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넷플릭스에 <기동전사 건담> 극장판 3부작이 공개되었다. 1979년에 방영된 최초의 건담, 흔히 ‘퍼스트 건담’이라 부르는 작품의 극장 상영 버전이다. 함께 예정되어 있던 <역습의 샤아>는 어째선지 취소되었지만, 그 후속작이자 올해 개봉한 최신작 <섬광의 하사웨이>는 무사히 공개된 모양이다.
이런 연유로 건담을 꺼내 들긴 했는데, 고삐 풀고 건담 이야기를 해버리면 끝도 없이 덕질 이야기를 늘어놓게 될 것 같다. 요컨대 주인공 아무로가 처음 건담에 타고 자쿠를 쓰러뜨리는 장면은 극장판보다 TV판의 연출이 더 섬세하다거나, 히로인 라라아가 (스포일러)하는 장면에서 극장판 버전의 침묵하는 샤아보다 주먹을 내려치며 소리 지르는 TV판 버전의 샤아를 더 좋아한다거나. 이런 쓰잘데기없는 잡담으로 두 페이지를 여백 없이 꽉 채우게 될 가능성이 높다. 정신 차리자.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해선 안된다. 이런 걸 쓰고 읽어봐야 모두가 불행해질 뿐이다.
그래서 이번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준비해봤다. 우주세기의 전장을 누비는 비뚤어진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건담의 아버지 도미노 요시유키 감독 말인데. 솔직히 이 사람,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남성 인물들은 대개 권력에 심취하거나 끊임없이 유아퇴행적인 파괴 행위만 반복할 뿐 별로 세상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반면 여성 캐릭터들은 상대적으로 어른스럽고 미래지향적인 편이다. 자신만의 뚜렷하고 구체적인 욕망을 향해 질주한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말이다. 혹자는 도미노 요시유키가 암울한 일본 사회의 희망을 여성과 신세대 소년들에게서 찾은 거라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냥 남자가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
때문에 초창기 건담 작품들에는 아군과 적군 가리지 않고 비중 있는 여성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중 몇몇 캐릭터는 주체적으로 주인공과 부딪치고 주인공을 거세게 비난하는 탓에 유독 미움을 받기도 했다. 팬덤에서는 이런 여성들에게 주로 악녀라는 딱지를 붙였다. 3대 악녀니 4대 악녀니 누가 더 나쁜지를 두고 온라인상에서 싸워대는 한심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여성 인물들을 누구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좋든 나쁘든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픽션에 한정해서. 멋지면 멋진 대로, 추하면 추한 대로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캐릭터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더욱이 시대의 한계를 깨부수기 위해 발버둥치기까지 한다면 말이다.
<기동전사 건담>에서 내가 가장 흥미를 느꼈던 인물은 ‘키시리아 자비’였다. 달의 지배자이자 정보기관을 틀어쥔 암투와 첩보의 달인. 언제나 보랏빛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는 미스터리한 흑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야심가. 잔혹한 학살자.
스탈린 같은 아버지와 히틀러 같은 오빠를 둔 그녀는 우주 이민자들의 나라 ‘지온 공국’의 독재자 가문 ‘자비가’의 일원으로, 4남1녀 다섯 형제 중 유일한 여성이다. 작중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되진 않지만 그녀가 가족들의 견제를 이겨내며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거쳤을지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지구 연방과 지온 공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권력을 갈망하는 키시리아의 칼끝은 끝내 가족에게로 향한다. 그녀는 장남이자 지온 공국의 실권자인 기렌 자비와 끊임없이 충돌한다. 군과 행정을 틀어쥔 기렌에 맞서기 위해 정보망을 장악하고 인간형 전쟁 로봇과 초능력자 등 신무기 도입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작중 전쟁의 양상을 주도적으로 이끈 사람이 키시리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종장에 이르러 그녀는 사실상 최종 보스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 탓에 많은 것을 잃고 말지만.
후속작 <기동전사 Z 건담>에서 나는 두 인물을 응원했다. 한 사람은 ‘레코아 론도’. 주인공 카미유가 속한 조직 ‘에우고’를 배신하고 부패한 군벌 세력 ‘티탄즈’의 품으로 전향한 첩보원이다. 모두가 거대한 대의를 내세우며 혼란스럽게 충돌하는 틈바구니에서 그녀가 내비치는 욕망은 사사롭고 소박하다. 조직으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 유능한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기 위해 그녀는 전향을 결심한다. 그것이 자신을 파괴할 선택임을 알면서도.
또 한 사람은 ‘하만 칸’. 그녀는 전작에서 패퇴한 지온군의 잔당을 이끄는 지도자로,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겨우 스무살이라는 점이다.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군을 장악한 하만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과 노련한 정치력, 소행성마저 충돌시키는 과감한 결단력을 보이며 시청자들에게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한다. 게다가 작중 가장 뛰어난 조종 실력을 지닌 파일럿이기도 하다. 성우 사카키바라 요시코의 걸출한 연기에 힘입어 등장 때마다 엄청난 아우라를 보여주는 인상 깊은 인물이다. 아쉬운 점은 후속작 <기동전사 건담 ZZ>의 분위기가 소년 화풍으로 가벼워지면서 최종 보스 역할을 맡은 그녀의 이미지도 상대적으로 우스워졌다는 것. 하지만 주인공 쥬도와 대결하는 마지막 회의 에너지만큼은 굉장하다.
마지막으로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캐릭터가 있다. 한참 후속작인 <기동전사 V 건담>에 등장하는 ‘카테지나 루스’. 카테지나 역시 레코아와 비슷한 길을 밟는 배신자 캐릭터인데, 카테지나가 전향을 택한 이유는 레코아와는 정반대다. 아무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카테지나는 전형적인 정의로운 지식인 여성으로 처음 등장한다. 소년들을 전장에 내모는 어른들을 차분한 말투로 비판하고, 전장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동정하며 슬퍼하는 여인.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명감을 갖고 무언가 역할을 해내려 시도할 때마다 오히려 일을 망치고 사태를 악화시킨다.
무능한 자신에 대한 열등감이 결국 카테지나를 혼돈의 길로 끌어들인다. 유능한 주인공 소년 웃소에 대한 열등감을 키우던 그녀는 첩자를 자처하며 적국으로 떠났다가 어느새 포섭되어 적군의 비서가 되어버린다. 얼마 후엔 평범한 사람도 전쟁 기계로 만들어준다는 비인도적 심리 실험에 자원해 파일럿으로 거듭난다. 실험의 후유증으로 반쯤 미쳐버린 카테지나는 결국 자신이 가장 혐오했던 전장의 살육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전쟁에 휘말린 소년을 동정했던 여인은 어느새 “어리구나, 꼬마야”라며 소년의 순수함을 비웃고, 묘한 애정만을 갈구하는 외롭고 뒤틀린 어른이 되어버린다.
카테지나가 작중 내내 벌이는 행적이 워낙 기괴하고 이해되지 않은 탓에 많은 이들이 그녀를 두고 건담 사상 최악의 악녀라 칭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거꾸로 이렇게 되묻고 싶었다. 저 사람 저러는 거, 솔직히 그냥 우리 모습 아닌가? 당신들이 지금 키보드로 하고 있는 짓이 저거랑 똑같은 거 아닌가? 나는 너무나 내 모습 같아 부끄럽고 안쓰러운데, 당신들은 아닌가 봐.
궁금하다. 십수년 전 그날 카테지나를 욕하던 모니터 너머의 사람들은 지금쯤 그녀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을지. 그러는 나는 그보다 훌륭한 어른으로 살고 있는지. 문득 고민에 빠져드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