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사악한 마음
2021-07-19
글 : 강화길 (소설가)

* ‘강화길의 영화 -다른 이야기’는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어둠의 여인>

어느 순간 문득, 아무 이유 없이 눈앞에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어린 시절 친구가 악어모양 젤리를 나눠주던 모습, 느닷없이 선생님에게 불려나가 칠판 앞에 섰던 순간, 첫 소설을 완성했던 때, 해외여행에서 돌아오던 비행기 안의 풍경. 때때로는 소설의 어느 문장이 생각나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영화나 드라마의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기억. 순간. 그때 고인 어떤 감정들.

<어둠의 여인>은 그런 방식으로, 그런 감정으로 내가 자주 기억하는 영화다. 그러니까 나는, 딸 도르사와 함께 거의 맨몸으로 집을 뛰쳐나온 엄마 시데가 경찰에 붙잡히는 순간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히잡을 쓴 채 경찰서에 가만히 앉아 있는 순간까지도. 그때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체념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빨리 경찰의 훈계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다. 나는 그 얼굴이 조금 익숙하다. 그러니까 그런 일에 자주 시달려본 여성의 자기방어적인 얼굴 말이다. 그 표정에는 어떤 기대도 담겨 있지 않다. 그리고 조금은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훈방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장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는 걸 두려워하는 이 여자의 얼굴을 자주 기억하곤 한다.

이란은 전쟁 중이고, 폭격으로 집의 일부가 무너졌다. 그 안에서 정체 모를 악령이 돌아다니며 도르사를 꾀어내려고 한다. 그녀가 돌아가야 하는 집은 바로 그런 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을 나올 수도 없다. 이미 경험하지 않았는가. 이 세상은 그녀가 아이를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는 것보다, 밤중에 히잡도 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더 문제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바깥이라고 해서 안전한 것도 아니다. 그곳에는 정체 모를 악령만큼 무서운 것이 있다. 폭격, 습격, 총격…. 그 때문일까. 나는 뭔가 힘든 순간이 오면, 시데의 표정을 떠올리곤 한다. 아니, 시데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마치 이 영화에서 악령이 갑작스럽게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 이후에 공포만을 남겨놓는 것처럼, 그녀는 내게도 어떤 흔적들을 남긴 채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떠오른다.

왜 나는 시데의 피곤한 얼굴이 떠오를까. 그리고 모든 것을 해내야 한다는 이 압박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가끔은 영화 속에서 악령이 시데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던 것처럼 누군가가 ‘너는 제대로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일침을 놓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누군가의 칭찬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 어느 것도 원하지 않는다. 사실 내가 바라는 것은 내 마음을 흔드는 어떤 사악한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그 끝없는 불안감의 원인은 나의 내면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나는 그 감정이 나를 벼랑 끝에 세우지 않도록 노력하고, 노력한다.

어떻게 보면 악순환이다. 일을 잘하려고 노력하고, 주어진 것들을 다 해내려고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일상을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공포감이라는 것은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장면들처럼 나의 어떤 순간들을 잠식해 들어온다. 이전에는 그런 감정으로부터 피하려고 노력했다. 피하는 방법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했다. 시데가 도르사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며 악령을 부정하고, 집에서 일어나는 말도 안되는 일들을 다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다. 악령의 목표는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건 시데에게 가장 소중한 것. 도르사를 훔쳐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시데는 악령이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딸을 지킬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 과정은 그렇게 깔끔하지 못하다.

차별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 이란 여성.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대에 갔지만, 정치적 시위에 뛰어든 적이 있고, 그 경력 때문에 퇴학을 당했다. 반면 남편은 버젓이 의사로 살아가고 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어찌 보면 가정뿐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것을 정말로 원했는가. 그녀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느끼는가. 그녀의 피로한 얼굴은 단지 전쟁 때문인가. 시데는 도르사에게 자주 이렇게 말한다. “엄마가 널 사랑하는 거 알지?” 그녀는 정말로 도르사를 사랑한다. 하지만 화가 난다.

도르사의 행동이, 말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녀를 미칠 것 같게 만든다. 그래서 아이에게 화를 내고, 엄격하게 굴고, 결국은 때린다. 그리고 후회한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지금도 피한다. 사악한 마음을 말이다. 스스로를 찌그러뜨리려는 마음을 모르는 척하려고 애쓴다. 심리를 다루는 많은 책에서는 문제와 대면하라고 말한다. 그 책을 읽고 있는 순간에는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긴 한다. 하지만 막상 마음이 무거워질 때면 모르는 척하게 된다. 엉망진창인 마음을 들여다보며, 내가 진짜로 최악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만큼, 아직 내가 강한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번에 나는 <어둠의 여인>을 다시 보고 새로운 장면을 기억하게 됐다. 그건 시데가 꿈을 꾸는 장면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악령이 눈앞에 있다. 시데는 중얼거린다. “나를 데려가.” 처음에 이 영화를 봤을 때,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다. “도르사가 아닌 나를 데려가.”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그건 어쩌면 “부디 나를 데려가. 나를 데려가줘”, 이런 의미가 아닐까. 아아, 시데 역시 약한 사람이구나. 나는 이 장면을 몇번이나 돌려보았고 결국은 조금 울었다.

왜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너그러울 수 없을까.

하지만 그런 시데를 깨우는 건 역시나 도르사의 비명이다. 아이는 엄마에게 자기 손을 놓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엄마, 나를 두고 가지마”라고 말한다. 시데는 그렇게 한다. 마음이 어떻든 간에, 그렇게 한다. 어쨌든 시데는 도르사를 사랑하니까. 아직 사악한 마음에 무너질 만큼 절망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두 사람은 다시 집을 뛰쳐나온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조금 낯부끄러운 말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장르이든, 영화를 볼 때면 항상 그렇다. 인물들이 삶의 바닥을 딛고 일어나 걸어 나가는 장면을 보면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든다. 나도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인 것 같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쓴다. 삶의 순간마다 그 장면들을 떠올린다. 낯부끄러운 용기를 불러온 어떤 장면들. 구절들. 사악한 마음을 찌그러뜨린 사람들의 얼굴. 지금 이 순간을 부디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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