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고) 영화 및 소설 <마션>의 줄거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싶은 영화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할리우드판 <공각기동대> 리메이크 영화는 대체 왜 핵심 캐릭터인 ‘인형사’를 빼기로 결정한 걸까. <스타쉽 트루퍼스>는 강화복도 빼버리고 소설의 스토리라인도 따르지 않을 거면서 뭐 하러 원작의 판권을 산 걸까. <프로메테우스>는 단독 작품으로도 충분히 훌륭한데 왜 굳이 마지막에 프랜차이즈를 끼얹어 좋았던 기분을 망치는 걸까. 천재적인 감독 드니 빌뇌브가 어쩌다 <네 인생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옮길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고 만 걸까.
소설, 만화, 영화는 전혀 다른 매체다. 단지 장단점이 구별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표현이 불가능한 지점들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은 원작 만화의 거친 펜 터치 질감과 독특한 데포르메(déformer, 그리려는 대상의 형태를 변형하는 것) 미감을 끝내 재현하지 못했다. <본 슈프리머시>의 속도감 있는 액션 장면은 결코 소설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떤 영화적 표현도 소설만큼 깊숙이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해주진 못한다.
소설에는 절대 영화로 옮길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모든 소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소설들은 그 작품의 핵심을 영상으로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영화 <마션>은 이런 실패의 가장 끔찍한 표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앤디 위어의 수다쟁이 소설 <마션>은 끝장나게 재미있는 하드 SF다. 머리가 하얘질 정도로 심도 깊은 공돌이 토크가 끝없이 이어지면서도 이렇게 가볍고 흥미로울 수 있다니. 작가는 분명 천재 아니면 미치광이인 게 분명하다. 이 멋진 소설을 리들리 스콧 감독이 영화로 옮긴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많은 이들이 기대에 부풀었다. 최고의 소설에 최고의 감독이라니, 재미가 없을 수 없는 조합이지 않은가. 나 역시 설레는 마음으로 개봉 첫날 극장표를 예매했다.
그런데 맙소사.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극장에서 내가 마주한 결과물은 끔찍했다. 영화는 소설에서 제일 재미없는 부분만 가져와서는 그걸 더 재미없게 각색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마션>은 화성 탐사 중에 홀로 표류하게 된 우주비행사 마크 와트니가 생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500여일간의 과정을 그리는 이야기다.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화성판 로빈슨 크루소’인 셈. 주인공 마크는 불가능에 가까운 고난에 맞서 지구로 귀환하기 위한 투쟁을 이어간다. 소설이 가장 재미있게 다루는 부분은 두 가지다. 첫째는 주인공 마크의 걸출한 입담. 둘째는 매 순간 펼쳐지는 위기를 극복하는 과학적 퍼즐 풀이 과정이다. 문제는 영화라는 매체가 이 두 가지 요소를 표현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점이다. 소설 <마션>은 대부분의 분량을 주인공 마크 와트니의 1인칭으로 서술한다. ‘일지’의 형식으로 마크가 입담을 과시하며 끊임없이 수다를 늘어놓는 것이 소설 분량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럴 수 없다. 잠시도 쉬지 않는 내면의 입담을 전부 독백으로 바꾼다면 마크가 광인처럼 보일 테니까. 소설에 비하자면 영화 속 마크는 ‘상당히’ 과묵하다. 상대역이 없으니 수다를 떨 수 있을 리 없다. 페이지마다 폭포처럼 줄줄 쏟아지는 유머 대부분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그는 격벽에 박힌 볼트에 시선을 빼앗겼다. 오각형이었다. 나사는 왜 그 볼트만 육각형이 아닌 오각형으로 만들었을까 의아했다. 그것을 조이거나 풀려면 특수 렌치가 필요할 텐데 말이다. … (중략) … 의식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사이, 그는 저렇게 멋진 오각형 볼트는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이야기의 최후반, 화성 탈출을 시도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불쑥 등장하는 이 문단은 내가 소설 <마션>에서 가장 사랑하는 구절이다. 당장 목숨이 날아갈지 모르는 위기 상황에서도 머릿속으로는 왜 하필 눈앞의 저 볼트만 오각형인지 불편해 죽겠는 지독한 공돌이 마크. 이건 영화로는 영원히 구현할 수 없는 감정이다.
또 다른 재미 요소인 과학적 퍼즐 풀이도 단순해졌다. 아니, 거의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소설 속 마크는 모든 변수를 ‘계산’하지만, 계산기 두드리는 모습만 주야장천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획하는 공돌이 마크는 디스코에 미친 무한 낙천가로 변해버렸다.
화성을 무대로 했을 때만 묘사할 수 있는 다양한 재난 상황도 거의 지워졌다. 소변을 정수하는 기계가 고장나 바닥에 소변을 봐야 하는지 걱정하는 식의 우습고 유니크한 고민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폭발과 산소 유출,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상처를 꿰매는 식의 뻔한 장면들로 채워졌다. 이러면 배경이 화성일 이유가 없다. 그냥 사막에서 표류하면 되지.
개인적으로 원작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퍼즐 파트는 단거리 탐사용 자동차 ‘로버’가 3200km 장거리를 주파할 수 있게 개조하는 과정이었다. 작가는 이 개조 과정을 수십 페이지에 걸쳐 하나하나 치밀하게 묘사해나가는데,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아이언맨> 첫편에서 토니 스타크가 슈트를 만드는 과정보다 열배쯤은 재미있었던 것 같다. 거의 변신 로봇의 탄생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큼 흥미롭다. 하지만 영화에선 어떨까? 감성적인 복고 음악 하나 깔아두고 드릴질 몇번 하면 끝이다. 나머진 이쪽저쪽을 교차 편집하며 한달 동안의 개고생을 순식간에 휙 지나쳐버리는 것이다. 원작자가 몇달은 고민해 구상했을 치밀한 개조 과정을 30초도 안되는 시간 만에 휙 날려버리고 벽면에 하루하루 날짜를 그려넣는 장면으로 대신한다. 으, 벽에다 뭘 긁어서 날짜 헤아리는 장면은 대체 언제까지 봐야 하는 건지.
물론 영화만이 가진 장점도 정말 많다. 영화 내내 들려주는 디스코 음악들, 한순간에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맷 데이먼의 면도 장면, 화성의 푸른 일몰 풍경 같은 것들. 이는 분명 글로 읽어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상이리라.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리들리 스콧의 <마션>은 결코 못 만든 영화가 아니다. 거장의 이름값에 걸맞은 무척 흥미롭고 완성도 있는 수작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굳이 이런 식으로 만들 거라면, 원작의 핵심 요소를 모두 걷어내버릴 거라면, 다른 훌륭한 원작들을 두고 왜 굳이 이 소설을 가져다 영화로 만드는 걸까. 애초에 <마션>은 영상으로 옮기기 힘든 소설이다. 같은 작가의 후속작 <아르테미스>와 비교해보면 이를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전작에 비해 훨씬 영상으로 옮기기 적합하고, 영화화가 기대되는 소설이다.
안다. 검증된 원작에 기대어 안전한 선택을 하고픈 마음. 한편의 영화에 엄청난 돈을 들이부어야 하는 관계자들의 불안도 물론 이해는 한다. 나 같은 문외한이 알기 힘든 복잡한 사정도 잔뜩 있었겠지. 물론 각색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각색자의 자유다. 하지만 기왕이면 원작이 가진 핵심만큼은 보존해주었으면 좋겠다. 원작자가 그걸 바라든 바라지 않든 말이다. 그게 원작자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아닐지.