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주봉 배우전’ 개최…기주봉이라는 세계
2021-08-31
글 : 송경원
사진 : 백종헌
전국 독립영화 전용관 네곳에서 ‘기주봉 배우전’ 개최…영화 데뷔 40주년 맞은 그의 연기 궤적을 돌아보다

“하루는 그런 일이 있었어요. 대학로에서 길을 걷고 있는데, 누가 알아보고 ‘배우시죠?’라고 묻더라고요. 네, 하고 다시 길을 가는데 어디서 ‘어, 연예인이다’라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렇게 또 한참을 걷고 있는데 낯선 분이 와서 탤런트 처음 봤다고 사인을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유난히 많이 알아보는 희한한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차에 또 다른 분이 다가와 ‘예술 하는 분이시죠?’라고 하는 겁니다. 그날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나는 뭐 하는 사람일까.” 누구라도 자문해볼 만하다. 하지만 그 주인공이 연기 경력 50년이 다 되어가는, 삶의 대부분이 연기로 채워졌던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탤런트, 연예인, 예술가 그리고 배우. 이 농담 같은 일화에서 한 배우가 걸어온 길을 마주한다. 배우이자 연예인이고 예술가, 모든 합이 곧 기주봉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겐 좀더 구체적인 정리가 필요하다.

기주봉 배우가 1981년 <어둠의 자식들>로 영화계에 데뷔한 지 어느덧 40년이 지났다. 지나온 궤적을 한번 정리하고 되돌아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시점이다. 이에 9월 1일부터 11일까지 서울 아리랑시네센터와 인디스페이스, 부산 영화의전당, 광주 독립영화관에서 ‘기주봉 배우전’을 개최한다. 성북문화재단과 필름다빈이 주최하는 이번 배우전에서는 <강변호텔> <정말 먼 곳>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69세> 장편영화 4편과 단편영화 4편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그동안 기주봉 배우는 한국영화에서 당연한 존재처럼 늘 그 자리에 함께해왔다. 이제 그 당연한 것들의 궤적에서 한국영화의 또 다른 이야기를 발견해낼 때다.

-영화를 찍기 시작한 지 어느덧 40년이 되었다. 성북구에서 나고 자랐다고 들었는데, 이곳에서 다시 기획전을 하니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그러게 말이다. 숫자에는 둔감한 편이라 연기를 시작한 지 몇년이 되었는지 딱히 생각해본 일이 없다. 그저 매일 하는 일, 해야 하는 일을 하는 느낌이라. 그런데 인터뷰를 하러 여기로 오는 중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성북구 일대가 전부 내가 나고 자란 곳이다. 어릴 때 여기 언덕 근처에서 소풀을 먹이고 돌아오곤 했다. 기획전을 한다고 했을 때도 사실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 문득 그때 풀 먹이고 돌아오는 길이 떠올랐다. 이런 게 인연인가 싶다. 알고 하신 건 아니겠지만 고향에서 나를 반겨주고 찾아주는 기분이다. 이 자리를 빌려 기획전을 기획한 성북문화재단 아리랑시네센터와 필름다빈에 감사드린다. 모든 일에 인연과 때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1981년 <어둠의 자식들>로 데뷔했는데, 연기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언제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정식 데뷔는 77년 극단 ‘76’ 창립단원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했다. 딱히 계기도 없다. 아버지가 연극을 하신 영향이 있겠지만 일찍 돌아가신 터라 그런 것보다는 그냥 그걸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중학교도 연극반이 있다는 소식에 서라벌중학교로 갔는데 막상 가보니 연극반이 없어서 대신 웅변을 시작했다. 서라벌고등학교도 연극부가 있다는 이유로 진학했다. 운명이라고 말하면 거창해서 쑥스럽고 그냥 그런 시간들이 좋았다. 그러다 서라벌예술대학교를 진학하고 아마추어 연극에 한창 매진하다 졸업한 뒤 형(기국서)과 함께 극단 ‘76’을 시작했다.

-극단 76의 작품들, 예를 들면 주연을 맡은 <관객모독>은 ‘신촌의 앙팡테리블’로 불리며 한국 연극계를 뒤흔들었다.

=형은 어릴 적부터 작가 기질이 있었고 국문학을 전공했다. 글로 세상을 말하고 연극 무대도 그렇게 문학적으로 접근했던 것 같다. 나는 원체 읽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웃음) 무대를 즐기는 방식이 달랐고 그래서 더 시너지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1978년 사뮈엘 베케트의 <마지막 테이프>로 첫 주연을 맡았는데, 사실 처음 <마지막 테이프> 대본을 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처음 그걸 읽는데 무슨 말인지 아무것도 모르겠는 거다. (웃음) 창작극 등 다른 작품을 할 때랑 전혀 달랐고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형에게 도움을 구했고, 그 인연으로 연극판으로 형을 끌어들였다. 당시에 1년에 대여섯 작품씩 했는데 하나하나 생생하다. 지금 와서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그때 극장 생활 하면서 모은 자료들, 포스터나 대본, 사진 같은 것을 이사를 여러 번 하면서 모두 잃어버렸다는 거다. 아마 지나간 것에 연연하지 않는 습관은 그런 경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연극 무대 데뷔 몇해 뒤 영화에도 출연했다. 이장호 감독의 <어둠의 자식들>을 시작으로 <F학점의 천재들>(1982)의 칸트 역, <명자 아끼꼬 쏘냐>(1992) 등 10년간 8편의 작품에 이름을 올렸다.

=영화를 시작한 건 생계 때문이다. 물론 다른 매체 연기를 해보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현실적인 이유가 컸다. 다만 80년대에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땐 연극 무대가 더 비중이 컸고, 영화는 기회가 오면 간혹 조단역으로 출연하는 정도였다. 아니면 <F학점의 천재들>처럼 역할 자체가 독특해서 내가 필요하거나. 당시엔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면서도 그게 어렵게 사는 건지도 몰랐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뛰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90년대 후반부터였다. 이때도 제일 큰 건 생계의 문제였다. 일신상 이유로 이혼을 한 뒤 생활을 바꿔보자는 생각에 좀더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내 의도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기회가 왔다. 그것도 때가 있었나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1997년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가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실제 가출 청소년들의 탈선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진짜 화면과 재현된 상황이 절묘하게 섞여 있는 영화다.

=당시 서울역 노숙자들의 상황을 담아내기 위해 실제로 한달 정도 서울역에서 노숙 생활을 하기도 했다. 뭔가 거창한 연기 지론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저 나는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게 편하다. 몸에 맞는다. 한번은 후배가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하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네가 그 캐릭터가 돼라. 그 속으로 들어가라. 그게 전부다. 솔직히 말하면 당시 내 상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노숙 생활은 몸도 마음도 편했다. 자유로웠고 부담이 없었다. 그런데 연극 할 때보다 돈도 훨씬 많이 주니까 내 입장에선 그렇게 감사한 일이 없는 거다. (웃음) 물론 그것도 현실적인 생계를 생각해보면 열악하기 그지없는 출연료였지만. 다작을 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도 있다. 들어오는 걸 그다지 마다한 적은 없다.

-워낙에 성실하게,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지만 몇 줄기로 결을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캐릭터 배우로서의 기주봉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친구>(2001) 등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형사, 조폭 등 강하고 단단한 역할을 도맡다시피 했다.

=스테레오타입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런 연기도 좋아한다. 그전에 <조용한 가족>(1998)도 있었지만 시작은 아마 <인정사정 볼 것 없다>였던 것 같다. 강력1반 반장 역이었는데 강하고 진지한 역할들이 많았다. 함께 활동했던 매니저가 시나리오를 같이 읽고 추천해주기도 했다. 어떤 제작자가 ‘선배님 나온 작품은 다 잘된다. 러키보이다’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내가 잘해서라기보다는 워낙에 많이 나왔으니까. (웃음) 그래도 기분 좋았다. 흥행해서라기보다는 내 쓸모를 증명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한 작품도 소홀히 하거나 가볍게 임한 적이 없다는 거다. 매 순간 내게 요구되는 것은 다 쏟아붓는다는 감각으로 버텨왔다. 그렇게 한 작품씩 하다보니 120편, 40년이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숫자는 의미 없다. 내게는 매번 그 순간에 하나의 작품들만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지나고 나면 잘 기억이 안 난다. (웃음)

-두 번째는 독립영화에서의 기주봉이다. 캐릭터 배우로서의 기주봉이 강하고 센 역할이라면 독립예술영화에서 보인 얼굴들은 좀더 부드럽고 사실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일상 속 아저씨 같은 푸근한 느낌도 있다.

=연극 무대까지 생각하면 웬만큼 강한 역할, 색깔이 선명한 캐릭터는 다 해본 것 같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나는 좀더 개구진 면이 있다. 실제의 나와는 정반대 역할들이랄까. 현실에서의 나는 폭력적인 걸 싫어하고 좀더 유쾌하다. (웃음) 편안하고 일상적인 연기를 하고 싶은 욕망들이 있었다. 어쩌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독립영화에서 그런 얼굴들을 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좀더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다만 이제까지 강한 역할을 많이 했으니 이젠 진짜 웃기는 놈이 되어보고 싶다. 코미디 장르를 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다.

-<밤과낮>(2008), <하하하>(2010), <북촌방향>(2011),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 <자유의 언덕>(2014),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 <풀잎들>(2017), <강변호텔>(2018), <인트로덕션>(2021)까지 홍상수 감독과는 편수를 헤아리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꾸준히 함께 작업하고 있다.

=감사한 만남이다. 지인의 소개로 <밤과낮>에 출연한 이후에 꾸준히 함께하고 있지만 사적으로 교류는 없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감사한 마음을 전한 적은 한번도 없다. 아마도 이 인터뷰를 보게 된다면 내 심경을 알겠지. <강변호텔>로 수상할 때 홍 감독에게 처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어머니가 언젠가 귀인을 만날 거라고 했는데 그게 당신인 거 같다고. (웃음) 홍 감독의 현장은 그날 하루 종일 살아 있는 기분이 든다. 배우로서 힘들 수도 있지만 그 시간을 온전히 살아 있게 만드는 건 귀한 체험이다. 마치 내가 진화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마지막으로,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나 <강변호텔>처럼 최근에 주연을 맡은 영화들이 있다.

=이만큼 했는데 새삼 주연 욕심이 있을 리는 없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나를 필요로 하는 역할들이 있는데 그 역할의 크기가 영화마다 다를 뿐이다. <강변호텔>은 그동안의 나를 관찰한 홍상수 감독이 그 안에서 뭔가를 발견한 것 같고, 그게 마침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와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왔나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 몇번이나 반복하는 말인데, 모든 게 다 적절한 때가 있는 게 아닐까.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내가 선배이자 멘토로서 좋아하는 찰리 채플린을 향한 오마주가 있기도 하고, 여러모로 각별했다. 배우로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기분도 들었고. 요즘 부쩍 배우로서, 배우들과 배우에 관한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40년 동안 영화와 함께하면서 배우로서 목표가 바뀌었나.

=시기별로 나누긴 애매하고 경험이 쌓이면서 세상을 대하는 태도들이 조금씩 달라지는 건 느낀다. 혈기 왕성할 때는 명성을 날리고도 싶었고, 좀더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물론 지금 없어졌다는 게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이 알아봐주시면 기쁘고 즐겁다. (웃음) TV에 나오면서 사람들이 알아봐주실 때 새삼 인지도나 명성의 무게라는 걸 실감했다. 무대에서는 한없이 자유롭지만 무대 바깥에선 매사에 책임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갈수록 인간으로서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거 같다. 문학적, 이론적이지 않더라도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일들. 넓게 보면 세상 사람들은 다 인생이란 무대 위의 배우라고 생각한다. 그 위에서 각자의 역할이 있고, 그날 그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간다. 연기의 역할이라면 새삼스럽지만 그런 부분을 건드려주고 환기시키는 게 아닐까 싶다. 인식의 확장이라고 할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건 그렇게 틀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틀을 깨고, 틀을 넓히고 싶은 욕망이다. 아마도 배우 기주봉이 바뀐 게 아니라 인간 기주봉이 변화한 거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 가지를 구분하고 분리하는 법을 잊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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