와 신비에 온전히 잠기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웃음기 가득하지만 한없이 얇은 일상의 표면 아래에는 생을 겉도는 듯한 그들의 공허감이 종종 투명하게 비친다. 여유로운 중년 백인 남성의 부르주아적 여행기인 <트립 투 그리스>의 멜랑콜리를 마냥 시시하게 치부하기만은 어려운 이유다. 꿈같은 6일간의 그리스 투어는 그렇게 적당히 즐겁고 적당히 복잡한 그들 각자의 사정으로 남는다.

CHECK POINT

대리만족이란 이런 것

팬데믹 시대에 만나는 호화 여행담은 분명 눈을 즐겁게 한다. 탁 트인 그리스 해변이 한눈에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한끼에 300유로(약 40만원)가 넘는 식사를 즐기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몽상에 젖어든다.

시네마틱 성대모사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던이 따라 하는 대상은 실존 인물과 유명 영화 캐릭터는 물론, 치과 장비와 같은 사물에 이르는 놀라운 범주를 보여준다. 현실에서 맞은편 상대가 밥을 먹다 말고 고질라를 따라 한다면 도망치고 싶을 테지만, <트립 투 그리스>에서는 팔짱을 끼고 쿡쿡대며 지켜볼 수 있다.

그리스신화 속으로

“그리스 신 중에서 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누가 되고 싶어?” 롭 브라이던이 묻자 스티브 쿠건은 이렇게 답한다. “아, 난 이미 된 적이 있는데 말이야. <퍼시 잭슨과 번개 도둑>에서 하데스를 연기했거든….” 그리스를 여행하는 배우들이기에 할 수 있는 진귀한 대화들의 면면 또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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