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은 한동안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신작 <밀수>(출연 김혜수, 염정아, 조인성, 박정민, 고민시)를 한창 촬영하고 있어 일정이 바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모가디슈>가 보다 많은 사람에게 선보이기 전까지 감독으로서 말을 보태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건 오로지 영화로 평가받고, 영화를 통해 관객과 소통하겠다는 감독의 의지로 보였다. 전작 <군함도>(2017) 이후 와신상담 끝에 내놓은 류승완 감독의 신작 <모가디슈>는 지난 2주 동안 191만여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을 불러모으며 20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와 도쿄올림픽이라는, 영화 흥행에 불리한 조건하에 거둔 성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영화의 운명이 마치 총알과 화염병 세례를 뚫고 모가디슈를 아슬아슬하게 탈출하는 네대의 자동차 같달까.
<밀수> 촬영을 쉬는 날이던 지난 8월 10일,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류승완 감독을 온라인에서 만나 긴 대화를 나눴다. 지난해 초 모로코에서 촬영 중이던 그와 <모가디슈>에 관한 대화를 나눈 지 약 1년6개월 만이다.
-전작 <군함도>와 <모가디슈>는 여러모로 다른 결을 가진 영화인데 <군함도>가 있었기에 <모가디슈>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차기작으로 <모가디슈>를 선택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군함도>를 지켜보는 시간이 오래 걸렸고,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차기작을 준비할 시간을 그저 기다렸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계획을 세우는 건 제작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이제는 영화를 만들 때 어떤 계산이나 의도나 의미보다 무의식이 먼저 작용하는 것 같다. 관객으로서 순수하게 보고 싶은 영화가 무엇인지, 감독으로서 만들고 싶은 영화는 무엇인지, 세상에 내놓고 싶은 영화는 무엇인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모가디슈>인 셈이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게 됐나.
=아주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다. 전작 <베테랑>(2014)의 후반작업을 하고 있을 때 사무실에 놀러온 후배가 1990년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는데 덱스터가 준비하고 있다고 얘기해주었다. 실화가 궁금해 당시 기사나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너무 극적인 이야기라 누가 됐든 잘 만들면 좋겠다 싶었다. 수년이 지난 뒤 연출 제안을 받았고, 그때 받은 시나리오는 지금의 영화와 결이 많이 달랐다. <부당거래>(2010)를 맡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서사의 목표와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를 유지하는 선에서 각색의 자율권을 보장해준다면 연출을 맡겠다고 했다. 덱스터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다시 취재해 지금의 이야기로 재구성했다.
-실화의 어떤 점에 매료됐나.
=보통 사람이 들어도 영화 같은 이야기인데 나처럼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접했을 때 얼마나 흥분됐겠나. 자료를 조사해보니 그 사건뿐만 아니라 현대 외교사에서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탈출한 사건이 꽤 있더라. 내전 때문에 재외국민들을 이끌고 탈출한 스토리도, 한달 동안 걸어서 국경을 넘은 스토리도 있다. 지금도 지구 어디선가 분쟁과 내전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 이 실화에서 흥미를 느낀 건 탈출한 남북 외교관들이 특수 부대원이나 첩보 요원이 아닌 민간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보통 사람이 극적인 상황을 겪으면서 발생하는 서스펜스가 흥미진진했고, 지금껏 만들던 방식과 다른 시도를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것이 나를 자극한 원동력이다.
-‘1990년 소말리아’라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인샬라>(1996) 이후 한국영화에서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은 무대인데.
=영화를 만들 때 인물만큼 중요한 건 인물이 처한 상황과 그 상황이 벌어지는 공간이다. 개인적으로 아프리카를 한번도 가본 적 없다. 그건 다른 한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990년 소말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는다는 건 우주영화를 만드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베를린과 관련된 자료가 많았던 <베를린>(2012)과 달리 <모가디슈>는 소말리아나 모가디슈와 관련된 자료가 국내에 거의 없더라. 그 점에서 촬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매력을 느꼈다기보다 모가디슈의 어떤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야 할지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영화는 1990년 12월 초부터 내전이 발생한 12월 30일을 거쳐 모가디슈를 탈출하는 1991년 1월 12일까지를 다룬다. 실화의 배경과 설정 그리고 결말을 충실히 끌어오되 캐릭터와 사건을 새롭게 구성했는데.
=제일 애먹었던 건 1990년 12월부터 1991년 1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시간을 영화로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였다. 그 기간은 소말리아의 정치·사회적 문제가 급변하던 시기라 이 변화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남북 대사관 직원들이 한국 대사관 공관에서 12일 동안 지냈는데 그 기간 그들이 어떻게 지냈는지를 채워넣는 게 관건이었다.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이루어진 실화에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다. 실제로 남북 대사가 공항에서 만났고,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한번 만에 한국 대사관을 찾은 게 아닌데 실화 그대로 옮기면 반복적인 사건이 많아 서사 진행이 더디더라.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에서 서사가 흐름을 잘 탈 수 있도록 반복되는 사건을 빼는 게 과제였다. 그 점에서 이번 영화는 뺄셈을 얼마나 잘하는가에 성패가 달린 작업이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자막으로 당시 남북의 외교 상황을 설명하지만 그보다는 한신성(김윤석) 남한 대사와 림용수(허준호) 북한 대사를 통해 남북 외교전의 단면을 보는 재미가 있더라. 언제나 급한 건 한신성인 반면 여유가 있는 쪽은 림용수인데.
=한신성과 림용수는 남북의 아프리카 외교전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남조선보다 20년이나 앞서서 아프리카에 기반을 닦았다”라는 림용수의 대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실제로 북한은 일찍이 아프리카에 외교관을 포함해 사람들을 많이 파견했다. 영화에서 따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당시 한국이 소말리아에 대사관을 설치한 건 유엔 가입을 위한 표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을 우방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당시 아프리카를 불행하게 한 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과 소련의 냉전 무대였다는 사실이다. 미국도 소련도 아프리카 국가들을 자신의 우방국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한국 또한 미국의 우방국으로서 그 작업에 일조한 거다. 소말리아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면서 양쪽 모두로부터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베를린>도 남북 외교관들이 베를린에서 첩보전을 벌이지 않나. 체제가, 이데올로기가 인물에 직접 개입해 압박하는 <베를린>과 달리 <모가디슈>는 내전 때문에 통신이 두절돼 국가가 인물의 결정에 개입할 여지를 거의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건 아마도 두 영화 모두 내가 연출해서 그런 것 같다. 전작에서 더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작용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베를린>을 통해 묘사했던 남북 관계를 특별히 의식한 건 아니다.
-영화의 초반부는 캐릭터를 꼼꼼하게 구축하는 동시에 소말리아 내전이 진행되는 과정을 공들여 보여주더라. 그 과정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가가 이후 남북이 만나는 데 설득력을 줄 거라고 본 건가.
=관객이 인물에 몰입하고 그들과 함께 내전 상황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내전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되는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일을 겪는 사람은 전체 그림을 보기보다는 부분적인 현상만 볼 수밖에 없지 않나. 그렇다면 카메라는 어떤 위치에 서서 내전을 바라보는 게 맞는가. 대사관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사건 중에서 어떤 부분을 선택해서 보여줄 것인가.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지 조마조마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너무나 잘 알지만 관객은 그것이 첫 경험이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배경이 그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을까봐 걱정이 됐다. 이건 영화를 만들 때마다 고민되는 지점이다. 서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마다 어느 정도의 수위로 전달할 것인가가 늘 고민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영화는 관객이 영화 속 소말리아의 내전 상황을 무리 없이 잘 이해한 것 같다.
-카메라가 내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담아낼 때 강대진(조인성) 참사관이 한국 대사관 건물에서 튼 스피커에서 “소말리아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우리 대한민국은 여러분들의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될 것을 약속합니다”라는 소리가 나온다. 아이러니했다. 소말리아 내전을 카메라에 담을 때 세운 원칙은 무엇인가.
=“액션”과 “컷” 사이의 상황은 진짜여야 한다, 였다. 제작진이 맨땅에 소말리아 내전 풍경을 펼쳐놓아서 정말 자랑스럽다. 특히 현장에 서울액션스쿨 모로코점이 있었다. (웃음) 윤대원 무술감독이 촬영 한달 전에 모로코에 들어가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현지인 배우들을 데리고 한달 넘게 스턴트 훈련을 진행했다. 자원한 30명 중에서 최종적으로 남은 20명가량의 현지 배우들이 내전 시퀀스를 찍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스턴트가 처음인 배우가 절규하는 연기를 정말 사실적으로 해주었는데 마침 내전 풍경을 참고하기 위해 현장을 찾은 허준호 선배가 그의 연기를 보고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을 잡았다”고 하시더라.
-정부군이나 반군보다 섬뜩했던 건 총을 든 소년병이었다. 북한 대사관을 탈취한 것도, 중국 대사관 앞에서 북한 대사관 직원들에게 겁을 준 것도 천진난만한 소년병인데.
=아프리카 내전을 다룰 때 소년병은 당연히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선 세세하게 묘사하지 못했는데 전쟁이 얼마나 나쁘냐면 어른이 마약 성분이 있는 나뭇잎을 소년병에게 줘서 환각 상태에 빠뜨린 뒤 총을 쥐여준다. 소년병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나뭇잎을 씹으면서 총을 들고 다니는 거다. 지구온난화 같은 기후변화도, 괴물의 습격도 아닌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결과라고 하니 끔찍하지 않나. 전쟁의 참혹성을 보여주는 데 소년병의 등장은 꼭 필요했다.
-남북 대사관 직원들이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시퀀스에서 북한 대사 부인인 배영숙(박명신)이 젓가락으로 남한 대사 부인인 김명희(김소진)가 집어 든 깻잎을 떼어주는 장면은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서 남북한 병사들이 초코파이를 나눠 먹는 우정이 생각날 만큼 뭉클하더라.
=박찬욱 감독님에게 <모가디슈>에도 JSA(공동경비구역)가 등장한다고 말씀드리니 박 감독님이 ‘공동도주구역’ 아니냐고 하시더라. (웃음) <공동경비구역 JSA>는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영화다. 깻잎 장면은 어린 시절 기억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장면인데, 할머니가 식사 때마다 깻잎을 떼어주셨다. 깻잎은 우리나라 사람만 먹는 음식으로 알고 있다. 그 장면을 통해 밥을 먹는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고 싶었다. 남과 북은 이념은 다르지만 먹고, 싸고, 입는 건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지 않나. 현장에서 배우들이 찍는 내내 좋아했다. 특히 김소진씨와 박명신 선배님의 연기가 기가 막혔다. 박명신 선배님이 젓가락으로 깻잎을 떼어주자 김소진씨가 살짝 놀라는 연기가 좋았는데 연출 디렉션이 아니었다. 허준호 선배가 김윤석 선배 앞에 놓인 김치를 집어 들려고 하자 김윤석 선배가 김치를 허준호 선배 앞으로 밀어주는 모습이나 정만식씨와 북한 직원이 젓가락을 같은 반찬에 넣으려다가 부딪히는 모습은 우리만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차량 네대가 줄지어 달리는 카 체이스 시퀀스는 동선이 정교해서 장관이었다. <베테랑>에서 조태오(유아인)가 탄 포드 머스탱이 명동 거리를 질주했다면 이 영화 속 자동차는 모래주머니, 책을 달아 속도를 내지 못해 아슬아슬하더라. 그런데도 서스펜스가 느껴졌던 건 그 차에 탔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짜 같아야 한다는 원칙 안에서 신경 썼던 건 스펙터클해서는 안된다, 였다. 총알과 화염병 세례를 뚫고 이탈리아 대사관까지 당도해야 하는 인물의 절박감이 전달되려면 스펙터클보다는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게 중요했다. 카메라가 자동차 외관보다는 차 내부 상황을 중점적으로 담아낸 것도 그래서다. 무엇보다 카 체이스 신의 완성은 사운드였다. 관객이 차 안에 탑승한 것 같은 몰입감을 느끼려면 사운드를 생생하게 구현하는 게 필요했다. 그래서 사운드팀이 녹음실에서 차 소리와 총격 소리를 사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고생을 많이 했다. 이것이 극장에서 제대로 된 사운드로 영화를 감상해야 하는 이유다.
-자동차에 책과 모래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다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나온 건가.
=실화에 극적인 상황이 많아서 그걸 그대로 묘사하면 오히려 설득력을 잃을 것 같았다. 정부군과 반군 모두가 그들을 적으로 오인해 공격했고, 그런 상황에서 단 한명만 사살된 건 너무 영화 같은 상황이지 않나. 실제로 남북 대사관 직원들을 태운 자동차 네대는 이탈리아 대사관 정문 50m 앞까지 내달렸다고 하더라. 그 50m가 정부군도 반군도 넘지 못하는 거리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서사에서 현실과 영화적 상상력의 밸런스를 잘 맞추는 게 과제였다. 기적 같은 상황에서 살아남는 걸 보여주려면 그들이 탄 자동차에 최소한의 보호장치가 영화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총알이 전화번호부를 뚫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정말로 그런지 테스트한 뒤 자동차에 책과 모래주머니를 매단 것이다. 이것저것 달린 게 많아 자동차가 무게가 많이 나가고, 그러면서 속도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는 데다가 운전자의 시야가 많이 가려진 탓에 현장에서 애를 많이 먹었다.
-자동차가 처음에는 정부군이 주둔한 지역에서 적으로 오인받아 총알 세례를 받았고, 이후 반군 지역에서 정부군으로 오인받아 화염병 세례를 당한 뒤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이동하는 동선이 정교하더라.
=미술팀이 실제 모가디슈 지도를 만든 뒤 자동차가 출발하는 지점, 정부군과 반군이 각각 주둔한 곳, 최종 목적지인 이탈리아 대사관 위치를 촬영 장소인 모로코 에사우이라 지도에 적용했다. 그걸 바탕으로 스턴트팀과 제작진이 자동차의 동선을 만들었다.
-한배를 탔던 남북 대사관 직원이 소말리아에서 탈출에 성공하는 영화의 후반부는 자칫 신파로 빠질 수 있는데도 담백하게 그려낸 이유가 무엇인가.
=비행기 안에서 그 장면을 찍을 때 배우들이 많이 울었다. 촬영 후반부라 감정적으로 고조된 상태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이 긴 시간 동안 얼마나 긴장된 상태로 함께 지냈겠나. 그 장면이 과거에서 종결되는 이야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힘을 가지려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보다는 여운을 남기는 게 중요하다고 보았다. 음악감독님이 처음에는 비극성을 강조하는 음악을 준비하셨는데 그보다는 피아노 하나만으로 그들의 상황과 감정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모두가 그 상황이 어떤 감정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
-차기작 <밀수>를 한창 촬영 중인데.
=분위기가 좋다. 즐겁고 재미있게 찍고 있다. 덕분에 살이 쪘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