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의 함정>
제작 태창흥업주식회사 / 감독 이만희 / 상영시간 85분 / 제작연도 1974년
이만희 감독이 충무로에 분명한 존재감을 각인시킨 것은 네 번째 연출작 <다이알 112를 돌려라>(1962)에서다. 할리우드 스릴러 장르 스타일을 한국영화의 것으로 소화해내 관객과 평단 모두로부터 고른 지지를 받았다. 미모의 상속인, 밤거리에서 그녀를 폭행하는 남자와 구해주는 남자, 또 예전에 동거하던 남자가 얽히는 이야기인데, 사실 세 남자는 여자가 받은 상속금을 빼앗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특히 주인공 현주가 예전 남자를 기차 밖으로 떨어뜨리는 장면이 담긴 열차 신이 주목받았다. 스릴과 서스펜스를 제대로 구축해낸 정교한 연출은 동시대 한국영화의 기준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만희는 자신의 출세작이 된 이 영화에 애정이 컸던 것 같다. 영화는 두번 더 만들어졌는데 1969년작 <6개의 그림자>와 1974년작 <삼각의 함정>이다. 아쉽게도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시나리오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는 1962년작에 비해 1969년과 1974년 리메이크 버전은 온전한 감상이 가능하다.
<6개의 그림자>는 당시 광고 문구를 그대로 빌리자면 서스펜스, 스릴러, 섹스를 앞세워 장르영화의 쾌감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문정숙이 맡았던 약사 현주를 윤정희가, 최무룡, 박노식, 장동휘가 맡았던 새로운 남자, 옛날 남자, 불량배 역은 각각 신성일, 남궁원, 허장강이 새롭게 소화해 장르적 설득력을 배가시켰다. 시그니처 장면인 열차 신 역시 1962년 버전보다 더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 음악 없이 기차 사운드만 얹은 과감하고 빠른 컷 편집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다.
<삼각의 함정>은 이만희의 필모그래피 51편 중 50번째 작품이다. 한국영화 제작이 끝없는 불황과 침체의 시기로 접어든 1970년대 중반, 그 역시 쇠락하는 영화계와 운명을 함께하고 있었다. 방화라는 멸칭으로 불리던 한국영화는 외국영화 수입쿼터를 따내는 수단으로 전락했고, 제작사들은 큰 고민 없이 저예산 졸속영화를 양산하고 있었다. 1974년 시점 당국은 한국영화 3편을 만들면 외화 수입쿼터 1편을 배당했는데, 조건이 강화된 이듬해에는 한국영화 6편당 1편이 되었다.
1960년대의 문예영화 같은 우수영화 부문도 계속되었지만 제작자들은 액션, 에로 장르의 저예산영화를 만드는 쪽을 택했다. 이즈음 등장한 것이 테크니스코프 영화다. 네거티브필름의 반 프레임씩만 촬영할 수 있는 테크니스코프 방식은 기술적 완성도를 다소 포기하더라도 제작비를 절감하는 좋은 방편이 되었다. 1973년부터 시네마스코프와 함께 와이드스크린을 양분한 포맷이다.
1970년대의 이만희
이만희는 테크니스코프로 제작한 세 번째 버전에서, 전작들의 어떤 요소를 유지하고 또 어떤 방향을 새롭게 찾고 싶었던 걸까. <삼각의 함정>은 1962년과 1969년 버전의 원형적인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무엇보다 멜로드라마의 분위기가 강화됐다. 마치 멜로와 액션 스릴러라는 두 장르 트랙을 능숙하게 오가는 느낌이다.
음악 역시 장르 성격에 맞춘 두 가지 메인 테마가 경제적으로 반복된다. 스타일도 확연히 다르다. 짧은 숏을 나열하는 감각적인 편집은 여전하지만 마지막 작품 <삼포가는 길>에서 정점을 찍게 될 유려한 카메라 움직임이 작품 전반을 지배한다. 그의 새로운 페르소나 문숙이라는 존재도 특별한 장르적 질감을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전작의 윤정희가 장르의 일부로 잘 녹아들었다면, 이 영화는 배우 본연의 매력을 더 부각시키는 쪽을 택한다.
영화는 패션 디자이너 지숙(문숙)이 숙모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전작에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은 내용을 인트로에 구성한 것은 이 영화가 지숙의 멜로 파트를 강화하겠다는 포석으로 보인다. 변호사는 유산 상속의 전제 조건은 결혼이지만 대학 시절 지숙을 납치해 감금하고 임신시킨 상국(오지명)은 제외라고 말한다. 밤늦게 도착한 지숙은 집 앞에서 기다리던 불량배 춘호(백일섭)에게 폭행당하고 학원강사 영일(유장현)이 나타나 구해준다. 지숙은 영일과 사랑에 빠지지만 출옥한 상국이 찾아와 영일과 결혼한 후 자신에게 유산을 배분할 것을 요구한다. 대전행 기차에 상국과 같이 탄 지숙은 그를 기절시키고 열차 밖으로 밀어낸다. 상국을 죽였다고 생각한 지숙은 영일과의 결혼으로 보상받으려 하지만, 신혼여행을 떠나려는 순간 영일은 모든 것이 연극이었음을 밝힌다.
영화는 멜로 트랙과 액션 스릴러 트랙을 마지막까지 병행시킨다. 사실 이만희는 첫 번째 버전 <다이알 112를 돌려라>부터 멜로와 스릴러를 혼합한 장르를 의도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세 번째 버전은 멜로 파트가 전면으로 부각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자세한 설명 대신 영상 이미지로 관객에게 말을 거는 이만희 특유의 화법을 가동시킨다.
<만추>(1966)는 사라졌지만 대신 <휴일>(1968)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 감각들이다. <삼각의 함정>은 초반 데이트 장면뿐만 아니라 영화 곳곳에서 <휴일>의 정서적 그림자가 감지된다. 한편 <삼각의 함정>이 전작과 달라지는 결정적인 지점은 공권력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제목 그대로 <다이알 112를 돌려라>와 <6개의 그림자>는 예전 남자의 공격을 온몸으로 막아낸 새로운 남자가 죽어가며 112에 신고하고, 덕분에 주인공 현주는 구출된다. 하지만 1974년작은 국가라는 존재를 아예 지워버린다.
멜로와 스릴러의 이중주
영화의 마지막, 지숙은 큰 부상을 입은 영일과 철교 위에서 만난다. 전작들에서는 예전 남자가 현주를 기차 밖으로 떨어뜨리려는 아찔한 장면으로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냈다면 <삼각의 함정>에서는 얼굴 반쪽에 상처를 입고 나타난 상국이 철교 난간에서 영일을 칼로 찌르고 지숙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이때 멜로 파트의 테마곡이 흐르며 이 영화의 본질이 멜로드라마였음을 드러낸다. 영일은 필사적으로 상국을 막고 절명의 순간 혼신의 힘을 다해 그와 같이 철교 밑으로 떨어져 죽는다. 어느 새벽 검은 망토를 입고 철교에 나타난 지숙이 명복을 비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버전의 열차 신을 비교해보는 것은 이 시리즈를 감상하는 가장 근사한 방법이다. 상국의 협박을 받던 지숙의 빅 클로즈업 숏에서 기차 사운드가 먼저 들리며 열차 신으로 넘어가고, 상국을 떨어뜨린 지숙이 충격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도와줘”라고 손을 뻗는 모습은 결혼식에서 지숙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장면으로 연결된다. 경지에 오른 이만희는 전작의 요소들을 취하면서도 압축적이고 세련된 호흡으로 새로운 열차 신을 완성시켰다. <삼각의 함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이만희의 마지막 장르 탐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