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재미있는 영화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둘러싼 메타버스 세상에 대한 우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한없이 가볍고 유쾌한 영화에서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낀다. 시작은 사소하다. 그 NPC들은 정말 낙원에서 행복했을까.
‘나는 당신을 봅니다’에서 ‘당신은 나를 봅니다’로
<프리 가이>는 과연 디지털 시대의 <트루먼 쇼>(1998)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프리 가이>를 둘러싼 여러 반응 중 유독 <트루먼 쇼>를 닮았다는 반응이 눈에 밟혔다. 비디오게임 ‘프리시티’를 배경으로 의식을 가진 NPC 가이가 각성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구성은 확실히 인공 도시를 탈출하는 TV쇼의 주민 트루먼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가이는 인공지능 육성 게임을 기반으로 디자인된 덕분에 ‘프리 가이’가 게임이라는 사실에 눈을 뜬다. 가이(라이언 레이놀즈)가 플레이어 시스템을 따라 성장하고 제한된 구역을 벗어나는 건 <트루먼 쇼>의 오마주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유사하다. <트루먼 쇼>가 리얼리티 TV를 중심으로 한 올드미디어에 대한 풍자였다면 <프리 가이>는 메타버스가 유행하는 세상에 어울릴 법한 상상이다. 둘 다 미디어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을 살다가 리얼 월드(혹은 또 다른 세상)를 향해 탈주한다.
하지만 엔딩에 다다를수록 둘의 차이는 또렷해진다. <프리 가이>는 행여나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며 고장난 테이프처럼 해피엔딩을 반복 재생한다. 죽었던 가이의 친구를 되살려주고 인공지능 NPC들이 행복한 삶을 산다고 여러 차례 강변하는 걸 보며 전반부에 쌓였던 만족감도 설탕처럼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해피엔딩이 싫다는 건 아니다. 행복한 결말에 대한 강박은 할리우드영화의 타고난 숙명이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가이가 행복을 강조할수록 영화 초반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던, “좋은 날 대신 최고의 날이 되세요”라던 NPC 가이의 인공적인 미소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순간 <프리 가이>가 지향하는 행복이란 무엇인지 의문이 떠올랐다.
가이, 보여주는 삶을 택한 디지털 트루먼
게임 기업 수나미의 CEO 안톤(타이카 와이티티)은 밀리(조디 코머)와 키즈(조 키어리)의 인디 게임 코드를 몰래 훔쳐와 ‘프리시티’의 베이스를 구축한다. 때문에 ‘프리시티’ 속엔 밀리와 키즈의 게임 ‘라이프 잇셀프’가 숨겨져 있고, 영화의 목적지도 주인공들이 그곳에 당도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트루먼 쇼>가 TV쇼와 시청자들을 대척점으로 삼았다면, <프리 가이>는 게임 ‘프리시티’와 ‘라이프 잇셀프’를 대척점으로 삼는다. 오픈월드 범죄게임 <그랜드 테프트 오토>(GTA)나 3인칭 슈팅 게임 <포트나이트>를 롤모델로 삼은 듯한 ‘프리시티’의 게임 장르는 슈팅 액션에 가깝다. 플레이어는 가상의 도시에서 자기 마음대로 일탈을 저지르고 폭력을 배설한다. 반면 ‘라이프 잇셀프’는 인공지능들이 성장하는 걸 관찰하고, 어쩌면 간혹 옆에서 돕는 육성 시뮬레이션 장르처럼 보인다. 세계를 꾸려나가고 보살핀다는 점에서 닌텐도의 <모여봐요 동물의 숲>이나 <심즈> <마인크래프트> 등을 연상시킨다. NPC 입장에서 보면 전자는 도구처럼 소비되고, 후자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라이프 잇셀프’를 목적지로 설정하는 순간 <프리 가이>는 <트루먼 쇼>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길을 걷는다. 게임 ‘라이프 잇셀프’는 인공지능 NPC들이 각자의 의지를 가지고 성장하고 플레이어가 이를 관찰하는 게임으로 짐작된다. 세계가 개발자에 의해 창조되었고 자신들이 인공지능 데이터라는 사실을 각성한 NPC들은 더이상 ‘프리시티’에 머물 수 없다. 의아한 건 주어진 역할과 틀에 박힌 세계에서 해방된 그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장소가 플레이어의 관음적인 관찰을 허용하는 무대, ‘라이프 잇셀프’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프리 가이>는 세계의 거짓을 깨부수는 이야기가 아니라 거꾸로 <트루먼 쇼>의 관찰 예능 속으로 자발적으로 회귀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가이는 거짓된 세계에 이별을 고하는 대신 옆 동네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로 결심한다. 알을 깨부수었다기보다는 장르를 갈아탄 것에 불과한 선택.
디지털 세계에 떨어진 트루먼은 왜 떠날 수 없는가. 그곳이 자신이 속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트루먼과 가이의 선택은 언뜻 다른 듯 보이지만 실은 같은 맥락이다. 핵심은 ‘내가 속한,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피와 살점으로 이뤄진, 에테르 월드에 속하는 트루먼은 TV 예능이란 꾸며진 세계 대신 현실을 향해 떠난다. 한편 디지털 정보로 이뤄진 가이는 자신에게 역할 수행을 강요하는 ‘프리시티’를 떠나 자유의지를 발현할 수 있는 ‘라이프 잇셀프’에 정착한다. 겉보기엔 탈주와 정착이라는 서로 다른 결과처럼 보이지만 실은 본래 속한 세계로 회귀한다는 점에서 트루먼과 가이의 행보는 일치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트루먼과 가이의 차이를 만들었는가. 에테르와 디지털, 두 캐릭터의 물적 토대의 차이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두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는 차라리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무엇을 진짜라고 믿는지에 관한 태도의 차이라고 해도 좋겠다. 해묵은 질문은 여기서 출발한다. 내가 속한 세계는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가. 바꿔 말하면 이야기는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또 다른 질문을 통해 약간의 우회로를 거칠 필요가 있다. ‘라이프 잇셀프’에서 인공지능 NPC들은 진짜 행복할까. 똑같은 질문을 트루먼에게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트루먼은 현실로 돌아가 행복했을까. 물론 알 수 없다. <트루먼 쇼>는 그것을 알 수 없음으로 남겨둔다. 스튜디오 바깥에서 트루먼에게 쏟아지는 미디어의 관심은 훨씬 더 지옥 같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영역으로 걸음을 옮기는 선택, 그것이 트루먼을 TV 스타가 아닌 인간으로 만들어준다.
그에 반해 <프리 가이>의 엔딩은 어딘지 불안해 보인다. 영화는 ‘프리시티’의 세계와 비교해서 이곳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를 가이의 입을 빌려 끊임없이 호소한다. 게임 ‘프리시티’의 그림자 속에 ‘라이프 잇셀프’의 코드가 숨겨져 있었던 것처럼 행복한 엔딩에 대한 그 수다스러운 반복에서 도리어 불안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최고의 날”에 대한 가이의 대사는 ‘NPC들이 자신들의 일상을 관찰당하는 것을 좋아할까’라는 질문이 들지 않도록 계속 억누르는, 일종의 자기최면을 위한 주문이라 봐도 무방하다. 물론 인공지능들이 앞으로 어떤 세상을 펼쳐나갈지는 알 수 없다. 어떤 NPC는 플레이어들이 접속하여 자신들의 생활을 바라보는 것을 즐길 수도 있고, 어떤 NPC는 인공지능의 권리를 주장하며 혁명으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NPC들은 에테르 월드로 넘어올 수 없는 분리된 세계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리란 점이다. 이것이 <프리 가이>가 기존의 가상 세계를 다루는 영화들과 결정적인 시선의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다.
디지털 유토피아가 펼쳐내는 해맑고 화사한 묵시록
그들은 물질 세계로 넘어올 수 없다. 가상현실을 다루는 숱한 영화들, 예컨대 <트론>이나 <매트릭스> 시리즈 등은 인간의 관점에서 정신(이라고 불리는 어떤 정보들)이 가상현실 속에 구축되는 상황들을 다룬다. 이것은 세계의 확장에 대한 이야기다. 물질과 디지털 사이에는 모종의 통로가 있고, 어떤 관점에서는 이 통로를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을 벌인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NPC로 관점을 옮긴 <프리 가이>는 확장보다 분리를 선택한다. 분리되었기에 이들을 향한 관음이 허락된다. 적어도 현 단계에서는 되는 것처럼 그려진다. 언젠가 NPC들의 의식이 더욱 개발되어 물질 세계로 넘어오기를 욕망할 수도 있다. 디지털 세계가 현실을 향한 관음을 시작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프리 가이>는 일단 분리된 세계를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것이 행복과 해방이라고 포장한다. <트루먼 쇼>에서 문제가 되었던 끝없는 관찰은 이제 갓 싹을 틔운 디지털 세계에서는 오히려 세계의 토대이자 본질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가이는 <아바타> 속 대사 “나는 당신을 봅니다”를 반복하며 지금, 여기서, 자신의 의식이 바라보는 것(정보)들의 현재성을 긍정하기로 한다. 여기가 물질을 기준으로 한 진짜 세계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사실 그에 대한 답은 친구인 버디(릴 렐 하워리)가 대신 제공한다. 자신이 인공지능이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는 가이에게 버디는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 순간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프리 가이>는 가상 세계를 현실의 확장이 아니라 철저히 분리된, 또 다른 현실로 인식시킨다. 이처럼 NPC들이 자신의 존재와 쓸모를 발견하는 과정은 어딘지 현실과 영화의 관계와 닮았다.
영화는 한없이 현실에 가까위지기를 욕망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영화의 역사를 훑어보면 이때 영화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하나는 현실의 특정 순간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의 힘을 빌려 특정 상황들을 잘라 이어붙이는 것이다. 전자가 사실주의, 후자가 표현주의의 씨앗이라고 봤을 때 <프리 가이>는 마치 사실주의 영화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현실을 논한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하는 것들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어디에 있냐는 인식. 디지털 정보로 이뤄진 인공지능 NPC들은 디지털 세상의 현재성을 긍정하기 위해 자신들의 세계를 물질 세계와 분리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도달한 명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카메라가 현실을 창조했던 방식, 지금 여기의 진실이다.
내가 생각하는 영화의 가능성도 여기에 있다. 이야기는 사건들을 연결하고 연쇄시켜 매끈한 상황을 창조한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모든 사건들이 카메라에 담길 수는 없고, 반드시 누락되는 것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어떤 영화들은 이 누락된 것들에 시간과 애정을 쏟는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건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 사이의 무언가를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잉여의 비어 있는 시간이라고 부르는 사건 바깥의 시간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낸다. 때론 한 장면의 시간을 길게 보여주기도 하고, 때론 원초적이고 순수한 움직임의 합주를 통한 마술적 매혹을 선보이기도 한다. 어떤 방식이건 영화는 전형적인 내러티브의 사슬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물론 해방된 영화가 현실로 넘어오는 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그림자를 환기시키는 거대한 은유에 가깝다.
<프리 가이>가 흥미로운 것은 의도와 상관없이 일정 부분 영화가 현실을 담고자 했던 과정을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프리시티’라는 게임의 목적을 기준으로 본다면 가이를 비롯한 NPC의 삶은 잉여 정보이자 데이터의 낭비다. 가이가 아침에 일어나 금붕어에게 인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창가에 서서 블라인드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행위는 플레이어들에게 하등 쓸모없는 작업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쓸모없는 데이터들이 모여 온라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곳은 디지털 데이터를 기반으로 창조된 또 하나의 세계이고, 그 위에 플레이어들이 참여하는 것에 가깝다. 선글라스를 쓰면 플레이어만 볼 수 있는 점수와 아이템들이 작동하는 것이 증강현실처럼 그려진다.
다시 말해 <프리 가이>의 디지털 세상은 게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창조된) 세계 위에서 플레이어들의 행위가 더해지는 방식이다. 그곳이 또 하나의 진실, 또 다른 세계라면 응당 사건(플레이)에 종속되지 않은 시간과 행위들이 존재해야 하고, <프리 가이>의 이야기는 바로 그 잉여로운 정보로부터 시작된다. 그리하여 디지털 인공지능들은 말한다. 자신들이 느끼는 이 정보의 조합들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어디에 있냐고. 20세기 포토그래픽 시네마들이 그토록 복원하려고 했던 사진적 영상의 모티브가 디지털 세계에서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꽃을 피운다.
(지금부터,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당신은 나를 봅니다
물론 <프리 가이>는 거대한 철학적 기반으로 사유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차라리 각종 모티브만을 따와서 비틀고 모자이크한 퍼레이드 장식에 가깝다. 가령 장식물이 천사나 용 등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건 겉모양뿐이다. 그럼에도 무엇이 진짜인지를 묻는 이 기묘한 콜라주의 결과물은 의도치 않은 균열과 가능성을 제공한다. 한없이 현실에 가까워지려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방할 때, 도리어 영화는 현실로부터 멀어진다. 영화와 현실의 연결통로가 뚫리는 순간은 오직 언어 바깥의 추상적인 은유들, 공백의 상상력을 통해서 가능하다. 현실의 이미지를 닮은 대신 현실의 작동 메커니즘을 닮은 영화들.
<프리 가이>가 디지털 세계에서 유토피아를 구축하는 방식도 이와 같다. 현실과 분리되어, 이곳이 디지털 세상임을 인지한 존재- 인공지능들이 자신들의 현재를 긍정하는 것. 이것은 디지털 유토피아의 구현인 동시에 묵시록의 씨앗처럼 보인다. <트루먼 쇼>의 트루먼은 인간이기에 시선 바깥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리 가이>의 주민들은 그럴 수 없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들은 시선, 본다는 행위 그 자체가 존재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모순은 여기에 있다. <프리 가이>는 0과 1 사이에 존재하는 목적 없는 데이터, 데이터의 낭비를 긍정하고 사이의 시간을 복원시킨다. 마치 리얼리즘 영화처럼. 동시에 이들은 철저하게 ‘바라봄으로써 존재하는’ 역할에 얽매여 있다. 폭력성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지 않을 때도 그들은 존재하는가. 영화는 그렇다고 말하지만 나는 믿을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SF영화들이 있다. 가령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과 레플리칸트를 구분하는 영화가 아니다. 인간다운 것과 더 인간다운 것 사이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지를 질문하는 영화다. 여기서 인간다움의 물적 토대는 기억과 그에 따른 행동이다. <프리 가이>는 어떤가. 이 영화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인공지능 NPC는 이미 살아 있는 (데이터적) 존재라고 전제하고 시작한다. 인공‘지능’의 인간성이라 해도 좋겠다.
덕분에 영화는 의도치 않은 지점에서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사진이라는 물적 토대가 사라진 시대에 이야기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야기는 어떻게 현실을 재현하고 실어나를 수 있을까. <프리 가이>는 내내 강변한다. “이게 진짜가 아닐 이유가 있어?” 하지만 커지는 목소리에 비례하여 나의 불안감도 커져만 간다. 가이와 버디, 디지털 주민들은 자유의지를 말하지만 스스로 리얼리티 쇼로 걸어들어가는, 혹은 리얼리티 쇼에서만 존재 가능한 그들이 인간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이 아마도 내가 디지털 그래픽이 구축하는 사실적인 감각보다 포토그래픽의 무게와 중력에서 발생하는 환상을 더 믿고 싶은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렇게 다시 말할 수 있겠다. <아바타>가 “나는 당신을 봅니다”로 디지털 이미지의 존재를 증명했다면 <프리 가이>는 거꾸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나를 봅니다. 이 차이는 꽤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