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우리, 둘'이 이동의 감각을 주요하게 다루는 이유
2021-08-25
글 : 이보라 (영화평론가)
맞은편으로 향하는 일

필리포 메네게티 감독의 <우리, 둘>은 니나(바르바라 수코바)와 마도(마틴 슈발리에)라는 두 인물을 단일한 존재로 상정한다. 이들이 함께일 때 비로소 성립된다면, 한쪽이 허물어질 때 다른 한쪽은 어떤 영향을 받는가. 영화는 이를 질문하는 과정에서 공간을 중요한 기제로 설정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두 인물이 한 아파트에서 좁은 복도를 사이로 맞은편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긴밀히 연관된다. 외견상 이들은 각자 독거노인이자 서로 막역한 이웃 사이쯤이지만, 실상 한 침대를 공유하는 레즈비언 커플이다.

요컨대 이들은 분리와 결합이 혼거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 점을 토대로 범박하게 축약한다면, <우리, 둘>은 정주와 탈주의 가능성을 모두 지닌 이중적 장소로서의 집을 탐구하는 영화다. 물론 이 점은 본편이 퀴어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힘이 실리는 모티프다. 퀴어에게 있어 스스로를 타인과 대면시킬 일차적인 방법으로 커밍아웃이 있다면, 이는 단어가 그대로 지시하듯 ‘나오는 일’이다. 이 점에서 영화가 공간과 공간을 오가는 이동의 감각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가로막히는 사태의 반복

<우리, 둘>

퀴어 연인들이 다른 세상을 찾거나 그곳에서 사랑을 발전시키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내러티브 영화에서 꽤 흔한 모티프다. 소수자에게 (지배적 질서가 편재하는) 지금-여기는 압력을 행사하는 가장 큰 위험요소이기 때문이다. 작품마다 맥락은 상이하지만 잠시 다른 작품들을 곁눈질해보자. 이를테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속 브르타뉴의 외딴섬은 무인(無人)의 공간이기에 감금과 도피라는 상호모순의 성질을 함께 지닌다. 이들은 가부장적 체계에 의해 섬에 갇힌 셈이지만, 그 물리적 간격으로 인해 사랑을 나누기에 유용한 기회를 제공받기도 한다.

최근의 사례 중 <정말 먼 곳>도 두 연인의 사랑이 간섭받지 않을 조건으로서 거리감을 강조한다. 동시에 비특권적 장소가 이들의 사랑에 유효성을 부여하리라는 희망 또한 섣부르고 위태롭다는 사실도 폭로한다. 이렇듯 퀴어 멜로에서 장소와 관련된 개념들은 자주 긍정적/부정적 측면을 함께 내장하며 그 이중성이 경합하는 양상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특성을 경유할 때 <우리, 둘>에서도 이동과 정지의 모티프는 새삼 중요하다. 본편 또한 도주와 은둔의 감각을 공통적으로 관류하면서 ‘우리만의 방’을 모색하는 퀴어영화의 계열에 놓일 만하다.

숨바꼭질하는 두 소녀 중 한 친구가 사라져버리는 도입부 또한 이 놀이의 성질이 지시하는 대로 추적과 유폐의 모티프를 예견한다. 다른 이를 찾는 행위란 열렬한 애정을 수반하는 한편, 그들이 따로 떨어져 있음을 지시하는 셈이다. 이로써 <우리, 둘>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두 인물이 서로를 바라보기 어려운 사태에 직면해 있다는 점이다. 여러 대화 장면에서 각자의 클로즈업된 얼굴이 숏-리버스 숏으로 이어지는 화면은 이들의 친밀함을 전달하기보다 어딘가 분절된 감각을 심화한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둘은 어둠 속에 있을 때만 간신히 마주 볼 수 있다. 초반부에서 애정을 나누는 둘의 몸짓은 어둠에 가려져 있거나 화면 테두리에 겨우 걸쳐 있다. 뇌졸중을 겪은 후 마도의 눈이 초점 없이 멍한 것은 질병을 얻은 노인의 상태를 전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무자비한 현실에서는 서로를 바라보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랑의 비정함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이 점에서 오히려 섬뜩하게 다가오는 대목은 니나와 앤(레아 드뤼케르)이 저녁 식사 후 담소를 나누는 장면에 있다. 앤이 “엄마에겐 아빠만이 완전한 사랑이었다”라고 말할 때 그와 무관하게 카메라는 말 없는 마도의 흔들리는 눈을 포착한다. 일순간 양옆을 번갈아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의 눈은 어쩌면 그것만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자의 부단하고도 부질없는 제스처 같아 보인다.

<우리, 둘>의 많은 장면은 이 두 연인의 마음과 달리 불가피하게 깊어지는 결렬의 분위기를 형상화하는 데 쓰인다. 이를테면 옷가게에서 탈의실에 들어간 니나는 옷을 갈아입고 마도는 바깥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지금 이들은 곧 구하게 될 집에 관해 이야기 중이다. 로마로 떠나 함께 살기로 약속한 이들은 다정한 미래를 그리며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다. 하나 시선을 교환하지 않은 채 문틈 사이로 이어지는 대화는 소통이 간신히 성립되고 있다는 모양새다. 서로를 제대로 마주 보는 형상을 극히 절제한 이 비스듬한 화면은 불안정성을 내장한다. 이는 이들이 지금 집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공교롭다.

이 장면이 이들의 단절을 예감하게 만드는 단초라면, 몇신 이후 세탁소 장면은 명확한 발화점으로 작용한다. 앤과 프레드릭(제롬 바랑프랭)에게 로마로 가겠다고 말하지 못한 마도는 공인중개업자 브레몬트(허베 소그느)에게 전화해 집을 팔지 않겠다고 일러두었지만, 연인인 니나에게만큼은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기에 아직 솔직히 말하지 못한 상황이다. 둘은 세탁소에 들어오는데, 담배를 피우러 나간 니나가 브레몬트와 우연히 마주친다. 그와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던 니나는 별안간 차가운 표정으로 유리창 너머 실내의 마도를 바라본다. 이때 마치 뭔가를 깨뜨리기라도 할 듯 시끄럽게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가 점증되며 압박감을 높인다. 온전히 화합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 폭로될 때 이들의 시선 교환은 이토록 공포스럽게 제시된다.

‘우리만의 방’을 찾아서

<우리, 둘>

집을 위시한 장소가 있는 한편, 영화는 마도의 몸이라는 또 다른 장소를 매개함으로써 움직임이 어려워진 신체의 곤란을 표상한다. 의미심장한 것은 처음부터 니나는 마도의 집을 편하게 드나드는 반면, 마도가 니나의 집에 들어가는 과정은 정확히 제시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초반부터 관점의 주체는 마도이며 카메라 또한 늘 마도의 집 안에 이미 들어와 있지만, 주인으로서 마도의 존재감은 다소 희미하다. 도리어 니나가 마도의 집에 불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둘의 판이한 성향과 조건과도 유관하다. 니나는 가이드로서 자유롭게 살아왔으며 화가 날 때는 남 앞에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도 무람없는 반면, 마도는 이성애 관계와 결혼 전력이 있으며 장성한 자식들에게 커밍아웃하는 데도 번번이 실패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마도가 쓰러지고 말을 잃으면서부터 관점의 주체를 마도에서 니나로 옮긴다. 이는 어쩐지 니나가 마도를 추체험할 과정에 자리매김하려는 전략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후 마도에게 화를 내며 뒤돌아선 니나가 마도의 삶을 대리 경험하는 순간들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가령 마도가 병원에 입원하자 마음이 심란해진 니나는 늘 그랬듯 마도의 집에서 잠을 청한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앤과 프레드릭이 마도의 소지품을 가지러 집에 온다. 이때 니나는 당황하여 황급히 숨을 곳을 찾는데, 안방에 있던 그녀는 앤과 프레드릭의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안방에 달린 화장실로, 화장실 안 욕조로, 그리고 욕조에 커튼을 친 상태로 들어가 숨을 죽인다. 말하자면 지금 그녀는 벽장 속에 들어가게 된 셈이며, 그곳에 없(는 듯 있)어야 한다. 이때 니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안부를, 그들의 지나가는 대화를 ‘엿들음’으로써 간신히 배당받는다.

<우리, 둘>에서 연인의 자발적 이동은 내내 저지되며, 타의에 의해 피동적으로 움직여질 따름이다. 마도가 니나의 현관문을 거세게 두드릴 때 앤이 금세 달려나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갈 때나, 종국에 니나가 모르는 사이 마도가 요양병원으로 옮겨간 대목 등이 대표적이다. 그중에서도 방점을 찍는 것은 결말이다. 어렵사리 요양병원을 탈출한 후 니나의 집에 도착하면, 그곳은 (아마도 니나에게 분심을 가진 간병인의 아들이 그랬을 테지만) 누가 행패라도 부린 듯 난장판이 되어 있다. 니나가 소중히 간직하던 사진은 물론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말하자면 로마로 가기로 했던 이들의 이동의 꿈은 고작해야 건너편 집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맺음되는 셈이다. 두 연인은 한 사람의 집에서 다른 사람의 집으로 옮겨왔을 뿐이다. 오랜 꿈이 무너졌다. 그런데 이는 반드시 불행한 엔딩이거나 수축적인 결론에 다름 아닐까.

그보다는 이들이 끝내 체념 속에 머물기보다 서로를 껴안은 채 추는 춤이 전하는 감흥을 헤아리는 데 집중하고 싶다. 서로를 바라보며 제자리를 도는 이 장면은 초반부에 비슷하게 등장한 적이 있다. 수미상응이지만, 일련의 사태를 통과한 후 매우 다른 여운을 선사한다. 어둠 속에서 춤을 추던 이들은 지금 한낮의 빛을 받으며 온전히 연결되어 있다. 이들이 맞은편에 도달했다는 사실 앞에 ‘고작’이나 ‘무려’라는 부사는 모두 어울려 보인다. 마도의 집이 아닌 니나의 집, 그래서 탈주이면서 정주의 여지를 함께 품은 지금의 장소는 이 움직임의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단호함이다(이와 함께 엄마의 성적 지향을 알게 된 이후에도 이를 끝내 부정하려는 앤과 프레드릭의 창문을 향해 돌을 던지는 니나의 행동은 자신들은 ‘정상성’을 갖췄다고 오만하는 이들의 안쪽에 적극적으로 균열과 파괴를 새기려는 몸짓이다. 어디든 안전한 내부는 없으리라).

마지막에서 니나와 마도가 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사실도 곱씹어보고 싶다. 돌이켜보자면 이전에 앤은 니나의 초인종 소리를 모른 척한 적이 있다. 화장실에서 마도의 머리를 말리던 앤은 문가로 다가가지만, 외시경을 통해 니나를 확인하고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마도에게는 그 문을 열어줄 결정권이 없다. 니나를 무시하고 돌아온 앤은 곧장 드라이기를 거세게 틀며 그 소리를 가려버린다. 이들의 관계는 가청의 측면에서도 노골적으로 제압당한다. 그러나 결말에서 <우리, 둘>은 이 구도를 역전시킨다. 니나와 마도를 따라와 잠긴 문을 두드리는 앤의 목소리는, 화면이 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을 등장시킬 때 곧 소거된다. 이제 니나와 마도에게 타인의 소리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함께 추는 춤에 꼭 어울리는 음악만이 이들에게 들리는 유일한 소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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