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2일부터 17일까지 열리는 제17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로부터 명랑한 초대장이 날아왔다. 첫장에 적힌 슬로건은 ‘다짐: BE JOYFUL’.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일상의 즐거움을 영화와 음악으로 되찾자는 의지를 담은 이 문구는 팬데믹으로 인한 어려움 속에도 영화와 영화제가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제천을 찾은 작품에도 혼란 속에서 음악을 지속하는 이들의 사연과 마음이 저마다의 빛깔로 깃들어 있다. 성별과 인종, 국적과 전공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온 이들의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제천의 자연을 느끼며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추천작 10편과 공연 프로그램 등을 소개한다. 5박6일간의 축제에 동행할 대표 영화인인 올해의 큐레이터, 올해의 짐페이스도 함께 전한다. 상영작 일부는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 웨이브(wavve)에서도 즐길 수 있다.
빌리 홀리데이 The United States vs. Billie Holiday
리 다니엘스 | 미국 | 131분 | 2021년 |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노래 한곡으로 정부의 적이 된 여자가 있다. 그가 주인공인 전기영화의 원제는 ‘미국 대 빌리 홀리데이’.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1940년대 미국, 당대의 스타이자 전설적 재즈 가수 빌리 홀리데이는 1939년에 발표한 <Strange Fruit>로 FBI에 눈엣가시가 된다. 나무에 열매처럼 매달려 린치를 당한 흑인들의 고통을 은유한 가사가 소수자들을 선동할 수 있다는 억지 때문. 빌리가 노래를 포기하지 않은 대가는 가혹하다. 약에 취해 무대 밖 현실을 견뎌온 빌리는 주로 연방 마약국의 표적이 되어 옥살이는 물론 숱한 감시와 단속에 시달린다.
빌리 홀리데이가 1959년 44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질곡을 묘사한 이 영화는 에디트 피아프의 <라비앙 로즈>, 주디 갈런드의 <주디>를 연상시킨다.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험난한 시절을 견뎌야 했던 여성 뮤지션의 일대기로도, 진실한 사랑과 우정을 꿈꾼 한 인간의 고백록으로도 절절하게 다가온다. <프레셔스>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 등을 연출해 흑인 캐릭터의 지평을 넓혀온 리 다니엘스 감독의 작품으로, 빌리 홀리데이로 분한 배우 앤드라 데이가 제7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티나 TINA
댄 린제이, T. J. 마틴 | 미국 | 119분 | 2020년 | 개막작
티나 터너의 삶을 압축한 다큐멘터리에 붙은 <티나>라는 제목은 어쩐지 심심하게 들린다. 마이크를 쥐면 감전되듯 터지는 허스키한 음색, 리듬에 맞춰 촉수처럼 흔들리는 몸짓, 흥을 주체 못하듯 객석으로 뻗치는 야성적인 머리칼까지 온통 비범한 그에게 좀더 걸맞은 문구는 없었을까. 아쉬움에 질문을 던져봤지만 <티나>는 곱씹을수록 필연적인 타이틀이다. 이 영화는 1939년 목화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애나 메이 불록이 음악적 파트너이자 훗날 남편이 된 한 남자를 만나 티나 터너가 되고, 그와의 결별로 이름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지만 끝내 티나라는 정체성을 지켜내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초반은 티나 터너와 아이크 터너의 관계에 집중한다. 아이크의 등장이 티나의 커리어에 터닝 포인트가 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폭력을 동반한 채 티나를 코너로 몬다. 이를 이슈 삼아 떠들기 좋아했던 시대는 오래도록 그에게 무례했지만, 티나는 그런 세간이 변하기까지 인내하며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미 극영화와 뮤지컬로도 완성된 바 있는 여든셋 디바의 인생은 진행형의 역사로 계속 쓰이는 중이다. <언디피티드>로 제8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댄 린제이 감독과 T. J. 마틴 감독의 신작이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Leaving Las Vegas
마이크 피기스 | 영국 | 112분 | 1995년 | 올해의 큐레이터
할리우드의 시나리오작가 벤은 중증 알코올중독자다. 벤은 실컷 술을 마시다 끝을 맞이할 요량으로 라스베이거스로 향한다. 그런 그의 앞에 세라가 나타난다. 벤은 매춘부인 세라에게 인간적인 예의를 갖춰 대하고, 세라도 벤에게 술을 끊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서로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존 오브라이언의 자전적 소설을 토대로 제작된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인물들의 전사를 구태여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의 현재를 보여주며 상대의 파멸까지 끌어안는 심정을 헤아리게 만든다. 마이크 피기스 감독은 영화의 사운드 연출과 스코어 작곡까지 담당하고, 키보드와 트럼펫을 직접 연주했다. 스팅이 부른 세곡의 O.S.T는 영화의 나른하고 음울한 정서와 잘 어우러진다. 제68회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감독상, 여우주연상, 각색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됐다.
아-하: 테이크 온미 a-ha: The Movie
아슬레우 홀름,토마스 롭삼 | 노르웨이, 독일 | 109분 | 2021년 | 세계 음악영화의 풍경
1985년 발매된 아하의 <Take On Me>가 쏟아낸 기록에 감탄하며 메가 히트의 단꿈을 회상하는 것은 이 영화의 목표가 아니다. 대신 <아-하: 테이크 온미>는 결성 당시의 밴드를 기억할 때와 비슷한 온도로 성공과 그 후의 일상을 바라보는 다큐멘터리다. 열띤 마음을 간직한 채, 담백하고 진지하게 말이다. 그 시선을 빌려 마주한 3인조 밴드 아하는 단 하나의 노래로 박제되기엔 아까운, 그들만의 음악 세계를 넓히기 위해 꾸준히 애써온 그룹이다. 멤버들은 40년 가까이 팀으로서 앨범 제작과 투어를 이어오면서도 솔로 활동, 미술 작업, 또 다른 밴드 생활을 병행하고 있다. 서로의 음악적 재능에 대한 존중이 있기에 아하를 지속할 수 있다는 인터뷰는 같은 길을 걷는 이들끼리 나눌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물론 <Take On Me>에 얽힌 비화도 충분히 다뤄진다. 곡의 시초가 된 기타 루프가 화려한 신시사이저 선율을 만나 히트곡으로 탈바꿈한 과정과 더불어 2010년 유튜브 업로드 후 13억 조회수를 달성하며 지금껏 살아 숨 쉬고 있는 뮤직비디오의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Take On Me> 뮤직비디오처럼 실사와 그림이 어우러지는 화면 연출이 영화의 톤을 밝혀준다.
데이비드 번의 아메리칸 유토피아 David Byrne’s American Utopia
스파이크 리 | 미국 | 106분 | 2020년 |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며칠 전 막을 내린 제74회 칸국제영화제의 야외 해변 극장에서 <화양연화> <아멜리에>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등과 함께 상영된 공연 실황 한편이 있다. 심사위원장이었던 스파이크 리 감독이 카메라에 담은 2019년의 브로드웨이 쇼 <데이비드 번의 아메리칸 유토피아>다. 록 밴드 토킹 헤즈의 보컬 데이비드 번의 솔로 앨범 《American Utotpia》에 기반을 두고 꾸린 이 공연은 주크박스 뮤지컬과 단독 콘서트를 넘나드는 구성을 자랑한다. 작가이자 주인공인 데이비드 번의 열창과 뮤지션 겸 연기자들의 퍼포먼스가 네모반듯한 공간을 채우는데, 모든 발언은 데이비드 번 1인이 담당한다.
노래를 타고 전달되는 그의 메시지는 TV로 대표되는 대중문화, 인종 문제를 되새기게 하는 경찰의 폭력, 민주주의의 의미를 반문하는 투표 독려 등 동시대를 관통하는 이슈들을 겨냥한다. 데이비드 번은 시적인 문장을 읊다가도 직설적으로 정부를 비판하고, 그토록 정치적인 와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비관과 자조가 아닌 희망과 염원을 위해 운을 띄웠기 때문 아닐까. 이처럼 <데이비드 번의 아메리칸 유토피아>는 더 나은 내일을 향해가는 지성의 에너지로 들끓는다.
올해의 큐레이터
마이크 피기스
세계 음악영화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영화인이 자신의 대표작과 자신의 작업에 영감을 준 인생 음악영화를 선정해 관객에게 소개하는 ‘올해의 큐레이터’ 섹션. 지난해 조성우 음악감독에 이어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연출한 마이크 피기스 감독이 ‘올해의 큐레이터’로 참여한다. 피기스 감독은 자신의 대표작으로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와 <유혹은 밤그림자처럼>(1990)을, 자신의 작업에 영감을 준 작품으로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8), <팔로우>(2014), <밤의 열기 속으로>(1967), <냉혈한>(1967)을 꼽았다. 이 작품들의 상영과 함께 마이크 피기스 감독의 마스터클래스도 진행될 예정이다.
올해의 짐페이스
엄정화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올해부터 음악과 영화 양 분야에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아티스트를 선정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짐페이스’ 섹션을 신설했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엄정화다. 1992년 <결혼 이야기>로 배우 데뷔, 1993년 주연을 맡은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O.S.T <눈동자>로 가수 데뷔 이후 가요계와 영화계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엄정화의 다채로운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 음악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2006), <댄싱퀸>(2012)을 비롯해 배우로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싱글즈>(2003), <오로라 공주>(2005), <베스트셀러>(2010), <미쓰 와이프>(2015)를 다시 볼 수 있다.
*본 기사는 <제17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추천작 10편 ②…영화와 영화제는 계속된다>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