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의 이소룡을 표방한 멋진 액션으로 악당들을 물리친 한 남자가 시한폭탄에 포박된 여성에게 다가간다. 해피엔딩을 코앞에 둔 상황, 폭발 장치의 모니터 위로 대뜸 이런 문구가 떠오른다. “다음 사례에서 A씨의 아내가 받는 상속액은?” 액션히어로에게 서울시 9급 공무원 시험 문제가 웬 말인가 싶어 야속할 무렵, 대학생 주성(이석형)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꿈에서 풀려난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코리안 판타스틱: 경쟁’ 부문에 초청된 이진호 감독의 <액션히어로>는 청년 세대의 우울한 현실을 유쾌한 무술 활극으로 풀어낸 코믹 액션물로 남다른 재기가 돋보인다. 게임과 애니메이션 업계, 이창동 감독의 <버닝> 연출부를 거쳐 자기 취향이 분명한 데뷔작으로 부천에 등장한 이진호 감독을 만났다.
-취업 준비생 주성, 입시 비리를 목격한 대학원생 조교 선아(이주영)의 이야기는 다분히 사회적 이슈를 품고 있지만, 영화의 본성은 결국 옛 홍콩 영화 스타일의 무술 활극에 있다. 두 조합이 흥미로운데, 어떤 과정을 거쳐 고안된 컨셉일까.
=처음엔 그저 내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 대학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걸 쓰려고 했다. 다른 일을 하다가 20대 중반에 영화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시나리오를 쓰려고 도서관에 가면 모두가 같은 공시 공부를 하고 있더라. 매일 그 모습을 반복해서 보면서 학생들 안에 어떤 활기가 억눌러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처음 대학에 입학할 때 그들이 가졌을 꿈이 궁금해졌다. 물론 개인적으로 홍콩 액션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드라마와 액션을 결합하고 그 괴리에서 재미를 만들겠다는 의도를 품었던 건 아닌데,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내가 처해있는 환경과 좋아하는 장르가 자연스레 뒤섞이게 됐다.
-주인공 주성과 선아의 상황은 다분히 힘겨운 청년 세대의 상황을 표상하지만 <액션히어로>는 이들의 심리를 절망이 아니라 해학으로 풀어내고 있어서 유쾌하다.
=나도 주인공 친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을 통과해왔다. 88만원 세대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던 시절이었다. (웃음) 서른 살 무렵에야 20대를 온전히 통과하고 나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만 청년 세대를 묘사하면서 좌절하고 낙담하는 정서를 부각하고 싶진 않았다. 암담한 상황을 스스로 넘어서는 어떤 해탈의 태도가 지금의 청춘들에게 있다고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일상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청년을 덜 대상화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무협의 태도와도 닮아있는 접근 같다. 호쾌한 웃음이나 기합으로 상황을 돌파하거나 은근한 체념의 태도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
=하하,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장르 팬으로서 무협 세계의 원리에 익숙해져 있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청년들이 내내 좌절만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극복한다는 식으로 단순화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 각자의 ‘득도’ 과정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 연출부였다. 공교롭게도 청년 세대의 담론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
=<버닝>과의 비교는 너무 조심스럽다. 어쩌면 내가 <액션히어로>를 만들기로 하고 조금 덜 진지한 접근을 하기로 한 데에는 이창동 감독님의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감독님께서 이미 거기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는 전부 다 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20대 중반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입학했다. 영화 일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군대에서 근무를 서다가 우연히 라스 폰 트리에의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영화를 해야겠다는 확신이 섰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는 게임 개발, 3D 애니메이션 개발 등의 일을 했다. 영화를 비롯한 모든 매체의 미래로서 게임이 자주 거론되지만, 아직은 게임의 서사나 세계관이 판타지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 내겐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더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가 컸다. 물론 앞으로 OTT 플랫폼이나 인터랙티브 시네마 분야에서 기회가 있다면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다.
-배우 이주영과 이석형은 인디 신 안에서도 유독 자기 색이 분명한 재미있는 배우들이다. 어떤 면면을 보고 캐스팅했나.
=<액션히어로>의 분장실장이 <꿈의 제인> 때 이석형 배우와 함께한 적이 있어서 내게 적극 추천을 해주었다. 주성이란 인물은 끝까지 순수함을 가지고 가야 해서 배우가 품은 자기만의 천진난만함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석형 배우를 만나자마자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오래 태권도를 한 배우라 몸이 굉장히 유연해서 안성맞춤이었다. 이주영 배우 역시 첫 미팅에서부터 굉장히 순수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선아는 내면에 선함을 조용히 품은 인물인데, 주영 배우에게서 그런 곧고 선한 성품을 느꼈다. 모델 출신이라 시원시원한 액션을 보여줄 거란 기대도 있었다.
-<액션히어로>는 숏의 기능을 고민하고 이에 부지런한 코미디 영화라는 점에서 특히 반가웠다. 오마주의 색채가 분명한 몽타주나 편집의 리듬을 잘게 쪼개서 만들어내는 재미가 있더라.
=코미디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카메라 앵글의 재미, 편집적인 재미를 많이 시도해보려 했다. 입시 비리 이후 협박범에 의해 궁지에 몰린 차 교수(김재화)가 결국 상관에게 사실을 보고하게 되는 장면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상부로 올라가면서 “그걸 왜 이제야 보고하십니까”라는 대사가 사람만 바뀌면서 계속 반복되는데, 점진적으로 연기톤과 카메라 앵글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설계했다.
-B급 액션 코미디라는 이유로 액션 신 연출에 다소 게으른 영화들도 더러 있는데, <액션히어로>의 주인공들은 아날로그한 액션을 완성도 있게 선보이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액션히어로>를 만들면서 무술감독님께 성룡 식의 맨손 액션을 주문했다. 80~90년대 맨손 액션에 주변 집기와 사물들을 많이 활용하는 스타일로 만들었다. 요즘 홍콩 액션 영화들은 만듦새는 좋지만, 옛날에 우리를 즐겁게 했던 특유의 아날로그한 맛이 모두 사라진 것 같다. 보고 싶은데 더 이상 나오지 않으니 그럼 내가 만들자는 마음이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