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옛날이여~.” 이젠 영화 팬들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진 배우 발 킬머에 대한 다큐멘터리 <발>(Val)을 보고 혼자 중얼거린 노랫말이다. 지난 8월 6일 미국 내 한정 극장 상영과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스트리밍을 동시에 시작한 이 작품은 팅 푸와 레오 스콧이 공동 연출한 그들의 데뷔작이다. <발>에는 어릴 적부터 홈 비디오를 습관적으로 촬영해온 발 킬머의 가정사는 물론 오디션 테이프, 리허설 현장, 무대와 촬영장 뒷모습 등 방대한 자료 화면이 들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 몇해 전부터 인후암 투병을 하며 미소년 같던 목소리를 잃고 자막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거친 소리로 어렵게 말하는 현재 모습이 더해졌다. 그의 최근 모습은 찬란했던 젊은 시절을 기억하는 팬들을 안타깝게 만든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광대가 있다”라는 킬머는 아직도 활기찬 모습으로 그림을 그리고, 자서전을 집필하며, 후배 배우들을 위해 연습 공간을 마련해주고, 팬들과 사인회를 가지며 열심히 생활한다. 그는 또 투병 생활은 물론 이번 작품에 도움을 준 큰딸 메르세데스, 아들 잭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특히 아버지의 젊은 시절 목소리를 똑 닮은 잭이 1인칭으로 작품 전체의 내레이션을 해 보는 이들을 잠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발>에는 영화사와의 계약으로 어쩔 수 없이 출연했다가 뜻밖에 대박이 났다는 <탑건>, 1년 이상 그룹 도어스의 노래를 반복해서 연습하는 바람에 부인과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도어즈>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또 배트맨이 되고 싶었던 소년 시절의 꿈 때문에 대본도 읽지 않고 출연을 결정했지만, 배트맨 슈트를 입으면 움직이기도 힘들고 상대방의 말을 전혀 들을 수 없어 허수아비 같은 느낌을 받았기에 흥행 성공에도 불구하고 후속편 촬영을 거절했다는 <배트맨 포에버>, 어릴 적부터 존경하던 대선배 말론 브랜도와 작업하게 돼 잔뜩 기대했지만 교체된 감독과의 불화로 촬영 내내 고생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트장에서 아내한테 서면으로 이혼 통보를 받았다는 <닥터 모로의 DNA> 등 신기하고, 재미있고, 때로는 가슴 아픈 뒷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킬머가 <툼스톤> 야외 상영회와 코믹콘 팬사인회에 참석했을 때다. 팬들에게 거동이 불편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그는 새로운 작품으로 인사하지 못해 우울했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팬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다며 온 힘을 다해 휠체어에서 일어선다. 그의 이 행동에서 <툼스톤>의 닥 홀리데이와 <탑건>의 아이스맨의 멋진 모습이 겹쳐졌다.
이제는 발 킬머의 존재조차 모르는 영화 팬들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발 킬머를 사랑하고 그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는 권하고 싶은 영화다. 그의 투병을 지켜보는 것이 가슴 먹먹하지만 진정으로 매 순간을 즐기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때 책받침을 장식했던 꽃미남 배우에게서 입체화된 온전한 인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