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론 양아치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그는 하루 종일을 동그란 플라스틱 막대기 위에 앉아, 비록 낮은 방바닥 한 구석 좁다란 나의 새장 안에서 울창한 산림과 장엄한 폭포수, 푸르른 창공을 꿈꾼다.’ 정태춘·박은옥 10집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에 수록된 <아치의 노래> 가사는 현실에서 꿈꾸는 자의 동심원을 가리킨다. 좁은 곳에서 바라보는 넓은 세상, 작은 사람이 품은 큰 자유가 그 안에서 공명한다. 그리고 이 곡은 영화가 되었다.
정태춘의 노래에 충격을 받았던 대학생에서 정태춘의 친구가 된, 독립영화 제작자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이 된 고영재에 의해서 말이다. 1978년 데뷔해 지금껏 음악으로 발언해온 가수 정태춘의 일대기를 담은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제17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한국 음악영화의 오늘 - 한국경쟁’ 섹션에 이름을 올려 처음 관객을 만난다. 오래 그 만남을 준비해온 고영재 감독과의 대화를 전한다.
-계산해보니 1987년 정태춘이 데뷔했을 때 고영재 감독은 10대였더라. 그때부터 가수 정태춘에게 관심이 있었나.
=10대 때, 특히 사춘기 시절에 조동진을 너무 좋아했다. 정태춘을 즐겨듣진 않았었다. (웃음) 정태춘과 그의 노래를 알고는 있었지만, 10대 때 그를 조우한 기억은 많지 않다. 정태춘에게 비로소 충격을 받은 건 <우리들의 죽음>을 들은 대학교 2학년 때다. 행진곡풍이나 서정적인 멜로디의 민중가요만 듣다가 리얼리티와 음악성 모두 짙은 이 곡을 듣고 한 방 때려 맞은 느낌이었다. 한국에 이런 가수 없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정태춘과 사람 대 사람으로 교류하기 시작한 건 언제였는지 기억하나.
=2006년에 영화인들은 스크린 쿼터 사수를 위한 싸움을 했다. 나도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했었다. 당시 문화 활동가들의 해단식 비슷한 자리가 있었는데, 그때 정태춘과 처음 만났다. 그는 쭈뼛쭈뼛하던 내게 “얼어 죽을 선배님, 선생님 하지 말고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렇게 금세 형이라 부르며 친해지고, 2, 3차 자리까지 함께했다.
-정태춘을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멘터리를 찍겠다는 생각은 언제, 어떻게 하게 됐나.
=첫 만남 이후에도 정태춘이 내가 제작한 영화 <우리 학교>를 좋아해 주고 내가 제작한 영화가 나올 때마다 챙겨 봐주는 등 인연을 이어갔다. 그때부터 “형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찍어볼 생각 없나”라고 묻곤 했는데, 정태춘은 씩 웃기만 하더라. 나 같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해서 뭐가 되겠냐면서. 그러다 내가 정태춘·박은옥 30주년 기념사업에 이어 40주년 추진위원을 맡게 됐는데, 정태춘의 몇몇 측근들이 그가 영화 촬영을 허락할 것 같다는 얘기를 전해줬다. 거짓말이라 생각했는데 형에게 물으니 40주년이니 고마운 사람들도 생각나고 기록도 남길 수 있겠다고 하더라. 웬일인지 희한하다 싶긴 했는데 그렇게 2018년부터 올해 초까지, 햇수로 3년을 찍었다.
-정태춘이 40년 넘게 활동한 가수다 보니 영화 속 자료의 양도 상당하다. 각종 기사 및 사진 의 수집부터 방송사와의 영상 저작권 정리까지, 제작진들이 어디까지 품을 들였을지 궁금해지더라.
=정태춘이라는 사람 자체가 굉장히 꼼꼼하다. 본인에 관한 여러 자료를 굉장히 잘 정리해두는 편이다. 그런데 그 양이 워낙 방대해 그 자료 정리에만 6개월이 걸렸다. 그게 영화의 뼈대가 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형의 기억이 틀릴 수 있으니 언론사 자료실, 열람실에 가서 키워드 검색을 새로 했고, 많은 대화를 거쳤다. 방송국만 해도 이전 자료가 모두 디지털화 된 게 아니다. 형은 방송국에서 공연 기념 VHS를 받았는데, 저작권 정리를 하려 했더니 막상 방송국에서는 그 영상을 소장하고 있지 않은 경우도 있더라. 그런 식으로 이 영화에는 방송국에서도 찾을 수 없는 영상들까지 들어갔다. 각오는 했지만 아카이브가 정말 무궁무진하더라. 그 외에 형의 지인들, 형과 함께 활동한 분들을 찾아가며 자료를 따로 부탁하기도 했다. 공연이 열릴 때마다 무엇이든 좋으니 정태춘과 관련한 모든 자료를 모은다며 홍보했다.
-인터뷰이들의 면면도 흥미롭다. 예술적 동지이자 아내인 박은옥을 비롯해 청소년 활동가, 아티스틱 스위밍 선수, 지금은 투병 중인 정태춘의 오랜 팬 등 여러 세대가 정태춘이 준 영감을 증언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처음 영화를 구성할 때부터 ‘나의 노래는’, ‘그의 노래는’이라는 키워드를 잡았다. 이때의 ‘나’는 정태춘, ‘그’는 관객이다. 정태춘이 생각하는 정태춘의 노래와 관객이 생각하는 정태춘의 노래를 어떻게든 만나게 해야겠다는 초기 컨셉이 있었다. 정태춘은 죽은 사람이 아니지 않나. 여전히 활동 중인, 살아있는 사람을 다큐멘터리로 다룬다는 것, 어떤 의미로 규정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작업이다. 내가 감독이라고 어쭙잖게 그를 평가하고 싶지 않더라. 그래서 다양한 관객의 얘기가 꼭 들어가길 바랐다. 그러면서 나의 경우도 생각해봤다. 나는 형을 만난 지 17년이 되었는데도 공연 때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 정태춘의 노래를 들으면서 내가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볼 수 있고, 여러 감정이 복받치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는 우리의 노래였다는 것, 그렇게 관객에게 여러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영화적 순간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오랫동안 정태춘과 인연을 이어올 수 있었던 까닭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인연을 떠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면이 있다. 내가 아는 민중가수들은 젊었을 때만 노래를 하거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일상을 주로 노래하는 쪽으로 변해갔다. 그런데 정태춘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정치와 이념을 떠나서 지구의 미래, 사회의 모순을 고민하며 특유의 음악성으로 풀어낸다. 가사가 깊어지는 것은 물론 그가 다룰 줄 아는 악기도 늘어간다. 시대는 급속하게 변하는데 정태춘에게는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리고 그 말을 어떻게 전할지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 그를 보며 속으로 말하곤 한다. ‘정태춘, 살아있네!’ (웃음)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정태춘이 주인공인 첫 다큐인 동시에 감독으로서 고영재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 연출은 어떤 경험이었나.
=인생을 살다 보면 영화적인 순간이 있는데 정태춘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도 내 인생의 영화적 순간이었다. 앞으로 영화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고민이 많았을 때 이 작품을 연출하게 된 거다. 그동안 협업해왔던 감독들을 되돌아보는 계기도 되었다. 영화는 혼자 만드는 게 아니라는, 영화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것이 복이라는 생각도 확실해졌다. 앞으로도 감독 혼자가 아닌 모두의 좋은 영화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