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 나가서 공부하고 경제권을 쥐고 있는 아내, 집에서 요리하고 빨래하는 남편. <박강아름 결혼하다>가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만드는 여자와 글 쓰는 남자의 한집 살이는 한국 사회가 말하는 보통의 결혼 생활과 제법 다르다. 아내가 남편에게 밥 좀 차리라고 타박하거나 밥상 메뉴로 트집을 잡고, 남편은 자신은 식모가 아니라며 볼멘소리를 한다. 두 사람은 박강아름 감독의 프랑스 유학 생활 중 모자란 생활비와 타지 생활의 고독을 견디느라 가뜩이나 예민해진 상태다.
첫 번째 다큐멘터리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에서 사회가 기대하는 여성성에 관해 스스로의 신체를 모델 삼아 실험했던 박강아름 감독은, 신작에서도 결혼 생활이 요구하는 남녀의 성 역할이 전복된 풍경을 자기 삶에서 건져 올렸다. 전작이 품은 질문인 ‘나는 왜 연애를 못할까?’가 ‘나는 도대체 결혼을 왜 했을까?’로 절묘하게 이어지는 박강아름식 실험의 연장이다. 프랑스에서 현대미술 공부를 마치고 잠시 귀국한 박강아름 감독을 만나 이 대범하고 유쾌한 다큐멘터리의 기술을 물었다.
-전작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를 발표한 후 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밝혔었다. 다시 자전적 소재로 돌아가 감독 자신의 삶을 촬영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있었나.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여자 혼자 나오는 다큐, 여자가 스스로를 찍는 다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는 단 1원의 펀딩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자전적 다큐멘터리는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그러던 중 남편과 함께 프랑스 유학을 갔는데, 내가 밖에 나간 동안 늘 집에만 있던 남편이 주부 우울증 같은 것을 앓았다. 남편 성만은 한국에서 낮에는 보조 요리사로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다가 내 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떠나온 참이어서 나는 약간의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었나 보다. 마침 프랑스에서 한창 공유경제와 에어비앤비가 화두였던 데다 우리 둘 모두 <카모메 식당>을 열렬히 좋아했기에 내가 <카모메 식당> 다큐판을 만들 테니 남편에게 주인공을 하라고 제안했다. 우리 집 부엌을 ‘외길 식당’이란 이름으로 꾸며놓고 예약 손님을 받아서 외길 식당을 오가는 손님과 셰프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게 처음의 의도였다.
-그런데 최초 구상과 달리 가부장제에서 답습되어온 남녀의 성 역할이 뒤바뀐 어느 결혼 생활의 풍경이 완성된 다큐멘터리의 주제가 되었다.
=촬영을 시작한 뒤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 때 함께했던 프로듀서이자 친구 김문경에게 몇 개월간 찍은 촬영 소스를 보여줬는데,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피드백이 날아왔다. 내가 남편에게 “밥 좀 차려”라고 말하는 순간, 남편이 “난 식모가 아냐”라고 항의하는 순간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고 하더라. 김문경 프로듀서도 나도 프랑스에서 찍힌 촬영본을 보면서 ‘박강아름이란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한다고?’ 싶은 순간이 더러 있었다. 약간의 충격과 함께, 프랑스에서 남편이 집에 있고 내가 바깥 생활을 하면서 생긴 성 역할의 전복에 대해 제대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의 숨은 뼈대를 알아봐주고 지지해준 믿음직한 동료의 역할도 새삼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렇다. 김문경 프로듀서는 내가 프랑스에서 생활하는 동안 한국에서 펀딩을 위해 거쳐야 할 프로젝트 피칭을 직접 발로 뛴 인물이다. 그는 내가 자전적 다큐멘터리를 하지 않겠다고 좌절할 때도 오직 나만이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열렬히 믿고 지지해주었다.
-남편과 갈등하는 모습 중에 은연중에라도 자신을 변호하는 연출적 제스처가 없는 점이 이 다큐멘터리를 더 흥미롭게 만들었다. 남편이 전업주부로 가사를 담당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아내도 육아와 집안일을 상당수 병행했으리란 추측이 가능한데, 영화는 그런 순간을 의도적으로 더 배제한 듯 보였다. 포스터에서도 아름은 권위적인 가부장을 연상시키는 ‘독불장군’으로 묘사돼 있다.
=한국의 결혼 생활에서 남녀가 수행했던 기존의 권력관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것을 선명히 보여주고 싶었다. 선택이 필요했다. 물론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 내내 나도 자주 욕망과 혼란에 사로잡혔다. ‘실은 내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러다 나만 나쁜 사람처럼 보이는 거 아니야?’ 싶기도 하고. 하지만 전복된 양상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야만 여성들이 가사와 육아를 할 때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일들이 남자 몫으로 돌아갔을 때 얼마나 이질적인 것으로 취급되는지 나타날 것 같았다. 한편으론 나 자신이 가부장제의 고통을 잘 아는 여성이기에 오히려 남편을 더 잘 이해한 것도 있다. 내가 가정주부라고 입장을 바꿔보면 공부하는 남편이 ‘나도 집안일 돕지 않냐’라고 생색낼 때 얼마나 싫을지 뻔히 보이더라. 아, 물론 그럼에도 자주 구시렁거리긴 했지만. (웃음)
-다큐멘터리 감독이 자신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형식적으로도 재밌는 요소들이 있다. 이를테면 너무 속이 상해 울먹이며 친구와 통화하는 신. 자신을 향해 카메라를 설치하고 각도를 조정하는 기록 과정 자체를 편집에서 잘라내지 않고 그대로 보존했다.
=내가 나를 찍고 있다는 걸, 주인공인 등장인물과 감독이 일치한다는 걸 보여주는 장치를 지키고 싶었다. 카메라 앞에 등장하는 것을 보여주는 과정 자체가 흥미로운 예술적 재료라고 생각해서다. 특히 내가 매료된 부분은 여성 예술가가 자기 신체의 주체자로서 이를 작품에 활용했다는 거다.
-<박강아름 결혼하다>를 계기로 자전적 다큐멘터리에 대한 더 단단한 확신을 얻은 듯 보인다. 앞으로의 계획은.
=딸과 반려견의 모습을 담은 <보리와 슈슈>라는 작품을 계획 중이다. 8살인 슈슈(반려견)는 나이가 들어가는데, 어린 딸 보리는 이제 막 자란다. 그 둘의 관계를 통해서 사랑에 따르는 이별, 특히 죽음에 대한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업이 되길 바란다. 또 하나는 나혜석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꼭 완성하고 싶다. 글과 그림을 통해 자기 서사에 몰두했던 나혜석에게서 동질감을 느낀다. 프랑스로 돌아가면 본격적으로 자료조사를 더 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