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희의 SF를 좋아해]
[이경희의 SF를 좋아해] 함교 위의 투쟁
2021-07-29
글 : 이경희 (SF 작가)
<스타트렉>

TV시리즈 <스타트렉>의 제작 비화를 다룬 다큐멘터리 <함교 위의 혼돈>에 소개된 일화 하나. 1980년대 말 <스타트렉>의 두 번째 시리즈인 <스타트렉: 더 넥스트 제너레이션>의 캐스팅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 한 배우가 제작진 앞에서 역사적인 오디션을 보게 된다. 그의 이름은 패트릭 스튜어트. 그는 그때도 대머리였다. 스튜어트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제작진은 난색을 표했다. 왜냐하면 대머리였으니까.

그들을 위해 짧게 변명하자면 당시는 1980년대였다. 거액의 투자가 결정된 TV시리즈의 주인공으로 머리카락이 없는 배우를 발탁하는 것이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제작진은 쉽사리 결정하지 못한 채 주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시리즈의 총책임자인 진 로든베리가 이런 말을 던졌다고 한다.

“24세기잖아. 아무도 대머리는 신경 안 쓸걸?”

조금 더 과거로 돌아가서, 1966년 <스타트렉>이 역사적인 방영을 시작하던 때를 살펴보자. 당시 엔터프라이즈호의 함교는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부함장은 귀가 뾰족한 외계인이지 조타수는 이소룡을 닮은 동양인 남성인 데다 통신 장교는 여성, 그것도 흑인 여성이었다. 심지어 항해사인 체코프는… 맙소사, 미국 드라마에 소련 사람이라니. 그 꽉 막힌 60년대 미국인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진다.

물론 주인공인 커크 선장은 백인 남성이었고, 부함장 스팍도 귀가 조금 뾰족하다 뿐이지 백인 남성 배우가 연기했다. 그외 비중 높은 주역들도 백인 남성들이 차지했고. 에피소드마다 찢어진 수영복 비슷한 옷을 입은 외계인 여성들이 등장해 주인공 커크와 연애 같은 걸 하기도 한다. 도대체 왜 그 많은 외계인들이 인간 여성처럼 생긴 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쯤에서 또 한번 변명을 덧붙여야겠다. 당시는 1960년대였다.

본편의 인기를 이어받은 두 번째 시리즈 <스타트렉: 더 넥스트 제너레이션>에서는 함교에 여성과 흑인의 비중이 조금 더 늘어난다. 멤버 중에는 외계인, 시각장애인, 로봇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인공지능 로봇인 데이터와 선장 피카드가 인간성에 대해 논의해나가는 과정은 이 작품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 중 하나다.

<스타트렉: 더 넥스트 제너레이션>은 인간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뿐 아니라 당대의 주요한 사회 이슈였던 냉전, 마약, 기계 산업화, 문명의 충돌과 같은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어왔다. 시리즈 최대의 적인 보그부터가 전체주의를 강요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고약한 은유다. 개인을 말살해 기계 부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들 종족을 두고 혹자는 공산주의에 대한 풍자라 주장하기도 하는데, 내가 보기엔 딱히 미국 사회도 이 풍자에서 자유로운 것 같지는 않은 듯하다. <스타트렉: 더 넥스트 제너레이션>의 폭발적인 성공에 힘입어 <스타트렉> 시리즈는 여러 편의 후속작을 동시에 론칭한다. <스타트렉: 더 넥스트 제너레이션>과 동시기를 다루는 스핀오프 <스타트렉: 딥 스페이스 나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인공인 사령관 시스코를 흑인 남성으로 설정했다.

<스타트렉: 딥 스페이스 나인>은 여타 작품들와 달리 우주선이 아닌 우주정거장을 배경으로 하는데,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이 무척 재미있다. <스타트렉: 딥 스페이스 나인> 속 정거장이 위치한 행성 ‘베이조’는 약 40년간 ‘카다시안’이라는 외계 종족의 지배를 받다 이제 막 독립한 정치적 걸음마 상태다. 겨우 수립된 임시정부는 위태롭고, 독립운동 세력의 파벌 갈등은 격화되고 있다. 이들이 분열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종교다. 이쯤에서 혹시 어떤 나라가 떠오르진 않는지?

침략자 카다시안은 여전히 베이조를 정복할 궁리로 가득한데, 왜냐하면 이곳엔 아주 먼 우주까지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웜홀’이 있기 때문이다. 딥 스페이스 나인은 스타트렉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이자 온갖 외계 종족들이 모여드는 무역의 중심지다. 그야말로 우주의 문명과 문화가 충돌하는 최전방에서 우리의 주인공들은 우주적 스케일로 부딪치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율하려 노력한다. 슬프게도 그 끝은 커다란 전쟁으로 이어지지만.

특히 <스타트렉: 딥 스페이스 나인>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정말 훌륭한데, 개인적으로 <스타트렉>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오프닝으로 꼽는다. 복잡하게 얽힌 정치 관계를 이해하기 쉽게 소개하는 동시에, 외계 존재와의 접촉을 그리며 인간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더하고, 시스코 사령관의 개인적 사연까지 함께 풀어내며 캐릭터의 성장까지 완성하는 구성은 그야말로 각본의 교과서라 부를 만하다.

<스타트렉: 딥 스페이스 나인>보다 1년 늦게 방영을 시작한 <스타트렉: 보이저>에서는 드디어 여성 함장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불의의 사고로 먼 우주에서 표류하게 된 보이저호의 대원들과 분리주의 테러 집단 마퀴의 대원들이 힘을 합쳐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이 작품은 등장인물의 성비와 인종, 문화적 배경을 세심하게 배분하려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이 작품은 국내에서 방영되기도 했는데, 매주 방영시간을 기다리며 일주일을 버텼던 기억이 난다. 때문인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언제나 <스타트렉: 보이저>를 1순위로 언급하곤 한다. 나의 최애 에피소드 역시 <스타트렉: 보이저> 시즌4의 <지옥 같은 한해>(Year of Hell)다. 시간을 자유롭게 다루는 외계 종족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적대 행성의 과거를 말살한다는 이야기로, 시간 여행 장르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에피소드라 자신할 수 있다.

이후 방영된 <스타트렉: 엔터프라이즈>는… 모르겠다. 나는 보지 않았다. 당시는 한창 <배틀스타 갤럭티카>가 방영되던 시기였다. 대진운이 좋지 않았달까. 브리지 멤버 기준에서도 <스타트렉: 엔터프라이즈>는 한참 퇴보했다. <스타트렉: 엔터프라이즈>는 흥행에 실패하며 조기 종영을 맞이한다. <스타트렉: 엔터프라이즈>의 흥행 실패로 <스타트렉> 시리즈는 한동안 차기작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J. J. 에이브럼스가 극장용 영화로 원작을 리부트해 조금씩 다시 불이 붙더니, 몇년 전부터 최신 시리즈인 <스타트렉: 디스커버리>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이번엔 과연 함교 멤버가 어떻게 구성되었을까? 일단 1화가 시작되자마자 사막을 걷고 있는 함장과 부함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선저우호의 함장인 필리파 조지우는 동양인 여성. 그리고 부함장인 마이클 버넘은 흑인 여성이다. 기대에 부푼 마음도 잠시, 선저우호는 이내 전투에 휘말려 침몰하고, 주인공 버넘은 디스커버리호로 전출된다. <스타트렉: 디스커버리>의 함교 구성 또한 <스타트렉: 보이저>만큼이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특히 성소수자 인물들을 여럿 배치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 버넘이 함장이 아니라는 점과 함장이 수시로 교체된다는 점이다. 시즌3까지 진행된 현시점에서 디스커버리호의 함장은 ‘사루’라는 이름의 외계인이다. 이제 외계인 함장의 시대까지 온 것이다. 그는 포식자 종족에게 핍박받는 소수 종족 ‘켈피언’으로, 작중에서 가장 사려 깊고 다정한 인물로 묘사된다. 정말이지 그는 사랑스러운 캐릭터다.

1966년 방영이 시작된 이래 <스타트렉> 시리즈는 늘 윤리를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자 노력했다. 스타트렉 우주의 함교 멤버들은 당대 미국 TV시리즈의 진보성을 보여주는 지표와도 같다. 이제 곧 방영이 시작될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시즌4에서는 또 한번 함장 교체가 이루어질 모양인데, 이번엔 어떤 인물이 함장 자리에 앉게 될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모두가 예상하는 그 사람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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