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연의 표현에 의하면 <쇼미더고스트>의 예지(한승연)는 “노련미가 없는 사람”이다. 절친 호두(김현목)와 서울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한 월셋집살이를 시작한 그는 청년 실업자 30만명 시대의 우울한 초상이지만, 타인의 불행에 개선장군처럼 나서는 튼튼한 오지랖을 버릴 줄 모른다. 한승연은 바로 그 점에 빠져들었다. 자랑스러운 단짝을 묘사하듯 인물을 되짚는 그와 대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캐릭터의 남다른 자질이 곧 배우 자신의 것과도 닿아 있음을 알아차리게 됐다. 학창 시절부터 또렷했던 의협심, ‘배우 한승연’을 메타적으로 성찰하는 자세, 최근 몰두 중인 괜찮은 일상살이의 기술까지, 한승연의 씩씩한 걸음걸이에 잠시 발맞춘 시간을 전한다. 2007년 데뷔해 그룹 카라로 무대 위를 누비다 배우로 전향한 그는, 드라마 <왔다! 장보리> <청춘시대> <열두밤> 등을 거쳐 이제 <쇼미더고스트>로 본격적인 스크린 나들이에 시동을 건다.
소고기 파티 <쇼미더고스트>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배우상(김현목), 심사위원 특별언급(한승연), NH농협 배급지원상 등을 수상한 날, 라이브 시상식을 보고는 가족들에게 달려갔다. 그렇게 될 운명이었는지 마침 가족들이 아침에 마트에 들러서 한우를 잔뜩 사놓았기에 라이브로 시상식을 보고는 다들 기분 좋게 고기를 구웠다. 연기자로 전향한 뒤 인기상이나 스타상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연기 면에서 제대로 칭찬을 받은 기억이 없었다. 이번 기회가 내겐 연기자로서의 자질에 관해 공식적인 언급을 들은 첫 경험이었다. 성취감이 있더라.
개연성이 중요해 <쇼미더고스트>의 각본은 위트를 잃지 않으면서도 현실 감각이 선명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진지한 사회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그 안에서 끝까지 개연성과 캐릭터의 일관성을 잘 갖추고 있었다. 무엇 하나 허투루 놓치지 않은 대본이라는 생각이 믿음을 갖게 했다.
호러 마니아 공포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오컬트, 귀신, 좀비물 등 가리지 않고 다 잘 본다. <쇼미더고스트>를 찍을 때 현장에서 마주한 귀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진지하게 무서웠다. (잔뜩 즐거운 톤으로) “와! 진짜 무섭다” 하고 좋아하니까 감독님이 그걸 보시고 분장 수위를 낮췄다. (웃음) <더 라이트: 악마는 있다> <오펀: 천사의 비밀> <파라노말 액티비티> 시리즈 등을 좋아하고, 연쇄살인마가 나오는 다큐멘터리도 잘 본다. 아, 팔다리가 댕강댕강 날아다니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현장 케미 가수 출신인 나, 공대 출신인 김현목 배우, 유학파인 홍성범 배우 등 <쇼미더고스트> 현장은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더 재밌었다. 각자 신을 바라보는 방법이 동상이몽하듯 다채로웠달까. 나는 천성적으로 유머러스하고 쇼맨십이 화려한 사람은 아닌데, 남자배우들이 스스럼없이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를 냈다. 그러면 나는 ‘네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일단 다 해봐, 내가 거기에 맞춰서 열심히 해볼게!’ 하며 공을 받아주는 식이었다. 쉬는 시간에 우리끼리 쿵짝쿵짝 맞춰보다 감독님 눈치를 봐서 리허설 땐 숨기고, 본 촬영에서 마치 실수인 양 보여드리기도 했다.
데뷔작 전문 배우 필모그래피의 90%가 감독님들의 데뷔작이다. 누군가의 처음을 같이한다는 건 뜨거운 열정과 그에 상응하는 촬영 시간에 적응하는 일인 것 같다. 열의만큼 넘쳐나는 컷 수를 충분히 이해한다. (웃음) 돌이켜보면 가수 생활을 할 때도 무엇이든 처음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카라는 기존에 없었던 컨셉을 시도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맨땅에 헤딩하는 일만큼은 익숙하다. 가수와 작곡가 사이의 소통 언어가 다르듯이 감독과 배우의 커뮤니케이션 역시 다르다는 점도 배웠다.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항상성 애드리브나 즉흥성은 조금 모자란 대신에 내 캐릭터에서 꼭 가져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득하게 파고드는 힘을 길렀다. 현장의 컨디션에 휘둘리지 않고 테이크가 여러 번 반복돼도 흐트러지지 않는 연기의 지속성만큼은 자신 있다. (웃음)
오지랖의 위로 덤 앤드 더머 같지만 남이 당한 안타까움에 기꺼이 오지랖을 부리는 <쇼미더고스트> 속 친구들의 세계에 위로를 많이 받았다. 공중화장실에 들어가면 (불법 촬영 카메라가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게 되고, 대중교통에서 누군가가 뒤에 바짝 붙으면 신경 쓰이고, 잠깐 문 열어 배달음식을 가지고 들어오는 순간에도 긴장하는 모습이 요즘 젊은 여성들의 일상에 스며 있다. 게다가 취업까지 어렵다. 혼자 고립되기 쉬운 팍팍한 세상인데도 서로 같이 아파해주려는 청춘들의 모습이 그려진다는 게 참 좋았다.
정의는 나의 힘 나의 윤리에 비추어보았을 때 이 세상의 부도덕함이 너무 심하다고 판단되면 온라인 청원, 서명 운동 등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가능한 한 열심히 동참하려 한다. 내 주변 사람을 괴롭히거나 옳지 않은 일을 강요하는 것도 참기 힘들더라. 어렸을 땐 이런 성향이 특히 심해서 주변의 오해도 받았다. 이제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꽤 둥글게 깎여서 회사에서 관리하기 너무 힘들지 않은 연예인으로 살아가려 노력 중이다. 하하.
옹고집 가족 아빠는 도검 장인이신데, 평생 엄마 잔소리나 가계 사정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가고 계신다. (웃음) 어머니도 옳은 건 옳은 거고 아닌 건 아무리 우겨도 아닌 분이라 내게도 그런 성향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좀 답답하고 융통성이 없다고 해야 하나? 학창 시절에 한번은, 학급에서 배척당하는 친구를 도왔다가 모두가 내게서 등 돌리는 일을 겪은 적 있다. 그때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또 그렇게 할 것 같다.
배우 한승연 나를 캐스팅하는 감독님들이 내게 어떤 면을 기대하는지 고민해보게 된다. ‘아직 연기력만으로 나를 쓰려는 분은 드물지 않을까? 일단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레벨의 예쁜 모습을 위해 노력해야 하나? 일단 그걸 만족시킨 다음 연기를 잘해야 인정받을 수 있을까?’ 등등. 지금까지의 결론은, 직업상 필요한 외모 관리는 평소에 열심히 하되(한승연은 이걸 자주 ‘파이팅한다!’라고 표현했다.-편집자) 촬영장에선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나를 믿으며 자유롭게 하자는 것이다.
휴식의 기술 DSP(그룹 카라 활동 당시의 소속사)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쉰다는 개념을 몰랐다. 멤버가 재편되고 여러 번 데뷔하면서 수많은 새로운 시작에 익숙해졌다. 일주일 이상 쉬어본 적 없이 항상 무언가를 준비 중인 삶을 살았는데, 배우로 전향 후 그제야 혼란이 시작됐다. 쉬는 시간이 갑자기 주어졌는데 뭘 해야 할지 막막하고 작품 활동이 곧바로 이어지지 않을 땐 스스로 내 부족함을 탓하는 시간이 이어지기도 했다. 처음엔 자주 울었다. 도태될 것 같다는 불안감에 허우적거리다 어느새 이런 생활은 건강하지 않다는 자각이 찾아오더라.
인간 한승연 1년이 조금 넘었으려나, 이젠 조금씩 여유로운 시간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다. 강아지를 돌보는 일이 큰 몫을 했다(반려견 두 마리를 키우고 있고, 유기견 보호소 봉사, 반려견 동반 산책 캠페인 홍보대사 등의 활동을 했다.-편집자). 요즘에서야 내가 한명의 사람으로서 조금 괜찮은 상태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찾아오겠지만, ‘아, 나 지금 괜찮구나’ 싶은 지금의 마음을 잘 기억하고 싶다. 요즘 한창 빠져 있는 건, 커피 머신? (웃음) 큰마음 먹고 비싼 기계를 들였으니 할머니가 될 때까지 열심히 쓰겠다.
Filmography
영화
2021 <쇼미더고스트>
2017 <프레임 인 러브>
2014 <여자만화 구두 극장판>
드라마
2021 <인생덤그녀>
2020 <학교기담-응보>
2020 <아이돌 피싱캠프>
2018 <열두밤>
2018 <멈추고 싶은 순간: 어바웃 타임>
2017 <막판로맨스>
2017 <청춘시대2>
2016 <청춘시대>
2014 <왔다! 장보리>
2013 <장옥정, 사랑에 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